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성 언어와 피상적 인식
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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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전적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는 [도시의 여름]을 두고 아무런 비판을 할 수가 없다.
분명히 풍경이나 인사와 사물에 관한 감흥을 리듬을 갖춘 형식 속에 담고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그러한 모든 감흥은
다 시가 되는가. 분류상 '그렇다'고 우리는 일단 대답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러
한 모든 시가 "다 좋은 작품이 되는가"라는 질문에는 누구나 함부로 대답할 수
가 없다. 가령 다음의 작품과 [도시의 여름]을 비교해보면 어떤가.
콸콸콸 철관에서 폐수의 폭포가 힘차게 쏟아지고, 부글부글 거품의 소용돌이에 죽은 시궁쥐가 뜬다.대낮의 장엄한 소용돌이, 도시 한복판으로 검은 기관차가 무개차를 끌고 지나가고, 살아 남은 태아들이 철뚝길에 나와 깔깔깔거리며 놀고 있다. ----최승호 [대낯]
이 대낯도 도시의 풍경이다.
그리고 '콸콸콸' '부글부글' '깔깔깔' 과 같은 부사형 의성, 의태어가 등장하
고 있다. 그런데도 [도시의 여름]과는 전혀 다른 시적 공간, 즉 시로 형성된 하
나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도시의 여름]이 어느 날 창밖을 보고 눈에 띄는 대로 서술하고, 또 그것으로부
터 연상된 막연한 의문을 표현하고 있는데 비해 [대낮]은 그렇지 않다. 의도적 또는 집중적 관찰에 의해 얻어진 시적 공간이다. 즉 [도시의 여름]이 기계적,피상적 인식이라면 [대낮]은 구체적 인식의 세계이다. 글쓰기란, 글쓰기의 하나인 시작이란 눈에 띄는 대로 생각되는 대로 적는 행위가 아니다.
그러니까 [도시의 여름]이 지니고 있는 첫번째 문제는 시작이란 '무엇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라는 의식이 없는 상테에서 씌어진 점니다. 즉 자기의 감흥에만 치우쳐 그 감흥에 따라 이루어진 시적 공간이다. 이와는 달리 앞서 예로 든 어효선의 동시도 동시 나름의 무엇에 대한 인식이 있다. [하늘]은 "파아란 도화지"며 꽃밭에는 꽃의 종류만큼 많은 웃음 소리가 들린다는 미적 인식이 그것이다.
김소월이 [칠석]에서 "강변에는 물이 흘러"야 "돌돌'이라는 소리가 생긴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도시의 여름]에는 이와 유사한 인식이 없다. 그냥 보이는 개략적 풍경(하이얀 구름/빌딩 숲/불볕/봉고/시멘트로 덮인 도로)과 "저곳에/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라는 막연한 느낌의 표현만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꽃밭]과 [하늘]또는 [칠석]과 [도시의 여름]은 차이가 없어 보인다.
시적 표현의 유사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즉 '하이얀' '파아란'과 같은 형용
사의 꾸며쓰기, '둥실둥실' '오락가락' '뜨겁게 뜨겁게'와 같은 의성, 의태성 부
사의 사용과 반복법, 그리고 '봉고 포니 그랜저 벤츠 프라이드 르망.....'과 같은 열거법이 다른 시에서처럼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적 인식과 관계가 없이 사용되는 언어들,
또는 꾸며쓰기를 나는 외화성 언어라고 부르는데, 이런 외화성 언어는 외관상
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일지는모르지만 사실른 공허한 말 또는 말놀이에 불과한 것이다. 동시에 자주 등장하는 이런 종류의 수사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즉, 어린이들의 시짓기란 말놀이와 연관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관습적 인식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작품을 주의
깊게 보아둘 필요가 있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있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墨畵]
처서 지나고
저녁에 가랑비가 내린다.
태산목 커다란 나뭇잎이 젖는다.
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한 번 멎었다가 가랑비는
한밤에 또 내린다.
태산목 커다란 나뭇잎이
새로 한 번 젖는다.
새벽녘에는 할 수 없이
귀뚜라미 무릎도 젖는다. ----김춘수 [처서 지나고]
이 두 편의 시는 외화성 언어 또는 꾸며쓰기가 없다. 그러나 두 편 모두 시로
서 매우 아름다운 작품이다. 두 작품의 아름다움은 관찰의 섬세성과 그것을 언
어로 가시화하는 묘사의 적절성에 있다. [묵화]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고 쓴 작
품일 수도 있고 또는 실제로 시인이 본 광경일수도 있다.
어떻든 힘겹게 하루를 넘긴, 그래서 발등이 부은 할머니가 같은 처지에 있는
소잔등에 손을 얹고 있는 시의 세계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더구나 "서로 적
막하다고"하는 구절에 오면 삶의 적막이라고 할까, 그러한 감정 속에 스민 그
따스한 사랑이 눈물겹기까지 하다. [처서 지나고]는 "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메아리"처럼, 그렇게 "한 번 멎었다가" 내리는 가랑비에 관한 묘사는 시인의 눈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찾아볼 수 없는 세계이다. 그 가랑비에 젖는 "귀뚜라미 무릎"도 마찬가지이다.
시에서의 미적 인식이란 앞의 두 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일상적이고 기
계적인 우리들의 삶 속에 파묻혀 있는 세계를 관찰하고 느끼고 그곳을 언어로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언어만이 살아 있는 예술적 언어들이다. 도시의 음울한 삶을 보여주고 있는 [대낮]도 도시적 감수성을 수용한 결과 그 언어의 질은 다르지만 알의 두 편과 같이 묘사라는 우리들의 언술형식에 의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