<나목에 관한 시 모음> 박재화의 '나목'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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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에 관한 시 모음> 박재화의 '나목' 외 + 나목 한때 가없는 하늘 이고 솟던 잎들 한때 뜨거운 바람과 수작하던 잎들 파도 지나 사막 지나 이제는 무장해제다 --미처 자결하지 못한 꿈들. (박재화·시인, 1951-) + 겨울 나목처럼 앙상하게 드러난 뼈만으로 견디어 보자, 내게서 모든 살과 피를 가시게 하여. 詩의 젖꼭지를 빨던 기억만이, 그래도 되살아 뼛속에 서걱이리, 눈물 지우리. (박희진·시인, 1931-) + 裸木 칼바람 눈밭에서도 나무는 당당하다 꽃을 피워내며 몸을 낮추고 잎을 거느리며 가지를 늘어뜨리고 열매를 키우며 몸을 숙이던 나무는 잎도 열매도 모두 내려놓고 겨울날부터 차가운 바람 살이 터지는 추위에도 더욱 몸을 꼿꼿이 세우고 어찌 당당히 맞설 수 있는지 욕심도 버리고 빈 몸이 되면 떳떳할 수 있다는 걸 침묵으로 말한다 (유창섭·사진작가 시인, 1944-) + 나목 이 세상에 부귀영화 화려하게 꽃 피워도 한순간에 떨어지는 잎새 같은 것 삭풍에 몸을 떨며 침묵으로 외치는 너의 모습이 애처롭고 아름답다 삶의 시작도 허무의 점 찍고 가는 종말도 잎새 하나 없는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고 벗은 몸으로 외치는 진리의 전도자 말 못하는 만물이 무지한 인간을 깨우치고 있다 (김내식·시인, 경북 영주 출생) + 裸木·1 오월의 나무들 함께 어울려 푸른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 때 세상은 아름다운 세월로 사라져가지만 헐벗은 몸으로 칼끝 바람 맞으며 저 나무들 산제(山祭) 드릴 때 하얀 하늘을 향해 세상은 신성한 신화의 시대로 되돌아간다 (이상열·화가 시인, 1944-) + 나목(裸木) 서걱서걱 畵筆을 저으며 높은 하늘에 그림을 그린다. 가진 것 다 벗어주고 오히려 따사로운 裸木의 內容, 높은 하늘에 혼자만 아는 색깔을 칠한다. 노래하는 江물 깊이 逆光을 드리우고 아프게 닳아내린 노을의 밀도 더 짙은 체온의 색깔을 배합한다.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간 安定의 허탈한 팔 사이로 기억의 바람이 불고 가고 裸木은 먼데를 내다본다. 언 江밑을 숨쉬는 은밀한 흐름을 알아차린다. (강계순·시인, 1937-) + 나목 옆에서 나목 너의 옆에 나도 나목이란다 맵고 아린 추위에 목욕한단다 빛나는 궁창 눈부심 희석하니 더 자애롭고 겨울나는 꽃대궁이 꽃 중의 꽃이어라 나목 너의 옆에 나도 나목이란다 소름끼 포스스 돋는 얼음냉수에 너와 나 밤낮 없이 목욕한단다 (김남조·시인, 1927-) + 나목 뒷뜰 나이 많은 감나무 한 그루 마지막 잎새 마저 벗어 버렸네 비울 것 다 비우고 버릴 것 다 버리고 동장군의 침공에 의연히 맞서는구나 비울 때 비울 줄 알고 버릴 때 버릴 줄 아는 나무 너는 참 멋진 놈이야.. (이문조·시인) + 나목(裸木) 이젠 모두 떠났다. 이젠 다 주었다. 이젠 모두 벗어 버렸다. 이젠 더 이상 잃을 것도 보낼 것도 버릴 것도 하나 없다. 남은 몸뚱이까지도 북풍한설에 알몸으로 내어놓았다. 이렇게 무가 되어야 이렇게 무심이 되어야 이렇게 아무런 욕심이 없어야 진정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 내가 가진 것 내가 이룬 공 내가 소중히 하던 것 그것들은 원래부터 나의 것은 아닌 것 잠시 내 곁에서 함께 했을 뿐 공을 이루었으면 이제는 버려야 하는 것 할 일을 다 했다면 거리낌없이 떠나야 할 일 또 때가 되면 푸른 세상이야 오겠지 이젠 꿈만이 소중히 간직해야겠다. (김대식·시인, 경북 포항시 거주) + 나목의 계절 - '박수근 전'을 보고 바람은 늘 불더라. 맨 땅만 쓸고 있더라. 낮은 저 초가지붕 더 낮게 엎드린 시간 표정을 지운 아낙이 정물로 흔들리더라. 세상은 벌거숭이더라. 차라리 마음 편하더라. 잎 하나 그릴 수 없는 낯익은 겨울 속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면 나도 그만 정물이더라. (임삼규·시인, 전북 익산 출생) + 나목(裸木) 가을 나무는 그 화려한 여름의 옷들을 남김없이 벗어 던지고 다가오는 찬 겨울을 알몸으로 맞으려 한다 이 시대에 상처받은 우리들이여 저 나무처럼 우리도 옷을 벗자 이성理性을 칼날을 눕히고 껍데기뿐인 나를 거두고 우리가 가진 오직 하나 절박한 진실만으로 감격하자 봄을 위해 아껴둔 수액樹液 어쩌면 모진 추위에 우리 곁을 떠날지도 몰라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내일이여 준비할 많은 양식도 필요치 않다 오늘의 금빛 미소와 가슴을 덥힐 수 있는 불기, 그저 한 잔의 물로도 족하다 가을 낙엽은 미련 없이 제 몸을 흙에 묻으며 새로 태어날 봄을 기도할 때 우리는 봄이 없는 사람 다시 태어날 기약이 없느니. (윤준경·시인, 경기도 양주 출생) + 나목(裸木) 조용히 벗고 낮게 엎드려 추위를 피하련다 북풍한설 몰아치면 굳이 맞서려 하지 않고 좌우로 흔들렸다 고개 숙였다 잔가지는 적당히 생채기도 나보고 몸통은 몇 차례 알싸하게 얻어맞다가 일기예보 잠잠해지면 풀어헤친 몸매 반듯하게 다듬으련다 흰 눈이 내리는 날이면 찌든 때 말끔히 벗겨내고 여름내 겨드랑이에 머물던 체취 허공에 날려보내련다 이렇게 견디고 견디다 보면 파란 하늘이 열리고 쨍쨍한 날이 살포시 다가와 애인처럼 뜨겁게 가슴을 녹여주겠지 새 움의 희망을 포근히 간직한 채 내일을 위하여 활화산처럼 열기를 토해내련다 (반기룡·시인) + 나목 가야 했던 길이 결국 제자리였음에 겉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가지 사이로 우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빈손으로 당신 앞에 섰습니다 말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었고 처음부터 혼자였기에 헤어짐 또한 없었던 것이었는데 나무람보다 침묵 그 말씀이 마디마디 군살로 잡혀 이제사 두 손 높이 들고 당신 앞에 섰습니다 짧은 햇살에 눈 시리고 간밤에 둥지마저 떨어진 가슴이지만 나이테 감춘 긴 겨울밤 이야기 전 혼자 들으려 당신 앞에 빈손으로 섰습니다 (이훈식·목사 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