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축사회
나의 혐의는 본국을 수치스러워함이라. 인텔리 세태를 업신여기는 내 주제가 우스울 게요
나는 21세기 언어로 갤러리 족이다. 노쇠하신 부모님 집에 얹혀산다. 천운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긴 하지만 치명적으로 나는 현세에 부적합하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어떤 피자 드릴까요?”
판매하러 매장 앞에 나오면 나는 독보적인 견자가 된다. 저이는 쇼핑 카트 뿐 아니라 출생에서 임종까지 똑같다.
“이거 먹을래? 저거 먹을래?”
본능 밖에 없는 아이가 뭘 안다고 묻는 걸까? 인간과 금수의 확증된 차이점은 제어 능력의 유무다. 자아조차 제어 못하는 이는 금수나 다를 바 없다. 아이인 경우에는 인간보다는 금수에 가까운 시기이다. 아이는 발육과 동시에 매 순간마다 선택에 따라 진정한 인간이 되기도 하고 진정한 금수가 되기도 한다.
저이가 보는 그대로 나의 장래는 불안전하고 불확실하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을 오늘도 꾸역꾸역 영위한다.
저이는 돈을 신봉한다. 돈만 주면 영혼까지 팔 기세다. 그것도 그럴 것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돈이 있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저이에게 인간답게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답게 한평생 살 수 있긴 한 걸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신분이자 인격이다. 월급이 백만 원 안팎인 나의 신분은 농노이고 미천한 인격을 지녔다. 저이가 시키면 즉각 해야 한다. 반항하는 즉시 생계는 위협 받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적 운영 방식은 굽실대면 자유고 직간하면 방관이다. ‘불법만 아니면 네 멋대로 해라.’ ‘죽든지 말든지 그딴 건 부덕한 네 사정일 뿐이다.’
학년이 오를수록 방목되는 가축 중엔 제 길을 정진하는 이가 있는 반면 갈팡질팡 이별하는 이가 있다. 차마 이별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갈망하다 날지도 정착하지도 못한다. 저이의 대부분은 정착을 선택하지만 나는 날고 싶어도 날개가 없다.
‘부익부 빈익빈’은 자본주의 사회의 두드러진 상징이다. 궁핍한 이는 곡간을 채우려고 돈을 벌고 유복한 이는 욕망을 채우려고 돈을 번다. 육신은 채울수록 공허하다는 것을 저이가 모를 리는 없고, 오로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가 최대의 난제다.
여덟 시간 근무, 한 시간 식사 및 휴식. 대형마트 내에 내게 허용된 장소는 베이커리와 직원 식당뿐이다. 나는 한 시에 출근해서 줄곧 베이커리에 갇혀 있다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나는 베이커리에서 대화를 금한다. 아니, 할 수 없다. 내게 주어진 시간 안에 내 몫을 하려면 대화를 할 틈이 없다. 나는 쉴 새 없이 일하는 값싼 기계일 뿐이다.
베이커리에서는 마지못해 침묵하지만 밖에서는 나랑 대화할 이가 없다. 나의 날카로운 침묵에 베이지나 않을까 다들 슬금슬금 시선을 피한다. 처음엔 창피하고 소외감이 들었지만 근래엔 이인이 된 듯 희열이 스며든다.
“품질관리 팀이 온다니까 정량대로 토핑 해.”
새로 부임한 점장이 시켜서 하긴 하는데 탐탁지 않다. 판매율이 낮다며 재료를 줄이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는 정량대로 하라니. 이딴 짓이 건국 이래 줄곧 계승되어 온 우리의 미래다.
본국은 밖으로는 정의구현을 내걸고 안으로는 정당화를 조작한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정의로운 사회는 수박 겉핥기식 우민화 교육일 뿐이다.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라면 본인만 살겠다고 타인을 짓밟지는 않았겠지.
정해진 쉬는 날은 없다. 그때그때 되는대로 하루나 이틀 쉰다. 나는 쉬는 날이면 조항 너머로 칩거를 만끽한다. 내가 봐 온 저이의 삶은 타인을 의식한다. 내가 누구이고 왜 사는지 따윈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오직 타인에게 어떡하면 더 우아하고 고상하게 비칠까 뿐이다.
