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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4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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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얼굴*6*

유리의향기 조회 2,46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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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 누가 울 엄니 잠 살레주시요, 울 엄니가 죽소오.\"

누나가 그럴수록 의부의 손속은 더욱 사나워지곤 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나는 한 번도 어머니와 의부의 싸움에 끼여든 기억이 없다. 누나와는 달리 나는 어머니가 피투성이가 되어 싸움이 끝날 때까지 방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굳게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지켜보는 식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것은 어린 내가 어떻게 해서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이, 더구나 의부를 향해 욕질 한 마디 뱉는 일없이 잠자코 싸움을 지켜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아마도 희미하게나마 가슴 밑바닥에는 굶주림에 대한 동물적인 공포감으로부터 우리 식구를 구해 준 의부에 대한 고마움이 숨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혹은 어머니와 의부 사이에 항상 자신이 싸움의 원인이 되는 불편한 위치라는 자각을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중에 지니고 있었는지도,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싸움이라고 해야 할지 어떨지 애매하지만, 의부와의 싸움에서 어머니가 꼭 한 번 이긴 적이 있었다. 의부는 곧잘 집에서 독작(獨酌)을 하곤했는데, 해산물 도매업자답게 안주가 고급이었다. 주로 대구 어란이나 북어찜 혹은 어포 따위 해물이었는데, 나로서는 맛보기 힘든 것들이어서 의부가 술을 마시는 날이면 어머니의 잔소리나 누나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나는 으레껏 술상머리를 떠나지 못했다. 의부는 그런 나에게 이따금 안주를 건네 주었던 것이다. 그 날도 나는 의부의 술상머리에 붙어앉아 안주를 얻어먹고 있었는데.

\"옜다, 니도 한잔 해뿌러라.\"

의부가 나에게 불쑥 술잔을 내밀었다. 무료했던 것일까. 차츰 취하기 시작한 의부의 눈매가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나는 엉겹결에 의부에게서 술잔을 받았다. 그렇게 한두 잔 받아마시던 나는 어느 순간에 뒷마당의 장독대며 장독대 옆에 붉게 핀 맨드라미가 빙글빙글 도는 것을 보았다.

\"허허, 이놈 봐라, 인자 본께 니가 술이 올른 모양이제? 우짜냐? 니도 쬐깜 술맛을 알겄냐?\"

\"히히, 장독대가 돌아라우, 맨드래미도 돌고라우. 오메, 사춘 아부지도 돈디요.\"

나는 아마 술상머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자 빙글거리던 장독대며 맨드라미가 한쪽으로 기우뚱 쏠렸고, 그 순간 나는 마루에서 뒷마당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오메, 대운아. 왜 그라냐?\"

나는 금방 숨이 넘어갈 듯 다급한 누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까무룩히 정신을 잃어갔다. 다시 먼 곳에서처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놈의 인사가 대운이를 쥑이네에.\"

내가 정신을 잃은 것과 어머니와 누나가 함께 의부에게 달려든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술 취한 기분 속에서도 두 여자의 달려드는 기세가 여느 때 같지 않은 것을 깨달은 의부는 평소의 의부답지 않게 쉽사리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이년들아, 애먼 소리 말어. 설마 허니 나가 갸를 쥑일라고 했겄냐? 넙죽넙죽 잘 받아묵길래 자꼬 주다본께 그런 거제. 이년들이 생사람을 잡어도 유분수제……\"

그 후로 의부는 다시는 나에게 술은 물론 안주마저도 일체 건네 주지 않았다. 물론 나 또한 어머니의 매가 무서워 더 이상 의부의 술상머리에 얼씬거리지 못했다.

인생에 대한 조건을, 면도날로 얼굴을 지우는 식으로 확인한 사춘기의 소년이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좀더 파괴적인 자기 혐오에 빠져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진행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자신의 출신성분을 증오하다 못해 무슨 치부처럼 여겼을 터였다. 그랬다. 나는 한 순간도 자신의 치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다가 길거리에서 여학생과 얼핏 눈이라도 마주치면 나는 뜨거운 불에라도 덴 듯 화들짝 놀라곤했다. 나는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붉게 물들었을 것이었다.

'지금 나는 저 여학생한테 내 치부를 들키고 말았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도청소재지에 있었는데, 시골 장터의 장돌뱅이 입장에서는 일테면 유학을 온 셈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새 교복을 입은 것만으로도 나는 다른 장돌뱅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기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장돌뱅이들로서는 자식을 고등학교까지 진학시킨 것은 어머니가 처음이었다. 내 또래의 다른 장돌뱅이들은 대부분이 국민학교를 졸업하기가 무섭게 서울 등의 도회지로 나가서 상점의 점원이나 중국집의 배달원 혹은 넝마주이가 되거나 일찍부터 부랑아로 빠졌고, 어렵사리 중학교라도 마친 또래들은 한두 명에 불과했다.

\"인자 두고봐라, 나가 뻬가 부서져서 가루가 되야도 니를 기연시 대핵까장 높은 공부럴 시키고 말텡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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