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아홉번째 이야기)
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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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부
<아기 예수는 슬픔 속에서 탄생한다.>
제 4 장 두 차례의 잊을 수 없는 아픔
"이렇게 접어봐. 그리고 접은 자릴 칼로 똑바로 잘라."
칼은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종이를 가리고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엷게 풀을 칠해 이렇게."
또또까형 곁에 앉아 나는 종이 풍선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풀을 다 칠한 후 또또까형은 빨래집게로 풍선 주둥이를 집어 맸다.
"잘 마른 다음에 입을 만들어야 해. 알겠니, 바보야?"
"알겠어."
우리는 부엌 문지방에 앉아서 풍선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풍선은 좀처럼 마르지 않았다. 그럴 때면 또또까형은 선생님처럼 자세히 설명을 해 주곤 하였다.
"당제르식 풍선은 여러 번 연습한 후에야 만들 수 있어. 처음 만드는 애들은 두 개의 깃이 달린 쉬운 것으로 해야 돼."
"또또까 형, 이젠 나 혼자 풍선을 만들어 볼게. 그렇지만 주둥이 부분은 형이 만들어 줘야 돼."
"글쎄, 생각해 볼까?"
말은 안 했지만 또또까형은 내게 종이 풍선 접는 법을 가르쳐 주는 대신 항상 그만한 대가를 요구해 왔었다. 그건 나의 구슬치기 기술을 배운다거나, 아니면 '아무도 내가 그토록 자랐는지 몰라요'라는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의 그림 딱지를 원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내 참, 또또까형도 형이 부탁해서 형 대신 싸워 주기까지 했잖아."
"좋아, 한 번만 공짜로 해 주겠어. 하지만 네가 잘못 배웠을 때에는 공짜로 안해 줄테야. 알았지?"
"좋아."
그 순간 나는 잘 배워서 다음부턴 또또까형이 손도 못 대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풍선 만들기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꼭 '나의 풍선'을 만들어야지. 뽀르뚜가에게 이런 얘길 하면 그가 얼마나 기뻐할까. 내 손에서 흔들리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구슬 주머니와 같은 그림이 여러장 있는 딱지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난 그런 구슬이나 그림 딱지들을 아주 싸게 누구에게든 넘겨주고 싶었다. 풍선을 만들 예쁜 종이 두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야! 얘들아, 구슬 사라, 일 또스랑에 구슬 다섯 개 줄게. 아주 새거야."
그러나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 또스땅에 딱지 열 장 줄게. 로따 부인의 가게에서도 이렇게 싸게는 못 살 거야."
그래도 사는 아이가 없었다. 사실 돈을 갖고 있는 애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었다. '쁘로그레수'거리로, '까빠네마 남작'거리로 가봤으나 헛수고였다. 혹시 진지냐 할머니 댁에 가볼까? 갔었으나 할머니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셨다.
"내겐 딱지나 구슬 따위는 필요없다. 네가 갖고 있는 게 더 좋을 게다. 그렇지 않으면 내일 아침이면 또 새걸 사달라고 조를 텐데 뭘?"
사실은 할머니도 돈이 없으셨던 것이다.
나는 다시 길거리로 나왔다. 내 두 다리는 먼지로 굉장히 더러워져 있었고 날은 벌써 저물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제제! 제제!"
비리끼뉴가 나를 부르며 급히 달려왔다.
"사방으로 널 찾아다녔어. 너 아직도 팔 게 남아 있니?"
나는 주머니를 흔들어 구슬이 찰랑거리도록 했다.
"앉아 봐."
나는 땅바닥에 물건을 펼쳐 보았다.
"얼마니?"
"일 또스땅에 구슬은 다섯 개, 딱지는 열 장씩 줄게."
"좀 더 싸게는 안 되니?"
나는 이제 신경질이 나버렸다.
'네 놈처럼 싸게만 사려는 녀석에겐 비쌀 테지.'
나는 전부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하였다.
"잠깐만, 골라도 되니?"
"얼마나 있니?"
"삼백 레이스, 이백 레이스 정도 쓸 수 있어."
"좋아, 그럼 구슬 여섯 개와 딱지 열 두 장 줄게."
