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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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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온리 이야기-윤보경-

유리의향기 조회 2,60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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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를 하면서 떠오른, 동화의 구상 하나

설거지하려고 그 물통에 가득 담아놓은 그릇들. 거기에다 트리오 몇 방울을 묻혔다. 그릇들이 기름이 많이 묻어서 하나씩 트리오를 묻힌 수세미로 닦기 전에 몇 방울, 물통에 떨어뜨렸다. 그릇이 잘 닦이도록. 음식 찌꺼기의 기름과 세제가 만나서 둥근 기포들, 방울방울 만들어지도록. 점점 기포가 많이 생긴다. 거품이 생겨서 그릇들은 기분 좋게 목욕을 한다.

그런데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하나 - 그 거품들 보고 있노라니 그 수많은 기포들이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인 것으로 문득, 머릿속 어딘가에서 상상작용이 일어나는 거였다. 갑작스레, 스치고 지나갔다.

로온리의 이야기

그 많은 입자들 중 하나, 플라스틱 통에 담긴 초록빛의 세제 입자인 '로온리'는 오랫동안 그 속에 갇혀있었다. 언제나 작은 통속에서만 보아온 세상. 그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날은 마지막 기회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만물의 어머니'에게 들었던 약속의 그날은 정확히 오늘이다. 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수많은 다른 거품 방울들과 마찬가지로. 작은 거품 방울인 '로온리'는 통의 아래쪽, 밑바닥 쪽에 있어서 나갈 차례가 되려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했고 이대로라면 정해진 시간 안에 나갈 수 있는 확률이 아주 작았다.

조금씩 로온리는 체념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그는 두근거리는 맘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곧 태양이 질 것 같다. 세상 밖으로 나가 무언가 할 수 있기를 바랬다. 작은 손으로 꽃을 심듯, 그렇게 자신의 땀과 힘으로 무언가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했다. 아니, 막연히 로온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형과 동생들, 친구들은 벌써 세상으로 나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꽤 오래 전 일이다. 그들이 그와 헤어져 방울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저 넓은 물의 바다로 나아간 것은.

로온리는 그들이 보고 싶었다. 그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이 그리웠고, 함께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꿈꾸었던 것들이 두서없이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며 그렇게 퐁퐁 솟아 나오기도 했다. 무늬지고 있었다. 초록빛 그 방안에 지나간 기억의 노래들이. 조용한 자신의 방에 앉아있노라면, 왼쪽으로 난 커다란 흰 창을 통해 비쳐오는 태양의 길고 곧은 따스한 빛살 한 줌이 몹시나 정겹게 느껴졌다. 태양이 하늘의 정중앙에서 가장 붉게 타오르고 있을 때였다. 그럴 때에 로온리는 빛의 꿈을 꾸었다. 그 빛살은 자신의 몸 한 가운데로 뚫고 들어와 가지가지 상념과 꿈들을 비단결같이 부드럽고 아늑한 빛의 포말, 무지개의 춤으로 수놓아주었다. 그건, '비단 무지개' 같았다.

로온리는 태어나자마자 통에 담겨져 가게 진열장 위에 있다가 어느 '물의 꿈'을 꾸었던 날 이 집 엄마의 손에 이끌려 이 나무색 선반 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주욱 그곳에서 살아오게 되었다. 발그레한 얼굴의 태양 아줌마는 언제나 로온리의 꿈을 들어주고 그 꿈의 알갱이 알갱이들을 '비단 무지개'로 감싸주었다. 로온리는 태양 아줌마의 따뜻한 손의 감촉이 생각났다.