창에 커튼을 쳐서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다. 자고 깨면 내일이고 자고 깨면 모레다. 자고 다시 자도 숙취에서 깨이지 않는다. 만사가 혼곤하다. 현실인지 환각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넌 여자 없냐?”
아버지의 묵혀둔 질문이 고작 결혼 재촉이라니 실망이다. 핏줄을 잇는 것만이 불초를 면하는 정석이라면 나는 낙제생으로 낙인이 찍혀 추방되어도 괘의치 않는다.
나는 일찌감치 결혼 따윈 포기했다. 나의 돈벌이로는 가정을 꾸려나갈 수 없다. 결혼 평균 비용이 오천만 원 이상이라는데, 내겐 하루의 기쁨을 지불할 돈이 없다. 대출을 받으면 어느 정도 가능할 것도 같은데, 내게 담보란 만성체증을 앓는 육신뿐이라서 선뜻 빌려 줄 이가 없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결혼의 전부다. 결혼이 합법적인 성교만을 위한 의식은 아니라지만,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결혼조차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내가 결혼을 포기한 건 오로지 내가 부덕한 탓인가? 차라리 금수로 태어났다면 잔인한 본능 따윈 애당초 없었으리라. 이유야 어찌됐든 적어도 내겐 현명한 선택이다.
여전히, 드문드문, 나는 자위를 모방한다. 어릴 땐 그저 육신의 쾌락에 홀려 쫓았지만 커서는 목적을 갖고 분출을 단행한다. 호흡이 멎지 않는 한 체내의 오물을 완멸할 순 없지만 육신의 악화를 방지할 수 있었던 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제때에 분출했기 때문이다.
예전엔 여성의 속살이 궁금하더니만 근래엔 여성의 속내가 궁금하다. 여성의 인생 최종 목표는 뭘까? 설마 자녀를 낳고 발육을 거드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지상의 여성은 예나 지금이나 작부다. 예전엔 남아선호사상이 작부로 전락시켰다면 근래엔 여성 스스로가 작부를 자청한다. 단지 각자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한쪽에선 남녀평등을 외치면서 또 한쪽에선 부르주아를 유혹한다. 스스로가 개척하려 하지 않고 양지를 소유한 지주에 기대어 덩달아 신분 상승을 꾀한다.
성욕은 인간에게만 있는 거다. 금수는 번식기 때만 교미를 하지만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성교를 한다. 성범죄는 인류가 생존하는 한 끊이지 않는 원죄이고 이제부터라도 미혼모 수습이 시급하다. 인간은 생김새가 인간이어서가 아니고 교육을 통해서만 인간이 된다. 교육을 못 받아서 미혼모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무엇보다 교육을 중시하는 본국에서 미혼모가 끊이지 않는 건 자각을 못 하거나 자각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성범죄에 의한 임신은 인력으로 막을 수 없지만 연인과의 혼전임신은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궤변은 참으로 유용한 핑계거리다. 모든 질타를 연민으로 변질시키는 묘약이다.
인간사회에 진정한 사랑이 존재하긴 한 걸까? 연인이 이성을 탐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부모가 자녀를 기르고, 성장한 자녀가 늙은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내 눈엔 보편화된 진정한 사랑이 거래 관계로 보인다. 모호한 절차에 맞춰 주고받는 협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아는 진정한 사랑은 베푸는 것이다. 이익을 따지지 않고 끊임없이 베푸는 것이다. 대가를 요구하는 순간, 진정한 사랑은 안개처럼 바래져간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인간사회에 이녹 아든처럼 숭고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교육의 시종은 자각이다. 값비싼 교육도 습득하지 않으면 쓰레기일 뿐이다. 부르주아의 일 순위 과시는 자녀를 유학 보내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국내에서 웬만한 학벌을 취득해봤자 애당초 지주의 혈연이 아니라면 출발선이 농노와 별반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비상의 첫 발은 예나 지금이나 영어다. 갓 젖 뗀 아이에게 영재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영어를 꾸역꾸역 세뇌시킨다. 영어만 유창해 질 수 있다면 아이의 아픔 따윈 상관없다. 모든 결정은 부모의 권한이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영어권 국가로 귀화하지 그래?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육신이 멀쩡한데 꼭 받아야 하나? 지시를 거역하면 벌금이 부과된다고 해서 오긴 왔지만, 귀찮은 게 한두 개가 아니다. 건물 전체가 검사실이고 방문자도 수두룩하다. 대부분 방문자는 나처럼 소속된 회사의 지원으로 한도까지는 무료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속된 회사가 없는 실업자가 건강검진을 받으려면 유료라는 것이다. 실업자면 세 끼 요기도 빠듯할 텐데 건강검진을 챙길 여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게 상식이다. 본국에선 밥벌이 못하는 국민의 생사 따윈 가십거리도 안 될 만큼 흥미 없는 일인 모양이다.
