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코는 없다' 를 읽고..
암호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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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편소설은 싫어한다.
게다가 요즘은 책 읽는 것 자체가 곤욕스러워 더더욱 장편은 읽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근 2주전쯤 한권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상기념 어쩌구 저쩌구 하는 수상집.
94년도 수상집인데 대상은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였다.
뭐 원래 장편을 읽지 않다보니 잘은 모르겠고, 최근 최윤의 단편집을 읽어본 결과 최윤의 소설은 재미가 없단 결론을 내렸다.
읽다보면 잘 쓴 소설이라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정작 글을 읽는 재미는 없다.
소설가가 글을 잘 쓰는 것과 재미있게 쓰는 것은 다르단 생각이 든다.
최윤의 소설은 관념적인 것 같고, 문체도 명확하지 못하다.
특히나 '하나코는 없다'는 이런 저런 소품들을 적절히 배치시켰다는 평가단의 평에도 불구하고 안개밖에는 생각하는 것이 별로 없다.
안개처럼 침침하고 습한 모호한 소설이란 생각.
그래도 이 책을 읽고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예전부터 좋아하는 박완서의 작품도 있고, 이문수던가? 잘 몰랐던 작가인데 '온천가는 길에'라는 작품도 재미있게 읽었다.
먼저 박완서에 대해 말하자면, 박완서의 글을 글쟁이의 노련함이 묻어나서 좋다.
박완서의 작품(역시 장편은 모른다.)은 한 개인의 자아정체성의 미로를 헤매는 대신,
일상의 개인의 모습을 노련한 자신만의 필체로 맛깔스럽게 엮어낸다.
가벼운 소재에서 결코 가볍지 않는 감동을 주는 연륜이 엿보이는 작가란 생각이다.
다만, 한때 느낌표에서 대대적인 선전을 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기대 이하였다.
너무 방송에서 비행기태운 건 아닌지...
그리고 책이라는 걸 그런 식으로 홍보하는 게 약간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이건 사족이다.)
지금 생각나는 작품으로 '그리움을 위하여/해서' '꽃잎속의 가시'가 있는데, 둘다 노년의 주인공을 다룬 작품이다.
항상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도시속 남녀 얘기가 지겹다면, 인생을 음미하는 노년의 주인공 소설은 어떨까?
문수님의 '온천가는 길에'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소설이다.
현실의 부조리한 면을 그대로 드러내놓은 소설.
자기의 일신만을 생각하는 고위 각료의 부도덕함을 독특한 구성으로 쓴 이 소설은 간단한 내용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읽고 나서도 찝찝한 소설이 있는가 하면, 읽고나면 내용이 환히 보이는 소설이 있다.
전문가들은 읽을때마다 새롭고 많은 것이 보이는 것이 좋은 소설이라고 하지만, 어디 요즘 사람들이 읽은 책 또 읽는가?
(게다가 책을 읽기나 할까?)
단순한 구성에 명확한 표현이 오히려 미덕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내가 만일 소설을 쓴다면 이런 류의 소설을 쓰고 싶은데, 게으른 건 둘째치고 능력없음은 돈으로도 치유못할 치명적 단점이다.
그리고 윤대녕의 '소는 여관으로 들어간다 가끔'은 전에 읽은 적이 있는 소설인데, 역시 재미는 없다.
윤대녕의 초기작품 '은어낚시통신'때의 참신한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윤대녕의 소설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낯선 반면이라는 느낌을 주며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것도 자주 쓰다보면 정형화가 되고 자주 읽다보면 틀이 잡히는가 보다.
하긴 윤대녕의 신작이 나왔을텐데 전혀 읽을 생각을 안 하는 것 보면 윤대녕도 이제 나한테는 한 물간 작가가 되버린 모양이다.
(하긴, 내가 좋아하는 작가도 별로 없다. 내가 읽어서 모르고 재미없으면 환영받지 못한 작가가 된다. 그 작가의 능력과 상관없이...)
소설을 읽는 이유론 여러가지가 있겠다.
좋아하는 작가가 있어서, 할 짓이 없어서, 문학이 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등등.
항상 책을 읽자 읽자 하면서 내가 책을 통해 얻을 것은 무엇일까?
며칠 있으면 가물가물해져버릴 설익은 감상주의?
대화거리가 궁할때 써먹을만한 자랑 이상의 의미가 없는 지식의 축적?
섣부르게 펜을 굴리다가 이내 기가 꺾일 무능력자를 위한 창작의욕의 활로?
뭐, 이 모든게 그동안 내가 책을 읽는 이유였던 것 같다.
내 뇌리에 남은 몇몇의 작품이 분명 존재함은 앞으로도 내가 책을 읽어야 함을 독려하는 것이겠지만,
너무나 무의미하게 그동안 책을 읽어내려간 것은 아닌지....
읽어본 책의 권수가 자랑이 아니라 책을 읽고 깊게 곰삭은 생각의 깊이가 더 중요한 것임은 나도 아는 일인데 말이다.
아직 나는 그런 책을 읽어보지 못한 것 같다.
책은 많지만, 좋은 책은 드물고, 좋은 책을 찾아 읽기는 더욱 드물고,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