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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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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얼굴*3*

유리의향기 조회 2,52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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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온몸을 긴장시키며 자신을 변명했다. 그러던 아이는 어느 순간 어머니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는 것을 훔쳐보았다. 그런 어머니의 입술 사이로 탄식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깅가밍가 했드만…… 급살 맞을 인사……\"

아이에게 매가 쏟아진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넋이 나간 듯 허공을 쳐다보던 시선이 아이에게 내려오기가 무섭게,

\"이 동냥치 xx야, 나가 니한테 믹일 걸 안 믹엥냐, 입힐 걸 안 입헹냐, 머이 부족해서 동냥질이냐?\"

어머니는 욕설과 함께 부지깽이를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까짓 양말로 인해 매질을 당하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상상하지 못했던 아이로서는, 처음에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오메, 엄니. 동냥질한 것이 아녀라우. 그 아자씨가 맬갑시 줬단 말이요.\"

\"몰르는 사람이 주는 것을 기냥 받어 오면 그것이 동냥치제, 동냥치가 따로 있다냐?\"

\"아, 안 받을랑께, 어른이 주먼 공손허게 받어란디요?\"

\"아나, 나 껏도 받어라, 아나, 아나.\"

어머니의 매질은, 아이의 몸뚱이에 부지깽이가 떨어질 때마다 숨이 헉헉 막힐 만큼 거센 것이었다. 아이는 이제 필사적인 마음이 되어 어머니 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이리저리 매를 피했다. 그때 누나가 어머니를 말리고 나섰다.

\"오메, 엄니. 어째 이라요? 이러다 대운이 죽이겄소.\"

어머니로부터 매를 빼앗으려 들던 누나는 한순간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자빠져 버렸다.

\"니년은 가만 있어. 오늘 나가 이 놈을 쥑이고 나도 죽어뿔 거잉께.\"

어머니의 말보다도, 치맛자락에 매달려 얼핏 얼굴을 올려다본 순간, 아이는 어쩌면 어머니가 정말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저기 굻은 힘줄들이 기어다니고 두 눈이 퍼렇게 번들거리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아이는 분명한 살기를 느꼈던 것이다. 아이는 지금껏 어머니뿐만 아니라 누구에게서도 그렇듯 무서운 얼굴은 보지 못했다.

불현듯 어떤 절망감이 아이의 눈 속으로 마치 캄캄한 어둠처럼 몰려오는 것이었다. 아이는 더 이상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지 못하고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그렇게 무너져내리면서 아이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맞을 매가 아니다. 그리고 아이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작고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아이를 내려다보며 비웃는 듯 혹은 딱해하는 듯 얄궂게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처음으로 빠지는 자기혐오란 어쩌면 훗날 화려하게 피어날 아름다움이라는 꽃의 싹눈은 아닐까.

그리하여 그 싹눈에서 대지를 향해 뻗어 가는 첫 뿌리는 아닐까.

이윽고 대지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다음, 이번에는 푸른 하늘을 향해 키를 누여가는 줄기는 아닐까.

그리고 그 줄기에서 가지로 퍼져나와 온몸 가득히 문을 열어 탄소동화작용을 하고 있는 이파리는 아닐까.

그렇듯 오랜 낮과 밤을 보낸 끝에 이슬이 많이 내린 어느 날 아침 봉긋이 맺어 보는 꽃봉오리는 아닐까.

훗날 그것이 악이나 독의 꽃이 될지 아직은 아무것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사춘기란 이른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봄에 대한 예감은 사방에 가득한데 정작 확인하려 들면 어느 하나 확실하게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대신에 아직은 매서운 바람과 칼날 같은 추위가 여린살을 찢는다. 그렇듯이 무언가 이제 막 시작되려 하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예감은 사방에 가득한데, 어느 하나 인생의 실체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예감은 견딜 수 없는 갈증으로 변하고, 이제 막 시작되려는 자신의 인생 대신에 지금껏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조건만이 매서운 바람과 칼날 같은 추위가 되어 여린 살을 찢는다. 아아, 사춘기의 어린 나이에 돌아다보는 자신의 삶이란 정작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내가 자신의 사진들을 없애고, 국민학교와 중하교의 졸업사진에 면도날을 대던 무렵이 바로 사춘기의 초입일 터이다. 헤아려 보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여 재수를 하던 때이다. 어린 재수생으로서는 사방의 모든 것들이 다만 춥고 암담하였을 것이다. 심한 자기혐오에 빠진 것도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해도 사진들을 없애고 급기야 자신의 얼굴에 면도날까지 대는 행위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어린 재수생의 자기혐오라고 해도 무언가 정도를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럴지도 모른다. 문제는 바로 사춘기의 어린 나이에 벌써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아 버린 데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는 소년의 눈에 맨 처음 비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엉뚱하게도 소년은 자신의 얼굴보다는 타인의 얼굴을 먼저 돌아다보아 버린 것은 아닐까. 언제인가 어떤 절망감이 캄캄한 어둠처럼 어린아이의 두 눈에 몰려올 때, 바로 그 어둠 속에 떠오르던 작고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 더 이상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지 못하고 무너져내리는 아이를 향해 비웃는 듯 혹은 딱해하는 듯 얄궂게 웃던 사내. 그랬을 것이다. 소년도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사내는 소년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서, 소년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조건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삼십 촉짜리 흐린 전등 아래서 손을 떨며 소년이 면도날로 지운 것은 어쩌면 얼굴은 영원히 사내의 얼굴에 가려지고 말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소년은 마치 자신의 인생의 어떤 예감에 대한 갈증처럼 사내의 얼굴 때문에 보지 못하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년은 면도날로 자신의 얼굴을 지우는 식의 자기혐오 이외에는 사내의 얼굴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사방의 모든 것이 춥고 암담한 사춘기의 소년에게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터이다.

내가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고, 그리하여 거기에서 정작 자신의 얼굴보다는 작고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를 먼저 보았을 때, 사내는 당연하게 나의 인생에 하나의 조건이되어 개입하였다.

'사생아.'

어린 시절 어둠 속에서 단 한 번 보았던 사내가 나의 생부라는 것을, 그리고 그 무렵 생부는 오랜 감옥살이 끝에 갓 출감하였다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듯 나는 자신의 출신성분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는 사생아거나 장돌뱅이 출신인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다. 오히려 장돌뱅이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며 잡초처럼 자라던 시절의 기억속에는, 한줄기 구김살도 없이, 장터의 밑바닥 사람들만이 갖는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낙천적인 분위기만이 가득 차 있다. 모름지기 사춘기 소년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예감하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전까지는 나는 그런대로 행복한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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