나는 '미제리아 이 포미' 상점으로 날 듯이 뛰어들어갔다. 뽀르뚜가와의 일을 기억할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단지 오르란도 씨만이 카운터에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공장의 경적이 울리고 사람들이 나와서 뭘 마실 때에만 겨우 꽉 찰 정도로 늘 한산했다.
"은종이 있어요?"
"돈은 있니? 네 아버진 앞으론 더 이상 외상이 안 된다."
나는 화도 내지 않고 동전 두 개를 내보였다.
"장미색과 호박색뿐이구나."
"그 색밖에 없나요?"
"연 날리는 시기라 애들이 모두 사갔단다. 하지만 뭐 다를 게 있을까? 연은 무슨 색이든 올라가잖아, 안 그래?"
"연을 만들게 아녜요. 풍선을 만들 거예요. 내 첫 번째 풍선은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만들고 싶거든요."
그러나 지체할 수가 없었다. 쉬꼬 후랑꼬 잡화상까지 뛰어가자면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게 될 것 같았다.
"그걸로 주세요."
나는 책상 앞에 의자를 놓고 망을 보도록 루이스 왕을 올려놓았다.
"조용히 해야 해. 약속하지? 이 제제 형은 지금 아주 어려운 일을 하려 한단 말씀이야. 네가 크면 네겐 공짜로 가르쳐 줄게."
주위는 점점 어두워졌고 공장의 경적소리도 울렸다. 좀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잔디라 누나는 벌써 식탁에 접시를 놓고 있었다. 그녀는 어른들을 성가시게 군다고 우리에겐 먼저 저녁을 주었다.
"제제! 루이스!"
그녀는 우리가 '무룬드'거리에 나가 노는 것도 아닌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루이스를 내려놓고 타일렀다.
"먼저 가 있어, 곧 갈게."
"제제 형, 빨리 와, 안 그러면 또 때릴 거야."
"그래 곧 갈게."
'저 악마 같은 것이 기분이 나쁜가 보군. 애인 녀석들 중 누구와 싸운 모양이야. 끝에 사는 녀석 아니면 첫 번째 거리에 사는 녀석이겠지.'
풀이 마르기 시작해, 일부러 그런 것처럼 손가락에 풀이 붙어 만들기가 더 더디어졌다.
햇빛은 거의 사라져가고 있었고 누나는 부르는 소리도 점점 높아졌다.
"제제! 제제!"
볼장 다 봤군. 이젠 죽었어. 누나는 약이 잔뜩 올라서 쫓아왔다.
"넌 내가 식모인줄 아니? 빨리 가 밥 먹지 못하겠니?"
그리고 방으로 들어와 내 귀를 잡고 식당까지 끌고 가서 식탁 앞으로 확 밀었다. 나는 기분이 상했다.
"안 먹어, 안 먹는단 말야. 난 내 풍선 만드는 것을 마저 끝낼거야."
나는 식당을 뛰쳐나와 아까 그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러자 누나는 맹수처럼 날뛰었다.
누나는 내게로 오는 대신 책상 쪽으로 갔다. 그러자 모든 것이 정말 한 낮의 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누나는 내 풍선을 갈기갈기 찢는 것도 맘에 안 차는 지(난 맥이 빠져 멍하니 서 있었다.) 내 팔과 다리를 잡고 식당 가운데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말로 할 때 좀 들어!"
그러자 내 마음속의 악마가 되살아났다. 반항심이 태풍처럼 나를 뒤흔들었다. 어쩌면 머리를 쥐어박는 정도로 끝났을 지도 몰랐다.
"널 뭐라고 그러는 지 아니? 갈보야."
그녀는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갖다대고 상기된 얼굴과 두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용기가 있으면 다시 말해 봐!"
나는 음절을 끊어가며 다시 말했다.
"갈-보!"
그러자 그녀는 장 위에 있던 가죽장갑을 집어 정신없이 날 때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등을 돌려 손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나 고통은 분노보다 덜했다.
"갈-보! 갈보야! 갈보 계집애!....."
그녀는 쉬지 않고 계속 때렸다. 내 몸은 불덩이처럼 활활 타올라 쓰려졌다. 바로 그때 또또까형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날 너무 때려 지쳐 있던 누나의 좋은 협력자가 되어 주었다.