‘판매자의 인상과 태도가 불친절합니다.’
오프라인이건 온라인이건 잦은 고객 항의는 해고로 이어진다. 나 같이 판매로 생존하는 이에게는 고객이란 은인도 될 수 있고 살인자도 될 수 있다. 상인의 물품을 구매하는 고객은 은인이지만 상인의 밥줄을 자르는 고객은 살인자나 다를 바 없다. 성희롱처럼 보고 듣는 이의 감정 기복에 따라 처벌과 안녕이 결정되는 것이다.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보고 듣는 이가 불쾌하다면 나는 즉각 처벌 대상이 된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몇 차례 가위질에도 나의 밥줄은 아직 무사하다.
살랑살랑 벚꽃이 밟히는 눈부신 출근길에 나는 보았다. 등이 구부정하고 남루한 노파가 상점 앞에 다 먹고 내놓은 그릇에서 잔반을 끌어 모아 자신이 가져온 빈 통에 담는다. 나 말고도 많은 이가 있음에도 노파는 전혀 괘의치 않는다. 광경을 본 이들도 전혀 괘의치 않는다. 나라도 괜찮다면 손을 내밀고 싶지만 아직 가족이 있어 내 뜻대로 그것도 아니 되고 언제면 언행일치가 현실화 될까?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사회 원칙은 숲 단속이기 때문에 나무는 보여도 풀은 보지 못한다? 설마 고매하신 고위직 분들이 거짓을 선포하겠어? 정사가 너무 바빠 미처 돌보지 못한 거겠지.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4월 말까지 일하고 퇴사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사유는 예상대로 잦은 고객 항의와 매출 감소이다. 귀가는 쉽지만 못내 아쉽다. 건강보험증에 퇴직하신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가 내 이름 아래로 기재되어 있었는데, 나에겐 건강보험 따윈 있으나 없으나 무방하지만, 퇴사하면 부모님의 성함을 어디로 옮겨 기재해야 하는지 마음 한 켠이 무겁다. 저이가 육신의 안위를 중시한다면 나는 정신세계의 안위를 중시한다. 내가 만약 육신의 안위를 중시했다면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퇴사를 모면했을 것이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한다 해도 취업 전까지는 실업자니까 개인 건강보험증이 집으로 발송되어 올 것이다. 건강보험제도의 목적과 혜택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본인의 가입 의사와는 상관없이 의무화로 운영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저소득 계층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준다는 취지에는 손색이 없지만 저소득 계층이라도 각자의 사상은 다를 것이다. 나에게 육신의 보험은 굶지 않고 매끼를 먹이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병에 걸리고 죽는 건 당연한 순리이다. 본국은 인생의 순리마저 거역하겠다는 건가? 고령화, 저출산, 고독사. 본국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고 자부할 수 있는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와 무엇이 다른가? 돈만을 쫓는 세태는 매한가지 아닌가?
저이는 무엇을 위하여 경쟁을 하는가? 아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 경쟁을 하는가? 추악한 인간이 되기 위해 경쟁을 하는가? 본국은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민생을 돌보지 않는 나라에는 진정한 자유도 평등도 없다. 서로 자기 밥그릇을 채우기 위해 경쟁을 한다. 승자가 발발하면 패자도 발발하는 법.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이란 노동의 자발적인 동기부여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있다. 그 선택으로 공산주의는 쇠퇴하고 자본주의는 승승장구하고 있다. 경쟁을 통하여 책무의 높낮이를 결정하는 건 타당하나 경쟁을 통하여 인권의 높낮이를 결정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인권이란 무엇인가? 언제부터 돈이 인권이 되었나? 지주가 지은 죄는 수축되고 농노가 지은 죄는 팽창되는 현상이 인권인가?
