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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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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얼굴*4*

유리의향기 조회 1,74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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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돌뱅이에게 있어서, 닷새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장날이란, 어른 아이 막론하고 축제일 수밖에 없었다. 장날이 돌아오는 나흘 내내 기껏해 야 휴지 나부랭이나 회오리바람에 날리곤 하던 쓸쓸한 빈터와 기둥만 앙상하던 빈 가게들이, 장날이 되면 하루아침에 갑자기 사람들이 들끓는 싸전이며 어물전, 포목전, 유기전, 옹기전, 잡화전 등으로 변하고, 노점 음식점들마다 돼지머리와 순대가 산더미처럼 쌓이거나 가마솥이 넘치도록 팥죽이 끓어 대는 요술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런 축제 분위기 속에서 장터의 사람들은,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목이 쉬도록 시골 사람들을 불러 하루 벌어 닷새를 먹고 살 돈을 마련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장터의 이곳 저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물건을 훔치거나 아니면 혹시 길에 떨어진 동전 한 닢이라도 줍기 위해 해종일 악머구리 끓듯 해댔다. 시골 사람들은 그런 장터 사람들을 비하하여 어른이나 아이들 할 것 없이 한데 싸잡아 장돌뱅이라고 불렀고, 장터 사람들은 장터 사람들대로 시골 사람들을 얕보아 촌놈들이라고 불렀다.

우리 식구는 모두 장돌뱅이였던 셈이다. 어머니는 어물전의 한 귀퉁이에서 길바닥에 거적대기를 깔고 그 위에 역시 거적대기만한 차일을 친 채, 김이며 미역, 멸치, 마른 새우 등의 해산물을 팔았다. 내가 갓난아이였을 때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해종일 어머니와 함께 장날을 보냈지만, 조금 커서 너댓 살이 되었을 때만 해도 이미 어머니의 등을 벗어나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장돌뱅이가 되어 장터를 헤집고 다녔다.

어린 장돌뱅이의 벌이는 그다지 신통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싸전 근방을 기웃거리며 기회를 엿보다가 어른들의 다리 틈으로 쌀을 한 주먹씩 훔쳐 내어 주머니를 가득 채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되밀이꾼에게 들켜서 되밀이로 얻어맞거나, \"아 문댕이 xx, 손모가지를 콱 짤라불기전에 쌀 못 놔?\" \"아이고, 저건 어떤 장똘뱅이년 구녕에서 나온 xx여?\" 하는 시골 아낙네들의 막된 욕지거리야 다반사였고, 조금도 개의할 바가 아니었다. 어린 장돌뱅이들은 저만큼 도망치면서 \"히힛, 니에미 씹이다아\"하고 대거리를 해대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렇게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쌀을 훔친 다음이면, 이번에는 약장수가 굿을 벌이고 있는 곳으로 가서 맨 앞줄에 않아 입술이 허옇도록 야금야금 고소한 쌀맛을 즐기면서 약장수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간혹 길에서 큰돈이라도 줍는 날이면 어린 장돌뱅이들에게는 바로 그 날이 명절이었다. 오다마나 구루메루 같은 주전부리는 물론 잘하면 팥죽이나 순대, 돼지머리도 실컷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렇듯 큰돈을 주우면 대개는 낌새를 알아챈 열서너 살쯤의 좀더 큰 장돌뱅이들에게 빼앗기게 마련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시의 시골 장터는 너나없이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밑바닥 사람들이 몰려든 곳이었다. 서른에서 마흔을 전후한 나이의 장터 아낙네들은 흔히 남편이 없거나, 남편이 있더라도 전혀 생활에 무능력한 병자이기가 십상이었다. 그런 장터 아낙네들은 바로 자신의 몸뚱이와 손님을 소리쳐 부르는 입만이 전 재산이었고, 그 전 재산에 병든 남편과 어린 자식들의 목숨이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번번이 장터로 흘러들어와 장돌뱅이가 되는 아낙네들은 대개가 사연이 비슷하였다. 한 아낙네가 전쟁에 남편을 잃었으면, 다른 아낙네는 멀쩡한 농사꾼이던 남편이 갑자기 폐병이 들어 병수발에 가산을 탕진해 버렸다는 식이었다. 아낙네들은 장터로 흘러들기가 무섭게 바로 고리장수의 체곗돈을 빚내어 가까운 항구에서 갈치며 고등어 따위 생선을 떼다가 장바닥에 좌판을 벌였다. 그렇게 장돌뱅이가 된 아낙네들은, 반 년이나 일 년쯤 버티다가 끝내 병든 남편이 죽으면 어쩔 수 없이 어린 자식들이올망졸망 딸린 과부가 되고, 과부가 된얼마 후에는 쉽게 개가해 갔다.

장돌뱅이 같은 밑바닥의 사람들은 굶주림에 대해서 거의 동물적인 공포를 갖기 마련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생존이란 바로 굶주림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에 다름 아니었지만 때로는 그러한 생존마저도 지켜 내지 못하곤 했다. 어쩌다 장마가 계속되거나 극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아예 장이 서지 않는 시절에는 더 이상 장터에서도 견뎌 내지 못한 채 대처로 떠나거나 거렁뱅이로 나서는 집이 나왔다. 그런 장돌뱅이들에게는 인근 농촌의 엄격한 도덕이나 관습은 자신의 생존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로 여겨졌을지도 몰랐다. 비록 선망의 대상은 될지언정 지금 당장 굶주리고 있는 어린 자식들을 먹여살리지 못하는 한, 어떠한 도덕이나 관습도 자신의 삶을 속박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대부분의 장돌뱅이 아낙네들과 대저 큰 차이는 없었다. 어린 시절에 나는 내 의부를 일컬어 전혀 스스럼없이 '사촌 아부지'라고 부르고는 했다. 의부가 생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대신에 어린 내가 궁리해 낸 일종의 타협안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부를 때마다 의부는 비록 쓴웃음을 지을망정 별로 탓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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