"죽여, 죽이란 말이야! 내 대신 복수하기 위해 감옥이 널 기다린다."
그녀는 내가 무릎을 꿇고 거꾸로 쓰러질 때까지 마구 때렸다. 나는 옷장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갈보! 이 갈보 같은 년!"
또또까형은 날 일으켜 앞으로 돌려세웠다.
"입닥쳐, 제제! 누가 누나에게 그 따위 욕을 하든?"
"누난 갈보야, 살인자, 나쁜 계집애!"
그러자 그는 얼굴, 코, 입 할 것 없이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특히 입을 심하게 때렸다.
나를 구원해 준 사람은 소리를 듣고 달려온 글로리아 누나였다. 그녀는 로제나 부인댁에서 얘기하고 있던 중 고함 소리를 듣고 날 듯이 달려왔다. 그리고 마치 태풍처럼 방으로 뛰어 들었다. 글로리아 누나는 피에 흠뻑 젖은 내 얼굴을 보자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또또까형을 밀어젖혔다. 그리고 잔디라 누나를 떠밀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눈도 못 뜨고 겨우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글로리아 누나는 방으로 날 데려갔다. 난 울지 않았으나 루이스 왕이 놀란 나머지 안방에 숨어 엉엉 울고 있었다. 이유없이 날 때리는 것을 보고 놀란 것 같았다.
글로리아 누나는 이번엔 굉장히 화를 냈다.
"언젠가 너희들이 이 어린애를 죽일 거야. 두고 봐. 인정머리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괴물들아."
그녀는 날 침대에 눕히고 소금물이 담긴 대야를 가져왔다. 또또까형이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왔으나 누나가 그를 밀어냈다.
"저런 나가 있어, 이 바보야!"
"누난 저 녀석이 욕하는 소릴 못 들어서 그래!"
"이 애는 아무 욕도 안했어. 너희들이 먼저 싸움을 걸었을 거야. 내가 나갈 때만 해도 조용히 앉아서 자기 풍선을 만들고 있었어. 인정머리 없는 애들이야. 어떻게 자기 동생을 이토록 때릴 수가 있니?"
글로리아 누나가 얼굴의 피를 닦아내고 있을 때 나는 대야에 침을 뱉었다. 그러자 입에서 이빨 하나가 튀어 나왔다. 이것을 본 글로리아 누나는 화산이 폭발하듯 격분했다.
"자, 네가 무슨 짓을 했나 봐라. 이 겁쟁이 녀석아, 넌 싸움을 할 땐 무서워서 이 애를 불러냈지? 이 겁쟁이 녀석아, 아홉 살씩 먹어 가지고 여태 이부자리에 오줌을 싸면서, 매일 아침 서랍 속에 숨겨두는 오줌 싼 바지와 침대 시트를 사람들에게 보여줄까?"
그녀는 방밖으로 모두 쫓아내고 문을 잠궈버렸다. 그리고 완전히 어두워졌는지 등불을 켰다. 그 후 내 샤쓰를 벗겨 상처와 뒤범벅이 된 몸을 닦아 주었다.
"많이 아팠지?"
"이번엔 정말 굉장히 아팠어."
"내가 아프지 않게 잘 문질러 줄게. 우리 심술궂은 장난꾸러기야. 마를 때까지 엎드려 있어. 그렇지 않으면 옷이 달라붙어 더 아프단다."
그러나 가장 아픈 곳은 마음이었다. 상처 때문에 아프기도 했지만 이유없이 얻어맞은 것이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누나는 내 옆에 누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도이아도 봤겠지만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내가 맞을 짓을 했다면 상관 안해. 하지만 난 아무짓도 안했어."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 풍선이 망가져서 가장 슬퍼. 얼마나 예뻐지고 있었다고, 루이스에게 물어보면 알거야."
"나도 알 것 같아. 아주 예뻤을 거야. 하지만 걱정 마. 내일 진지냐 할머니 댁으로 가서 다시 종이를 사자, 세상에서 제일 멋진 풍선이 되도록 내가 도와줄게. 너무 아름다워서 별들도 질투하게 될거야."
