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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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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 - 3

히카루 조회 2,87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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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학교에서
 
 덥다. 햇살이 따갑다기보다는 눅진눅진하다. 불쾌지수가 상당히 높은 날인가 보다. 엎드려 있던 성수가 고개를 뒤척이자 뒷자리의 기범이가 발로 의자를 툭 찬다.
"야, 일어나. 숙제도 안 해 왔다면서 태평하게 잠을 자면 어떻게 해. 일어나서 내 노트라도 베껴."
 '아, 그래. 난 중 3이고, 오늘은 생물 숙제가 있다고 했어. ... 믿을 수 없지만 지금 난 중 3 교실 책상에 앉아 있는 거야.'
 성수는 10년의 기억을 거슬러 자신이 내뱉었을 법한 말을 던진다.
 "네가 대신 해라. 글씨도 비슷하잖아."
 이렇게 턱 없는 소리를 해도 기범이라면 틀림없이..
 "그래, 숙제를 베끼라는 내가 어리석다. 노트 이리 내."
라며 툴툴툴 성수의 가방을 뒤적인다.
 '아, 그래. 나는 이런 녀석이었고, 기범이는 저런 녀석이었지. 10년 전에는. 아니, 지금도. .. 지금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의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이다.
 "이해할 수가 없어. 숙제도 내가 열심히 하고, 수업시간에 졸지 않는 것도 난데, 왜 성적은 네가 더 좋은거야?"
 기범이의 툴툴거림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유전자의 차이야."
 성수의 대답에 기범이가
 "우리 부모님 모두 연구원인거 알고 있지?"
라며 째려보자
 "돌연변이는 어디든 존재해."
라고 성수가 툭 내뱉는다. 언제나의 대화다.
 "내일 체력 테스트 있어. 알지? 달리기 연습이라도 좀 하고 갈까?"
 기범이의 말에 퍼뜩 생각나는게 있다.
 "아, 체육복. 학교에 두고 왔어. 김치 국물 튀었는데. 가져와야 하는 걸 잊었어. 기범아, 먼저 가. 학교로 돌아가야 하겠어."
 성수는 버스 정류장에 기범이를 두고, 학교로 갔다.
 
 방금 나온 교문, 방금 나선 교실. 그런데 뭔가 달라진 듯한 느낌. 좀 더 낡았지만 좀 더 세련되어진 느낌의 학교. 불과 5분 전에 나선 곳인데 말이다. 체력 테스트 준비를 위해 반 강제적으로 남겨진 학생들인지 분주하게 운동장을 누비고 다니는 몇몇의 학생들. .. 교복이 다르다. 성수의 것은 차이나 칼라인데, 운동장의 아이들은 넥타이를 매고 있다. 무언가 다시 어긋나 있다.
 "누구, 찾아오셨어요?"
 멍하니 서 있는 성수에게 말을 거는 학생이 한 명 있다. 해사한 얼굴이다.
 "아, 체육복을 가지러...요."
 "조카 분 것인가 봐요. 사촌동생이나. 본래 아무나 교실로 들어갈 수는 없는데, 몇 학년 몇 반이에요?"
 "...3학년 8반이요."
 성수는 10년 전 자신의 반을 말해 보았다.
 "사물함 열쇠는 가져오셨죠?"
 문득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열쇠 하나가 잡힌다. 집 열쇠는 아니고, 사물함 열쇠라는 것인가 보다. 열쇠를 꺼내 보이며,
 "이게 맞나요?"
라고 묻자,
 "네, 따라오세요. 안내해드릴게요."
하며 앞장서 걷는다. 성수도 익히 알고 있는 길을 앞서서 총총히 걸어가는 해사한 학생.
  교실의 책걸상 수가 줄어들어 있다. 좀 더 깨끗해진 느낌이기도 하다. 10분 전과 달라진 교실이다. 사물함을 열어 본다. 27번 사물함이다. 김치 국물이 묻은 체육복과 그리고 노트가 한 권 들어 있다. 의자에 앉아, 뒤적여 본다. 무언가 적혀 있다.
 
