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얼굴*11*
유리의향기
조회 1,782
댓글 0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왜, 하고 내가 눈으로 묻자, 그는 여전히 눈물을 글썽거린 채 입을 열었다.
\"제 아버님 생각이 나서 그럽니다.\"
\"아버님이라고?\"
일행 중의 누가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고,
\"예.\"
그가 대답했다. 어느덧 술자리도 슬슬 끝나는 것을 느끼며 방 안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주시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얼핏 눈살을 찌푸리더니 입을 얼었다.
\"제 아버님이 부르시던 노래였거든요. 한 해 농사를 죄다 소작료로 갖다 바치고 온 날이면 아버님은 노래를 부르셨어요. 평소에는 술을 안 하시는 분인데 그런 날은 술이 취해 우시면서 노래를 부르시는 거예요. 그렇게 마음을 달래신 거지요. 우리 땅이라곤 한 뼘도 없었거든요. 노래 가사나 분위기가 그때 듣던 것하고 똑같다 보니……\"
어눌한 말투와는 달리, 한번 말문이 트이자, 그의 입에서는 쉽게 그의 가족사가 풀려나왔다. 방 안의 사람들은 그리하여 한 사람의 공부를 위하여 고향을 떠난 일가족이 누구는 공사판의 막노동으로, 누구는 행상으로, 또 누구는 공장의 여공으로 나선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비로소 그가 왜 대학의 강사직을 그만두고 노동운동에 나서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뭘 그렇게 골몰히 생각하세요? 술 드시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가 나를 상념에서 깨워 주었다. 나는 일순 당황하기도 하여,
\"응, 갑자기 네가 부러운 생각이 들어서.\"
그로서는 엉뚱한 말을 했다.
\"또 나를 놀리려구요?\"
그는 가볍게 경계하는 표정을 만들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가 부러웠다. 내가 아직도 위악을 세상에 대한 무기로 삼아 자신은 물론 남마저 피투성이로 만든 나이에, 그는 이미 노동운동을 무기로 삼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싸움에 몸을 던졌던 셈이다.
\"아니, 나는 정말로 네가 부러운 걸. 그깐 이유는 따지지 말고, 자. 술이나 비우자.\"
그와 나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내가 말을 이었다.
\"자신을 괴롭힌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지?\"
\"그렇겠지요.\"
\"자신을 괴롭히다 보면 무엇보다도 그만큼 남을 괴롭히니까.\"
탁자 너머로 건너다보았더니 그는 무언가 애매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표정에 쐐기를 박았다.
\"흐응, 너도 남을 많이 괴롭힌 모양이구나.\"
그의 애매하던 표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힘들 때가…… 많았어요.\"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와 나는 다시 한번 단숨에 술잔을 비워 냈다. 내가 말머리를 돌렸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나의 말에, 그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지금 너 있는 곳 말야. 네가 가끔씩 위태해 보였거든. 저러다 무너지는 건 아닌가 하고.\"
그는 아직도 나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한 듯 의아한 시선이었고,
\"좋은 뜻도 지나치면 위선이…… 아닐까?\"
나는 마지막 말까지 했다. 지난 여름에 나는 우연히 그가 일하고 있는 곳에 들른 적이 있었다. 아마 여름 들어 가장 무덥지 않나 싶은 날이었는데, 서너 평 되는 공간에 책상 세 개와 손님용 의자 몇 개와 함께 그가 끼여 있었다. 낡은 건물의 사층인가 오층인가 되는 층수였으므로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 가쁜 숨을 쉬는 나에게 그가 부채를 내밀었다.
\"아니, 이놈의 사무실에는 그흔한 선풍기 하나 없단 말이냐?\"
\"미안해요.\"
그러고 보니 허우적거리며 계단을 올라온 나뿐이 아닌 그도 역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한 면만이 밖에 면한 채 창이 나 있고 나머지 세 면은 낡은 베니어판으로 막아 다른 사무실 구별해 놓은 곳에 바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에라, 이 징헌 놈아.\"
나는 부채를 들어 그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런 나에게 불쑥 한가지 의문이 솟아왔다.
'이 친구는 지금 무엇을 견뎌 내는 것일까?'
그가 일하는 사무실은 재야권의 문화운동 단체로, 그는 거기에서 대중 교육의 실무를 맡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월급 따위는 있을 리가 없을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관여하던 노동운동 조직이 반국가 단채로 몰려 와해되는 과정에서, 조직원의 누군가는 잡혀가고 누군가는 기약없는 도피생활로 접어들면서, 너나없이 어려운 좌절의 시기가 닥쳐왔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 그는 도피생활을 끝내고 세상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무엇인가를 시작했다. 나는 그가 새롭게 시작한 것이 무엇인지는 구태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다.