"소용없어, 고도이아. 제일 첫 번 풍선만이 가장 아름다운 거야. 첫 풍선이 소용없게 되면 더 이상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어지는 거야."
"어느 날 .... 어느 날이건 .... 내가 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널 데리고 갈게. 거기서 함께 살자, 응?"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틀림없이 진지냐 할머니 댁을 생각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거기도 지옥같이 될 건 마찬가질 텐데 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내 환상의 세계에 누나가 직접 참가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난 널 톰 믹스나 벅 존스나 있는 목장에서 살도록 데리고 갈 테야."
"하지만 나는 후레드 톰프슨을 더 좋아해."
"아무튼 그런 곳에 데려갈게."
그리고, 우리는 서글픈 마음에 나지막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 후 이틀 동안 뽀르뚜가 아저씨가 무척 보고 싶었지만 난 갈 수가 없었다. 내가 학교에 가는 것조차도 내 몸은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아무도 그토록 잔인했던 매질에 증인이 되려고도 하지 않았다. 또한 아무도 그토록 잔인했던 매질에 증인이 되려고도 하지 않았다. 얼굴의 부기가 빠지고 상처가 낫게 되야 예전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동생과 밍기뉴 곁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얘기할 기분이 안 들었다. 모든 것이 두 려웠다. 아버지는 다시 누나에게 그런 욕지거리를 하면 없애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숨쉬기조차 두려웠다. 차라리 내 라임오렌지나무 그늘 속에 앉아 있는 것이 속 편했다. 거기서 나는 뽀르뚜가가 사준 딱지를 보며 루이스 왕에게 구슬치기를 가르쳐 주는 게 고작이었다. 동생은 아직 미숙했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완전히 숙달될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에 뽀르뚜가 아저씨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더 커져 갔다. 뽀르뚜가는 분명 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겠지. 그가 만약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안다면 분명히 날 찾아왔었을 거야. 묵직하면서도 상냥하게 '너'라고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세실리아 빠임 선생님 말씀이 상대편에게 '너'라고 할 때는 문법을 잘 알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의 갈색 얼굴, 깨끗하고 나무랄 데 없는 그의 옷, 방금 서랍에서 꺼낸 것처럼 빳빳한 샤쓰 칼라랑 체크 무늬의 조끼, 심지어 배의 닻 모양을 본뜬 그물 입힌 카우스 보턴까지 그리웠다.
'뭘, 곧 낫겠지.'결혼하면 병이 낫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어린애들의 상처는 그보다 더 빨리 낫는다는데 뭘.'
그날 밤 아버지는 외출하지 않으셨다. 집에서 자고 있는 루이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지금쯤 시내에서 돌아오고 계시겠지. 어머니는 영국인 방직공장에 저녁일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와는 겨우 일요일이나 얼굴을 마주할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 곁에 있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장난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흔들의자에 앉아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계셨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수염 투성이였고 그것을 깎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옷도 늘 깨끗하지 못하셨다. 돈이 없으셔서 트럼프 놀이도 못하시는 것 같았다. 불쌍한 아빠! 엄마가 집안을 돕기 위해 일하러 다니는 걸 아시고 얼마나 슬프셨을까. 게다가 랄라 누나도 공장에 들어가야 했으니. 일자리를 얻기도 힘드셨을거야. 게다가 '우린 좀 더 젊은 사람이 필요합니다'라는 대답을 들으시고 실망에 차 돌아오셨겠지. 나는 문지방에 앉아 벽으로 기어오르는 하얀 벌레를 헤아리며 가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크리스마스 날 내가 보았던 얼굴만큼이나 슬퍼 보였다.
내가 아빠를 위해 해 드릴 일이 없을까? 노래를 불러드리면 어떨까? 내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노랠 불러드리면 아빠의 근심이 조금은 사라질 거야. 나는 머리 속에 곡목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아리오발도 씨에게 배운 노래를 기억해냈다. 그것은 탱고로 내가 들었던 아름다운 노래들 중의 하나였다. 나는 낮게 시작했다.
나는 발가벗은 여자가 좋아.
발가벗은 여자가 좋아.