오늘 행복하지 않은 이가 내일은 행복할까? 4월이 끝나고 나의 칩거는 탈모를 재발시킨다. 의미 없는 시간이 흐를수록 거울 밖의 나는 흉측해져 간다. 재취업을 시도해도 자격이 안 돼 번번이 탈락한다. 이 나이 먹도록 운전조차 제대로 못하는 내가 애처롭다. 별수 없이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수급하러 센터로 갔다. 그런데 왜 이리 절차가 복잡하지? 실업급여 수급이 까다롭다는 건 사회제도의 오류가 아닐까? 농노인 주제에 수급을 포기한 자가 나 말고 또 있을까? 실업급여 수급에 관해 부모님에겐 뭐라고 둘러대지? 밥벌이는 스트레스가 되어 결국엔 나를 괴물로 변모시킨다. 내가 아니라고 부인해봤자 거울 밖의 나는 식충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늙으면 죽어야지.”
정년퇴직하신 아버지가 티브이에 홀려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나무란다. 돈을 벌어 가정을 꾸려나갈 나이에 후사는커녕 제 밥벌이도 못하는 판이니 백번 죽어도 싸다. 나도 내가 답답한데, 아버지야 오죽하겠는가.
내 꼴이 못마땅한 아버지가 채널을 돌린다.
“간밤에 일어난 사건 사고 소식입니다. 삼십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달리던 기차에 투신하였습니다. 사체 훼손 정도가 심각해 정확한 신원을 파악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는 데로 신속히 전해 드리겠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어느덧 5개월이 지났지만, 여야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두고 여전히 대립하고 있습니다.”
종일 티브이를 보다보면 현세가 파악되고 지주들의 이견 투쟁에 의문이 쌓일 때가 종종 있다. 앞면에선 하의실종을 운운하면서 눈요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뒷면에선 요기할 끼니가 없어 뱃속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민생의 양극화는 지극히 온당한 현상이다. 본인의 성과로 축적된 사유재산을 누구라도 빼앗을 권리는 없다. 다만, 본국에 소속된 국민은 국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최소한의 생존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본국이 그것마저 외면한다면 본국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그새 위가 쪼그라들어 세 끼도 거북하다. 세 끼를 꾸역꾸역 쑤셔 넣어봤자 만성체증만 악화시킬 뿐이다. 만성체증 환자에게 1일 1식을 권장하는 바이다. 하루 한 끼에도 게을리 하지 않는 건 이불 안으로 손을 넣어 호스를 스트레칭 시키는 일이다. 이토록 혐오스러운 내가 본국에 어울리긴 한 걸까?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는 자본주의 원칙을 준수해 나는 소멸하리라.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행복하기 위해 번다고? 나는 행복하기 위해 분신을 감행한다.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지금보다는 낫겠지.
출렁이는 기름통을 두 팔로 낑낑 들고 버스에 올랐다. 승객들은 저마다 스마트폰 들여다보기에만 정신이 팔려 나 따위 이민족은 눈여겨 볼 여력이 없어 보인다. 저이는 제 갈 길이 바빠 연꽃의 만찬에 응할 리 없다. 꽃이 아름다운 건 절기에 맞게 피고 지기 때문이다. 꽃이 피고 지지 않아 지상이 온통 꽃밭이라면 그때는 향기로울까? 나는 지상의 꽃밭에 동화될 수 없는 나그네다. 불순한 향기로 어우러지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나는 시절을 아느니 자율로 지련다.
낑낑 들고 대형마트 출입문 앞으로 다다르니 밤은 짙어져 가고 안개는 자욱하고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은 쉴 새 없이 연이어 경적을 울린다. 그새를 틈타 콸콸 내 몸에 기름을 들이붓는다. 먼저 기름을 머금은 태극기를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금세 활활 재가 되어 버린다.
이제는 나도 재가 되어야지. 숱한 지난날들이 주르륵주르륵 새어 흐른다. 기름이 희석되기 전에 귀본해야지. 물컹한 걸음으로 대형마트에 들어선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느 누구도 나를 주시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평화로운 본국에서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건 재가 되는 것뿐이다. 라이터를 켜 재킷에 불을 붙이자 직원이고 고객이고 홍해처럼 갈라져 연거푸 비명을 질러대며 일제히 대피한다. 이처럼 나는 한 발도 내딛지 못하고 고꾸라져 연소될 운명이었나 보다. 뜨겁다. 따갑다. 아프다.