\"선배님은 제가 하는 일이…… 위선으로 보입니까?\"
그가 얼마쯤 심각한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향해 비스듬히 웃어 보였다.
\"왜, 질리는 데라도 있니?\"
\"그런 점도 없지 않지요.\"
\"이 바보야, 내 얘긴 말야, 너 스스로를 아낄 줄도 알란 얘기였어.\"
그와 나는 또다시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그가 울고 있는 것을 알았다. 전혀 우는 기척도 없이 얼굴에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그런 얼굴로 그가 말했다.
\"아버님이 불쌍했어요. 차라리 미워하고 싶어도 도무지 미워할 수조차 없을 만큼요. 자신을 아끼고 말고 할 여유조차 나에겐 없어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빠른 속도로 뇌리에 살아오는 한 사내의 얼굴을 발견했다. 가늘고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 그런 눈매로 아이를 내려다보며 비웃는 듯 혹은 딱해하는 듯 얄궂게 웃고 있는 사내. 그렇듯 술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조바심으로 목이 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는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조차 없어서 괴로워할 때 또 누군가는 한 얼굴을 지우기 위하여 자신의 얼굴에 면도날까지 댔다.
\"옛날 얘기 하나 할까?\"
\"예.\"
\"옛날에 한 바람둥이가 있었지. 그런데 이 바람둥이는 연애를 할 때마다 우선 상대가 된 여자에게 치욕적인 상처를 주는 거야. 그래서 여자가 피투성이가 되면 그때야 비로소 이 바람둥이는 여자를 사랑하는 거지. 왜 그랬을까?\"
\"글쎄요.\"
\"이 바람둥이는 여자보다는 바로 자신이 만든 처를 사랑했던 것이지. 그런데 이 바람둥이가 아직 어려서 여자를 몰랐을 무렵에는 어떤 식이였을까?\"
\"……\"
\"사진에 있는 자신의 얼굴에 면도날로 상처를 입히는 식이었어.\"
\"어렸을 때 무슨 정신적인 상처를 입었던 모양이군요?\"
\"아니, 흔한 사생아였을 뿐이야.\"
아마 그와, 나는 둘 다 취한 표정이 아니었을 터였다.
\"이 바람둥이의 요즈음 희망이 뭔지 아니?\"
\"그러구도 아직 희망이 남았어요?\"
\"그럼 남구말구. 뭐냐면 말이야, 글쎄. 뻔뻔하게도 또다시 연애를 하는 것이래지 뭐녀? 뭐, 인제야말로 연애가 뭔지 알겠다나 어쨌다나 하면서.\"
\"그만하면 존경할 만하군요.\"
\"존경은 필요없구, 냅둬라. 그길로 가다가 뒈져 버리게.\"
나의 말에 잠시 아연한 표정을 짓던 그가 배시시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저도 옛날 얘기 하나 할까요?\"
\"너도?\"
\"예.\"
\"해 봐.\"
\"옛날에 사회주의자가 한 명 있었는데요.\"
\"그래서?\"
\"아직도 사회주의를 안 버렸대요.\"
그는 이제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웃고 있지 않은 얼굴을 향해 말했다.
\"당연하지. 그 캄캄한 나이에 그거라도 없으면 어떻게 살아남겠니?\"
그와 나 둘이만 남아, 하품을 참지 못하는 술집 주인이 기어코 사정을 할 무렵에야 둘은 술집을 나왔다. 열두 가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기이하게도 밖으로 나오자 비로소 술이 취하는 느낌이었다. 그와 나는 텅빈 거리에서 어깨동무를 했다. 포장마차의 불빛이 꿈결에서처럼 아득하게 다가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나는 좀더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참, 내가 너한테 고백할 게 있었지?\"
\"아니, 그러면 정말이었어요?\"
그가 나에게 되물었고,
\"정말이잖구.\"
나는 멈추어섰다. 그리고 가로등의 불빛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그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도 가로등의 불빛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뭐냐면 말야, 네 얼굴이야말로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것!\"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가 곧바로 뛰어와 나를 막아섰다.
\"저도 선배님한테 고백할 게 있어요.\"
\"뭔데?\"
\"아름다움이야 원래 선배님 전공이라는 것!\"
그는 내 흉내를 내어 나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고 낮은 목소리를 냈다.
\"뭐야, 서로 덕담 주고받긴 줄 아냐?\"
나는 벌컥 화를 내었다. 그러나 자신도 억제하지 못할 한 가닥 기쁜 마음이 벌써부터 가슴 언저리께를 간지럽히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끝내 엉뚱한 말을 하고 말았다.
\"만약에 나한테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게 있다면. 그건 내게 아니야. 그건 내가 상처입힌 모든 이들 것이지.\"
거기에는 저 작고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도 포함될까. 하고 문득 나는 자문했다. 그리고 별로 오래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사내야말로 나에게 가장 크게 상처를 입었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