달 밝은 밤에
발가벗은 여자가 좋아.....
"제제!"
"네, 아빠."
나는 긴장하며 일어났다. 아버진 분명히 이 노래가 좋으신 거야. 날보고 가까이 와서 불러 보라고 하실 거야.
"무슨 노래를 하고 있는 게냐?"
나는 다시 불러드렸다.
나는 발가벗은 여자가 좋아.
"누가 그런 노랠 가르쳐 줬지?"
그의 눈은 불꽃이 튕겨나올 듯 핏발이 서 있었다.
"아리오발도 씨요."
"내가 그 따위 인간은 따라다니지 말라고 말했지?"
아빠는 결코 그런 말씀을 해 준 적이 없었다.
"어디 다시 불러 봐라."
"요새 유행하는 탱고예요."
나는 발가벗은 여자가 좋아.....
아버지는 내 뺨을 찰싹 때리셨다.
"어디 다시 불러봐."
나는 발가벗은 여자가 좋아......
내 얼굴은 거의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흐물흐물 해졌다. 뺨을 맞을 때마다 그 충격으로 나는 떴다 감았다 해야만 했다.
난 아버지의 말에 복종해야 하는 건지 그만 두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아픔 속에서도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이것이 내가 맞는 마지막 매가 되도록 맞고 죽어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아버지께서 매를 잠깐 멈추고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하셨지만 난 부르지 않았다. 그 대신 경멸에 가득찬 눈으로 소리쳤다.
"살인자! 날 단번에 죽이란 말이야. 감옥이 내 대신 복수하려고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아버지는 굉장히 화가 나셔서 흔들의자에 벌떡 일어나셨다. 그리고 허리띠를 풀으셨다. 그것은 두 개의 쇠고리가 달린 허리띠였다. 아버지는 정신없이 나를 때리 셨다. 개새끼, 쓰레기 같은 건달 녀석, 바보, 아버지에게 이런 욕들을 잔뜩 해 주고 싶었다.
허리띠가 내 몸 위에서 윙윙거렸다. 얼마나 세게 여기저기 때리는지 마치 몸 위에 천개의 손가락이 왔다갔다하는 것 같았다. 나는 벽 한 모퉁이에 움츠리며 쓰려졌다. 나는 아버지가 날 죽이려 하신다고 생각했다. 나는 겨우 나를 구하러 들어온 글로리아 누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글로리아 누나는 나와 닮은 유일한 러시아 고양이의 털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 글로리아 누나에겐 아무도 손을 못 대었다. 누나는 아버지의 손을 꽉 잡고 매를 중지시켰다.
"아빠! 아빠! 제발 절 때리시고 이 애는 더 이상 때리지 마세요."
아버지는 식탁 위에 허리띠를 던지셨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 올리셨다.
"내가 정신이 나갔지. 난 그 애가 날 놀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됐구나."
글로리아 누나가 나를 들어올렸을 때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내가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때는 열이 올라 온몸이 쿡쿡 쑤셨다. 어머니와 글로리아 누나가 내 머리맡에 앉아 다정하게 말을 붙였다. 방밖에선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지냐 할머니가 오신 것 같았다. 이런 모든 일들이 내겐 더욱 마음 아팠다. 후에 의사를 불렀다는 사실도 나는 알았다. 그래도 몸은 더 좋아지지 않았다.
글로리아 누나는 자신이 만든 수프를 갖고 와 내게 먹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먹으면 먹을수록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독히 졸음만 오고 잠이 깨면 조금 덜 아픈 것 같기도 했다. 글로리아 누나와 어머니는 계속 나를 돌봐 주었다. 어머니는 내 곁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일하러 가실 준비를 하느라 일어나셨다. 어머니가 작별인사를 하러 오셨을 때 나는 어머니의 목을 꼭 껴안았다.
"별일 없을 게다. 아가. 내일이면 나을 거야."
"엄마."
나는 일생에 가장 슬픈 일을 당한 듯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마, 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내 풍선처럼 됐어야만 했어요."
어머니는 쓸쓸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누구나 태어나는 것은 운명이란다. 너도 역시 마찬가지야. 단지 네가 가끔 장난이 좀 심하다는 것뿐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