“툭!”
뜨겁다. 따갑다. 아프다. 눈이 번쩍 뜨인다.
“환자분, 정신이 좀 드세요?”
흰 가운을 걸친 여성이 내게 묻는다.
“제 목소리 들리세요?”
내가 살아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막 깨어난 내게 체포영장을 내미는 본국이 우습다. 나의 분신자살 시도로 판매율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명분하에 대형마트 측이 업무방해로 나를 고소했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몸 곳곳에 만발한 화상이 아물 때까지 입원해 있으라는 법령이 내려졌다. 단, 도주를 우려하여 24시간 밀착 감시로 순경을 붙인다.
병실과 화장실을 들락이며 엿듣기로는 불길에 휩싸인 내가 쓰러진 직후 천장에 붙은 스프링클러가 작동했다고 한다. 패륜을 종영하기 위해 한 짓이 도리어 팽창을 부추긴다.
“이렇게 된 마당에 부모님에게는 알리지 말아 주십시오.”
듣는 둥 마는 둥, 나의 심리 갈증을 전혀 이해할 뜻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형사가 병실을 빠져나간다. 형사를 쫓아 나가려하니 순경이 막고 선다. 나는 단념한 듯 뒤돌아서서 잽싸게 손에 잡히는 대로 바닥에 내팽개친다. 순경이 놀래 나의 만행을 저지한다. 예상대로 형사가 다시 병실로 들어온다.
“무슨 일이야?”
형사와 순경이 대화하는 사이, 나는 슬쩍 뒷걸음을 쳐서 미리 감춰둔 메스를 불쑥 형사 목에 들이댄다.
“너 미쳤어? 도대체 왜 이래?”
얼빵한 순경이 어찌할 바를 몰라 병실을 뛰쳐나간다.
“이래봤자 죄만 가중될 뿐이야. 놓아주면 지금까지 일은 없던 걸로 해줄게.”
애써 바라는 바다. 살인미수는 벌금형이 없다. 교도소로 직행이다. 이제야 부모님이 손 쓸 수 없는 올곧은 나만의 문제다. 그나저나 순경은 동료를 부르러 어디까지 간 거지? 이쯤 되면 경찰 떼가 병실에 들이닥쳐야 정상인데, 설마 순경이 혼자 피신한 건 아니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계획대로라면 내가 살인미수로 현장 체포 되어야 하는데, 참으로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자포자기를 할 때쯤 내 손목엔 수갑이 채워졌다. 다행이긴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멀었다. 이제 겨우 한 고비 넘겼다.
나는 형량 조정 재판을 앞두고 구치소에 감금되었다. 배정받은 13번방에서 운 좋게 윤군을 만났다. 윤군의 공식적인 죄수 번호 1212번이 있어도 우리들 사이에서는 그냥 윤군이라고 불렀다. 윤군은 스물여덟 살로 사상 불온 혐의가 성립되어 입건된 케이스였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대통령을 비방하는 글을 기재해서 명예 훼손이라는 법규 하에 기소되었다.
“뭐라고 썼기에 대통령마저 뿔났냐?”
“야경국가와 복지국가를 구분 짓는 나만의 기준을 제시하고 본국이 실천하는 복지 수준의 고견을 구했을 뿐인데, 다짜고짜 구치소에 처넣더라고요.”
“대통령에게는 이미 복지국가인데, 윤군이 미비하다고 간하니까 원천 봉쇄를 한 거네.”
“난 그저 선진국을 꿈꿨을 뿐인데, 안타깝네요.”
윤군과 나는 나이를 불문하고 금세 단짝이 되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우리는 못난 구석까지 서슴없이 드러냈다. 윤군이야말로 나의 삭막한 사념을 경청해 주는 유일한 생물이었다.
늦둥이 외아들로 태어난 윤군은 풍요롭진 않지만 부족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덕에 튼실한 청년이 되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도 마땅한 직장을 찾지 못해 빈둥빈둥 허송세월만 보내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윤군은 저절로 패륜아가 되어 버렸다. 패륜아가 별건가, 돈 못 벌면 패륜아인 거지만, 어머니의 노령연금으로 근근이 입에다 풀칠하던 차에 어머니마저 지병이 확산되어 돌아가시고 만다. 그 후 겪은 수모가 구치소로 이끈 지름길이었다고 윤군은 너스레를 떨었다.
