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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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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희미한 힘

준석 조회 2,13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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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처음 시를 쓰게 되는 동기는 한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동의를 얻기 위해서 일 때가 많다. 즉 '나'를 소외시키고 세상이 자기들

끼리만의 거대한 합의 속에서만 돌아가고 있다는 소외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쓴다.

나만이 가진 생각과 느낌이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라는 바람을 갖고

내가 선택한 그, 혹은 그녀에게 첫 연애편지 같은 동의를 구해보는 것이다.

첫 시도는 첫 연애처럼 대체로 실패한다.

실패의 이유를 상대방인 그에게 묻고 싶지만 실패의 쓴 맛은 용기를 잃게 한다.

고쳐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을 다시 돌아보고 또 다른 표현방법을 구해본다.

고치고 고치면서 마음 속에 아직 포기하지 못한 그에게, 동의를 구하고 싶었던

그녀에게 다시 묻는다. 그러나 세상 속의 그는, 그녀는 다시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 고독한 내면의 방에서 한 시인은 키워진다. 이렇게 해서 '나'라는 존재는

알이었다가 애벌레였다가 번데기를 거쳐 나방이 된다. 내가 애벌레였을 때도

아니라고 했으며, 번데기가 되었는데도 아니라고 했으나 시인은 '아니라'는

그 벽에 부딪힐 때마다 환골탈태하게 된다. 내가 동의할 수는 없지만 나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굴러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슬픔과 소외감은

나만의 것은 아니리라.

최근 우리는 가장 부자라고 생각했던 한 사람과 지극히 가난했던 한 가족의

참혹한 투신자살 사건을 목격했다. 살아있는 우리가 죽음 으로써 자신의

슬픔과 분노를 전하려 했던 그들의 깊은 상처를 어찌 다 헤아리리라.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나를 제외한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죽은 후의 감각으로는 감지하지 못한다.

살아있는 순간에라야만 그나마 죽은 후의 시간과 상황을 상상이라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목숨을 던져 스스로 생명을 끊은 그들은 살아서 얻지 못한 동의와 동감을 죽

은 후에라도 얻기를 희망하면서 목숨을 던졌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목숨을 끊은 이제 이 땅에 살아있는 우리는 그들의 슬픔과 절망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표한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 땅에 없어 우리의 뒤늦은

동의를 접수했는지도차 알 수가 없다. 시는 부자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절망한 이에게나 아픈 이에게나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시는 오랫동안 세상을 향해 동의를 구하는 방법을 찾아왔다.

그러면서 스스로 시 안에 있는 위로나 희망을 믿는 이들을 찾아왔다.

그것은 찾는 이에게만 찾아진다. 시가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지는 오래되었다.

오래 소외되어 왔기에 시는 시의 법칙 안에서 어떻게하면 그들로부터 동의를

구할지, 어떻게 하면 이 소외감이 자신만의 것이 아닌 게 되게 할지 알고 있다.

이것이 희미하나마 시가 갖고 있는 힘이다. 오래 소외되어 왔기 때문에

얻게 된 힘이다 시인들은 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가? 시인은 되묻는다.

왜 알아들을 수 없도록 세상은 상투적이 되었는가? 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도록 상투적인 세상은 시를, 시인을 소외시켰는가?

우리는 현재 정치, 경제, 사회, 외교 어느 분야에서든 서로의 동의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의 의견에든 쉽게 동의해주려고 하지는 않는다. 동의해주지 않는

것이 힘이라고 믿고 대가를 요구한다. 정당은 정당대로,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미국도 그렇고 북한도 그렇다.

그들에게 고쳐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고, 다시 표현방법을 찾다

결국은 환골탈태하고 싶어하는 시의 방법과 마음을 빌리라고 하고 싶다.

앞에서 애벌레로, 번데기에서 나방으로 몸을 바꾸며 시인들은 동의와 공감을

억제하기 위한 질긴 시도를 그치지 않는다. '아니오'라는 딱딱하고 거친 부정

의 벽에 몸을 비벼대지 않으면 환골탈태할 수가 없다.

이 질긴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동안 시는 죽음을 잊게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날개를 달게 된다. 그렇다고 시는 믿는다.


-최정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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