지금 로온리의 나이는 '물방울의 날개'가 되었다. 곧 날아올라야한다. 저 넓은 물의 바다를 향해...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이런 상념에 젖어들고 있던 로온리는 갑자기 가슴 한가운데로부터 조금씩 투명한 어떤 노래가 솟아 나와 자신의 작은 방울 날개를 가만히 흔들어주는 걸 느낀다. 하얗게 솟구치는 걸 보았다. 그리고 그 하얀 투명한 노래는 무지개꿈의 자락들을, 올올이 깃든 꿈의 방울들을 포근하게 만져주고 있었다.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꿈의 비상이었다. 그토록이나 바라던 꿈속의 세계, 저 건너 물의 바다의 세상. 바로, 세상을 건너가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로온리는 뽀그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비잉글 작은 통로를 다른 기포 입자들과 함께 빠져나와 빠알간 넓고 둥근 통에 떨어졌다. 바로 그곳에 물이라고 하는 너무나 신기한 물질이 있었다. 그 차갑고 맑은 물질에 닿는 순간, 자신이 정녕 거품의 입자인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낯설고 이질적이지만 그토록 오랫동안 꿈에서 보아온 그것임을 알 수 있었다. 태어난 그때부터 지금까지 퍽 깊은 그리움을 간직해온 것이었다. 물을 향한 그리움은 언제나 꿈속에서만 있었고 한 번도 눈앞에서 보고 느낄 수 없었다. 물의 존재는 실재였지만 그의 현실 속에선 부재하는 것이었다. 마치 부재의 존재처럼. 존재의 부재처럼.

그러나 아득한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고 하루의 깊은 끝에 다다를 무렵이면 '아로로로..' 하는 고요한 소리가 그의 마음에서 들려왔다. '물의 꿈'을 그려왔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왔다. 그에게, 로온리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는 갖가지 형체와 무늬를 한 그릇들을 보았다. 그것은 그릇이었다. 자신은 그 그릇들의 더러움을 닦아주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물이라는 친구와 함께이다. 세상에서 그가 해야할 일이었다. 그는 물과 함께 섞여서 부지런히 그 속에서 자기의 노래를 불렀다. 그 동안 지녀왔던 날개를 힘껏 부풀려. 물, 그의 이름은 '길동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지금까지 많은 거품방울, 로온리와 같은 친구들이 이곳으로 왔고 그들이 함께 지내며 겪었던 일들, 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한 번은 온 몸에 기름이 흥건히 고여 단단히 목욕을 해야했던 그 넓적한 프라이팬의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때에 그들은 꽤 애를 먹었다고 했다. 물방울 친구들은 각자 개별적인 존재이지만 그들이 함께 있을 때에만이 다른 세상의 친구들과 같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고 했다. 그래서 물방울들은 언제나 함께 있었다. 로온리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물.. 참 좋은 친구들 같아. 나도 물처럼 되고 싶어. 무색옷을 입은 물님이 우리와 만나 하얀 거품이 되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깨끗이 닦을 수가 있어. 내 얼굴도 태양 아줌마처럼 빛나게 될 수 있을 거야.'

시간은 그렇게 자꾸 흘러갔다. 물방울의 이야기들은 세상에 처음 나온 작은 로온리에게 기억하고픈 많은 것들을 안겨주었다. 잊을 수 없는 한 권의 책이 주는 감동으로. 자꾸만 맡고 싶은 향기로. 하늘 위 노을의 색, 구름의 몸짓으로...주위의 모든 것들은 황금빛으로 찬란히 물들어갔고 어느새 약속의 시간,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다. 로온리와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며 함께 손을 잡고 유쾌하게 섞이던 물방울들은 이윽고 쏴아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새로 물통 안에 들어온 물방울들과 섞이었다.

이제 그릇들도 거의 다 닦은 것이다. 설거지를 마쳐가는 시간. 로온리는 자신의 몸이 어느 샌가 두웅실, 무색의 바람이 되어 살며시 날아오르고 있는 걸 느꼈다. 너울거리며 더 높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길동무는 저 멀리 한 점 수평선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물의 수평선 끝으로... 아득히 넓고 푸른 그 길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짙은 그리움 하나 돋아나고 있었다. 그가 로온리에게 주었던, 또 로온리가 그에게 주었던 '하나됨'의 노래, 축제 같은 물방울의 노래 속에 그들은 함께 태양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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