구치소 수잠자 중엔 대부분 국선변호사를 선임하지만 간혹 사선변호사를 선임하는 넉넉한 집안의 괴수가 있다. 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사선변호사를 호출한다. 숭고한 노역을 회피하여 재차 무슨 작당을 하는 걸까? 인간사회가 존재하는 한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곧 헌법이다. 재판을 받고 온 유복한 이는 출소했고 궁핍한 이는 교도소로 송치되었다. 유복한 이는 무죄고 궁핍한 이는 유죄라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나 보다. 그렇다면 나는 재판을 받을 필요도 없이 유죄인가? 내가 바라던 바긴 하지만 왠지 씁쓸하다.
윤군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자신한 건 착각이었다. 노역 중 윤군이 쓰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일이면 언제나 그랬듯이 다시 깨어날 거야. 윤군은 나의 여유로운 믿음을 저버리고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윤군의 병명은 지병인 당뇨와 간질 그리고 민감한 성격 탓에 생긴 만성 피로 증후군. 구치소에 수감되면서 지병이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한다. 잘 때도 쉴 때도 끼니를 때울 때도 노역을 할 때에도 윤군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내 사건을 맡은 국선변호사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국선변호사가 사건 경위를 설명하고 나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청취한다. 나보다 더 나의 사건을 잘 아는 국선변호사가 나를 찾아온 까닭은 뭘까? 브리핑이 마치자 접견실을 나가려는 국선변호사에게 나는 계획대로 묻는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상외의 질문에 국선변호사가 멈칫한다. 보통 수감자들은 석방을 갈구하지만 나는 도리어 영구적인 구속을 갈구한다. 나만이 나를 안다. 내게 주어진 자유는 갈팡질팡하기 일쑤다. 나는 내 육신을 살찌우는 법을 모른다. 더군다나 인간사회에서라면 더더욱 체한다. 까닭에 구치소가 적합하다. 천국이 별건가, 끼니와 잠자리 걱정이 없는 예가 천국이지. 적어도 내겐 이곳만한 천국은 없다. 여기야말로 합법적인 낙원이다.
답변 없이 국선변호사가 퇴실한다. 대놓고 나를 무시하는 행위가 분명한데도 나는 웃기기만하다. 나는 실성한 가축처럼 목 놓아 웃어젖히고 접견실 밖에서 감시하고 있던 교도관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찬다.
윤군 없이는 독방 신세를 못 면하는 내게 윤군의 비보가 들려왔다. 아닐 거야. 오보일 거야. 윤군이 나를 두고 매몰차게 떠날 리 없어. 눈으로 보지 못 했기에 윤군의 죽음을 나는 믿을 수 없다. 여전히 13번방 한 켠에는 윤군의 물품이 전처럼 그대로 배치되어 있다. 윤군이 평소 즐겨 읽던 사마천이 직시한 죽음의 양상은 어떤 것일까? 윤군의 죽음이 후세에는 어떻게 평가될까? 내일이면 윤군의 물품을 회수해 갈 것이다. 나는 미리 감춰둔 윤군의 관념 노트를 불태워 재를 삼켰다. 예정대로 물품이 강탈되었지만 윤군은 온전히 내 안에 살아있다.
한 차례도 담당 변호사와 제대로 된 면담을 한 적이 없음에도 나는 재판소로 이끌려 나갔고 징역 2년 7개월을 선고 받았다. 교도소로 송치된 이후 삽시간에 밤낮이 교차하고 계절이 변모했다. 이른 아침부터 검거 전 사복을 내놓은 걸 봐서는 오늘이 나의 출소일인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저들처럼 수감복 탈의가 신명나지 않는다. 여기서마저 쫓겨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나도 묻고 싶다. 흐느적흐느적 환복하다 말고 창밖을 내다보니 솜털 같은 눈이 내리고 있다. 출소하는 나를 위해 하늘이 베푸는 선물인가 보다. 새하얀 솜털이 쌓여 푹신하고 따뜻할 바깥세상으로 얼른 나가고 싶다.
