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얼굴*5*
유리의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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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어쩌다 자신의 의부에게 매라도 맞으면 길길이 날뛰며 \"지에미 씹할 놈이 진짜 아부지도 아님서 왜 때려?\"하고 고래고래 욕질을 해대는 풍경은 흔히 볼 수 있었다. 나라도 의부에게 매를 맞았다면 틀림없이 다른 아이들처럼 길길이 날뛰며 욕질을 해댔을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의부에게 욕질을 해댄 기억은 없다. 아마도 의부가 나를 때린 일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나와는 열 한 살 차이가 나는 누이를 낳은 첫 결혼에 실패한 후,어머니가 누이를 데리고 장터로 흘러온 것은 해방 무렵이었다. 손재주가 있어 일찍이 재봉 기술을 익힌 어머니는 어렵사리 재봉틀을 마련하여 장터에다가 조그맣게 양복점을 차린 것이었다. 물론 양복점이라지만 번듯한 새옷을 만드는 것보다는 수선이나 짜집기 따위가 전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를 인근에서 호가 난 노름꾼이자 건달패인 나의 생부가 무심하게 보아 널길 리가 없었다.
내가 태어난 고장은 일제시대에 이미 간척사업이 벌어져 드넓은 간척지를 끼고 있어서 타고장보다는 비교적 물산이 풍부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노리고 꾀어드는 패들이 만만치 않아 일찍부터 노름이 성행하고 작부를 둔 술집들이 흥청하였다. 생부는 그렇게 꾀어든 패들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훗날 내가 생부와 맺어지게 된 것을 궁금해하자, '나가 머에 눈이 씌었든갑서야, 글 않고서야 어찌께 그런 인사를 만났겄냐. 아매도 니가 생길라고 그랬든 모냥이여' 환갑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붉히면서 변명하듯 대답했다. 그러나 장터란 곳이 원래부터 젊은 여자가 혼자 살아 내기에는 힘든 곳이 아니었으랴. 더군다나 노리는 상대가 그런 일에 호가 난 건달패였음에랴.
어머니와 맺어지자 생부는 당연하게 기둥서방 노릇을 하였다. 거기다가 생부는 그 무렵 아편에도 손을 대어, 어머니에게서 노름 밑천과 아편 밑돈을 함께 강탈하였다. 하루하루 벌어서 끼니 때우기도 어려운 시절에 생부에게 노름 밑천과 아편 밑돈을 대는 일은 아무리 억척같은 어머니로서도 무리였을 것이다. 급기야 생부가 어머니의 유일한 생계 수단인 재봉틀마저 훔쳐다가 아편으로 없애 버리자 어머니는 이를 악물고 생부에게서 등을 돌렸다. 때마침 생부가 아편 밀매와 마약 중독으로 감옥에 가자 어머니는 주저하지 않고 의부를 택했다. 하루아침에 생계 수단을 잃어버린 어머니로서는 무엇보다도 어린 두 자식의 굶주림을 보아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의부는 인근의 중상(重商)으로 주로 서울이나 강원도 등지의 웃녘 장사를 하는 해산물 도매업자였다. 의부와 함께 산 후로 우리 식두들의 굶주림에 대한 공포감은 어느 정도 사라졌지만, 대신에 어린 나이로는 차마 견뎌 내기 힘든 외로움이 누나와 나를 울리곤 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이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어머니가 한번 의부의 장사길에 따라나서면 한두 달은 예사이고, 심지어는 서너 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의부의 웃녘장사는 전라도에서 쌀이나 보리 따위 곡식을 사가지고 배를 이용하여 속초나 묵호 등지의 강원도로 가서 오징어나 명태 등을 되사오는 일종의 물물교환이었는데, 주로 겨울 동안에 행보가 이루어져서, 누나와 나는 겨울 내내 휑뎅그레 큰 집을 지키곤 하였다. 어쩌다가 돌아온다는 기약의 날이 지나도록 어머니와 의부가 돌아오지 않거나 혹은 바람이라도 거세게 부는 날이면 누나는 아예 목을 놓아 울었고, 누나 옆에서 나 또한 낑낑대며 따라 울기 마련이었다. 의부와 함께 살게 된 후로 어머니가 집에 있는 기간은 고작해야 일년에 너댓 달 정도였다. 어머니는 웃녘장사를 떠나지 않을 때는 고작해야 오일장을 돌며 해산물을 팔았는데, 나는 그런 어머니를 따라다니려고 막무가내 때를 쓰곤 했다.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식구의 의부와의 새로운 생활은 예전보다 결코 행복한 편은 못 되었다. 어쩌다 장사에 손해를 보거나 셈이 틀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으레 어머니와 의부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곤 했는데, 두 사람의 싸움이라는 것이 부부 사이에 설마 그럴 수 있으랴 싶게 아예 사생결단이었다. 아무리 장터 같은 밑바닥 사람들의 감정이 거칠다고는 해도 이 부부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둘의 싸움은 치열하다 못해 결국 어머니가 피투성이가 되어 벌렁 나자빠져야 끝이 났는데, 누구도 감히 이 싸움을 말리지 못했다.
어머니와 의부가 그토록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데는 정작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몰랐다. 의부는 본처에게서 자식을 생산하지 못했는데 어머니와의 사이에서도 전혀 자식이 생산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의부로서는 누나와 내가 어쩔 수 없이 눈엣가시처럼 아픈 존재였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누나보다는 사내아이인 내가 매번 싸움의 원인이 되는 것이 분명했는데, 의부에게서 그런 낌새가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어머니는 싸움에서 터럭만큼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싸움은 다짜고짜 의부가 한 손으로 어머니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한 손
으로 어머니를 후려패는것이 순서인데, 그러면 매번 어머니보다 누나가먼
저 눈을 뒤집은 채 속절없이 나자빠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