6. 걸어가다

 덥다. 학교에서와 다름없이 눅진한 느낌이 든다.
 "찾으셨어요?"
라는 해사한 학생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체육복과 노트를 들고, 학교를 나섰다. 버스를 타야 하지만 우선 걷기로 했다. 비척한 걸음. 기범이는 이미 집으로 갔는지 거리에는 없다. 노트에는 '청마'라는 단어가 오똑허니 쓰여져 있을 뿐 그 외에는 비어 있었다. '廳魔'. '삿된 소리를 듣다'라는 의미인 듯하다. 모든 실마리는 그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시간 남짓을 걸어 집이 있는 동네로 들어섰다. 빌라 앞에 기범이가 서 있다. 중학생 기범이다.
 "잊고 온 물건을 새로 만들어 오냐? 왜 이렇게 늦었어?"
 "어, 그러게. 집에 올라 가 있지, 왜 여기 서 있어?"
 성수의 말에
 "아무도 없더라. 어머니 외출하셨나봐."
라고 대답하는 기범이. 자기 집에 다녀왔는지 교복 차림이 아니다.
 "나, 지금부터 잠시 들러야 할 곳이 있는데, 집 열쇠 줄 테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성수는 이렇게 말하고, 책가방과 체육복을 기범이에게 맡긴 후 '청마'로 향했다. 약국 2층에 청마 슈퍼가 있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슈퍼 계단을 오르고 올라 드디어 도착한 청마 슈퍼. 문을 열자. 그저 평범한 슈퍼마켓이다. 계산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쇼핑객들이 저마다 살 것을 사고, 먹을 것을 먹고 있다. 무언가 이상하다.
 "성수야, 엄마 찾으러 왔니?"
 장바구니 가득 식재료를 산 쉰 여섯의 엄마가 눈 앞에 있다.
 "어, 뭐 그렇지."
 "살 것 다 샀으니, 집에 가자."
 "어, 난 고슴도치를 구경하러 온거야. 집에 기범이 와 있어. 나도 곧 갈게."
 "얘가 또 그 소리네. 기범이가 대체 누군데?"
 엄마는 여전히 기범이를 모른다. 쉰 여섯의 엄마와 열 여섯의 기범이와 열 여섯인지 스물 여섯인지 알 수 없는 성수는 지금 기억이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상황 속에 있는 듯하다.
 "뭐, 알겠어. 모른다면 어쩔 수 없고, 여하튼 집에 내 친구 와 있으니까 놀라지 말고, 잠시 같이 계세요. 곧 돌아갈게요."
 엄마를 내려 보내고, 오른쪽 벽면 끝으로 향하는 성수. 산후 조리 중인 고슴도치를 보러 간다. 고양이와 토끼와 작은 강아지들로 짜여진 벽. 고슴도치는 보이지 않는다. 산후조리 중이니 귀찮게 하지 말라는 쪽지만 붙어 있다. 파는 물건일텐데.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고슴도치를 사 버렸다. 어미와 새끼 세 마리도 함께 말이다. 작은 집에 넣어서 슈퍼 계단을 내려 오며, '청마'에 간 이유가 뭐였더라 하고 생각해 본다. 어긋나 있는 것을 찾으러 간 것인데, 애꿎은 고슴도치만 네 마리나 기르게 생겼다.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멀었나 싶게 발걸음이 무겁다. 청마 약국의 아주머니께 눈인사를 건네고, 성수는 빌라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도 고슴도치 네 마리와 오똑하게, 거리에 남아 있는 성수. 옆구리에 낀 노트가 무겁다. 무심코 펼치자, 글자가 늘어나 있다. '空園'. 빈 정원이라는 뜻인가. 성수의 집에는 정원이 없다.  무언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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