철문이 열리고 출소자들이 우르르 나간다. 어라! 솜털은 없고 땅바닥은 죄다 구정물 범벅이다. 그새 누군가 솜털을 훔쳐간 모양이다. 솜털이 없는 바깥세상은 딱딱하고 차갑다. 내 주제에 뭔들 투정부릴 수 있으랴. 동일 출소자들은 각자 데리러 온 지인들과 흩어지고 나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당연한 경우인데도 나는 불현듯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아뜩하다. 수감 생활 내내 부모님의 면회가 전혀 없었던 걸로 봐서 나는 현저한 실종 상태인 모양이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갈 차비도 없다. 어차피 전과 아들은 부모님 여생에 치부가 될 뿐이다. 나는 한동안 교도소 외곽을 서성이다 경계 근무병이 번번이 시야로 침입해서 무작정 대도로 걸음을 옮겼다.
동체가 붐비는 대도에서 나만이 정지 상태로 휘둥그레져 고층 빌딩을 바라본다. 매서운 바람결에 온몸이 불 위에 올려놓은 마른 오징어처럼 오그라들 쯤에 근접 여성이 울분을 질러댄다. 나는 화들짝 눈을 뜨자마자 소리 쪽으로 반응한다. 나는 여성 가방을 훔쳐 달아나는 날카로운 남자를 쫓는다. 날카로운 남자가 대형마트로 들어간다. 대형마트 안에서 날카로운 남자를 찾기란 쉽지가 않다. 이리저리 찾아다니다 식품 층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때서야 한 끼도 못 먹은 내가 반응한다. 뱃속은 참 이기적이다. 뻔히 내 사정을 알면서, 뱃속에선 음식물을 넣어달라고 드문 괴성으로 떼를 쓴다. 눈을 어디다 둬도 음식물이 보이고 입안에는 침이 샘솟는다. 도중 까무러칠지언정 지불 안 한 음식물을 뱃속에 넣을 수는 없다. 나는 재범으로 체포되는 건 두렵지 않다. 다만 인간답지 못한 행위로 뱃속을 채우는 것이 두렵다.
구석에 배치된 정수기 덕에 그나마 물로 배를 채웠다. 이제는 소매치기를 찾아 잡겠다는 건 나만의 이상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른 이에겐 가능할지 모르지만 현재 나로선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밖에 나가봤자 춥기만 할 테니까 가능한 한 이대로 버텨보자.
물로 배를 채운 징벌로 신물이 올라온다.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사이에 폐점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흐른다. 나는 여느 고객처럼 퇴출이 점잖지 못하고 우스꽝스럽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짙은 밤과 짙은 추위를 묽게 하기 위해 나는 달린다. 온몸을 발열 상태로 둔갑시키기 위해 나는 쉴 새 없이 나는 달린다. 달리는 도중에 실소가 튀어나왔다. 나의 지난날들이 너무 우스꽝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짙은 밤과 짙은 추위에도 슬쩍슬쩍 나를 구경하는 동족들 덕분에 더욱 세차게 달렸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달렸건만 발열은커녕 인적이 드물어 한층 더 으스스하다. 잇대어 달려야 그나마 체온이 유지라도 될 텐데, 가로등 하나가 고작인 한적한 기찻길이라 걸음이 멈춰들고 공포심을 떨칠래야 떨칠 수가 없게 된다. 게다가 덜커덩덜커덩 요란한 기차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나의 공포심은 극도로 치솟는다. 까닭에 나는 눈을 감았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눈을 감아 버렸다. 어차피 이대로 버텨봤자 아사나 동사를 면할 수 없다. 이대로 될 바에야 차라리 나는 나의 육신에게 영원한 해방을 선사한다. 절벽 끝으로 내몰려 석연치 않게 얻는 해방이 아니라 당당한 해방을 선사한다. 나는 겁을 상실한 금수처럼 어슬렁어슬렁 기찻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달려오는 기차에 맞서 달려든다. 날이 새면 나의 동족들이 조문객이 되어 나의 죽음을 기억해 주겠지.
“간밤에 일어난 사건 사고 소식입니다. 삼십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달리던 기차에 투신하였습니다. 사체 훼손 정도가 심각해 정확한 신원을 파악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는 데로 신속히 전해 드리겠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