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에서 - 1
1. 시작하다.
세상이 점점 호들갑스러워지고 있다. 무언가 진정되지 않은 존재와 존재들이 떠들썩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틀림없이 평범하다고 보여질 우리 주변의 생활들. 하지만 무언가 길이 쉽사리 어긋나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길들이 점점 그 방향을 스스로 변화시키고 있다.
" 기분 탓이야. 여기 맞잖아. 우리 약속 장소. 1522번 버스 타고 약국 앞에서 내려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있는 공원의 두 번째 벤치. 가운데 나무가 칠이 벗겨져 있는 곳. 가르쳐준 대로 왔더니 쉽게 찾을 수 있던데 뭐. 길은 생물이 아니야. 인간이 인위적으로 손대지 않는 한 제 멋대로 변하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
연락을 하면 언제나 곁으로 와주는 친구 녀석은 성수의 신경 과민적 발언에 대해 이런 반응을 보였다. 그러게, 정말 요즘 수면부족이라 그런지도 모르겠군. 그럴거야.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거야. 길은 무생물이야.
공원은 매우 협소한 곳으로 한 바퀴 도는데, 느릿한 거북이 걸음으로도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키가 큰 것도, 다리가 긴 것도 아닌데, 인구 10만은 족히 될 것 같은 이 동네의 공원이 겨우 이 정도 규모라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아, 그것도 괜한 투정인 듯하다. 봐, 토요일 오후인데도, 사람이 거의 없어. 이 도시 사람들은 공원보다 다른 곳을 즐겨 찾나봐. 가까이 있는 쾌적한 휴식 공간보다는 먼 곳의 바다나 산, 그리고 수목원이나 ..."
"아, 그 다음 말은 알겠어. 오리집, 닭집, 개고기집, 말고기집.. 이런 말까지 다 갖다 붙일 거지?, 관둬라. 그래, 아무도 찾지 않는 공원이니 작은들 큰들 어떠하리. 그만 투덜대마."
힐끗 성수 쪽을 쳐다보던 기범이가 물었다.
"웬일이야. 토요일마다 바쁘다던 녀석이, 뜬금없이 호출이라니.."
"그러게. 왠지 아침에 눈을 떴는데, 네 생각이 나더라. "
"어제도 봤으면서 무슨. ..다른 이유가 있잖아. 말해봐. "
그런가, 이유가 있던가. 내가 모르는 나는 참으로 많고, 나 자신보다 주변 사람이 먼저 발견해주는 것도 많으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오늘 기범이에게 연락한 이유라는게 있기는 한건가.
"..없는 이유를 만들어낼 수는 없어. 만약 좀 시간이 흐른 다음에 내가 그 이유라는게 있었음을 알게 된다면 얘기해줄게. 오늘은 그냥 부른거야. 어제보다 더 가슴이 먹먹해서 ."
"그래. 네가 좀 심하게 둔하기는 하지. 특히 자네 감정에는 더욱 말이야. 그럼 즐겁게 기다려보기로 할까. 자네가 찾아낼 게 분명한 토요일 오후의 평범치 않은 행동의 이유를.."
그러고보니 성수는 언제나 몇 걸음 정도 행동보다 생각이 더디게 오는 편이었다. 별 생각없이 주섬주섬 우산을 챙겨들고 나간 후, 한참만에야 깨닫는 것이다. 누나가 우산을 안 챙겨 갔는데, 그날 비가 온다고 했음을 말이다. 우산을 전해주러가는 버스 안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겨우 알아채는 조금은 느린 생각.
"생각이 거북이인게 나아. 행동이 거북이이면, 손 쓸 수 없을 때가 많잖아. 비는 이미 내릴 것이고, 감기에 쉽게 걸리는 누나는 한 달은 족히 앓아누워 있을거야. 네가 생각이 느린게 얼마나 다행이야. 무의식적으로나마 움직이는데."
그러게. 아카식 레코드가 작동하고 있는 거야. 무언가 기록되고 있어. 그런데, 성수는 그게 무언지 정말 지금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제와는 분명 다른 오늘의 세상이다.
"그렇다면 말이야.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볼래? 길이 정말 변하고 있어. 누군가 뚝딱뚝딱 공사를 해서 그런게 아니라, 길이 변화하고 있는거야. 스스로. 그걸 내가 혹은, 내 무의식이 감지하고 있는 거라고. "
기범은 좀 걱정스러운 눈으로 성수를 쳐다보고 한 마디했다.
"나를 만나 수다를 떠느니, 잠을 자는게 어때? 사우나에라도 가서 땀빼고, 잠을 청하자. ..아, 저기 있네. 네가 종종 들른다는 촌스러운 이름의 사우나. '청마'"
무슨 60년대 담배 이름이냐고 늘 기범이 녀석이 투덜대던 그 사우나가 저 방향에 있었던가. 성수는 자꾸만 도망다니는 길을 '탁' 눌러놓고 생각을 반듯하게 펼 여유가 필요함을 느꼈다. 사우나는 저 방향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약국 건물 윗층이 '청마'다. 그런데 지금은 길 건너편 3층에 그 '청마'가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길이 성수 자신과는 아무런 협의도 없이 세상 모든 사람과의 협의 속에서 자리를 이동하고 있다. 기범이도 그 이동에 동의한 세상 사람들 중 하나인게 분명하다. 왜냐 하면 녀석과는 벌써 다섯 번도 더 넘게 약국 2층의 '청마'에 다녔기 때문이다. 길 건너의 '청마'는 일상이 아니다. 어긋나 있다.
2. 어긋나다.
"이봐, 난 너하고 '청마'에 간 적이 없어. 네가 '그건 저기에 있어.'라고 몇 번 손으로 가리켜 준 적은 있지만 말이야. "
기범이 가뜩이나 작은 눈을 실핀처럼 가늘게 뜨고 성수를 쳐다보고 있다.
"누구야, 불어. 나 말고 사우나 가자고 할 사람이 있기는 한거였어? 그럼 괜히 늘 챙겨주고 있었네. 혼자 놀다가 우울함에 푹 빠져버릴까봐 언제나 한걸음에 달려와 주었더니."
기범이의 넉살 좋은 말을 들으면서 성수는 아무래도 약국 2층을 확인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가보자. 약국 2층이 '청마'였어. 그리고 그건 너와 다닌 곳이 맞아. 아무래도 이상해. 너도, 길도, 세상도."
"가는거야 어렵지 않지만, 약국 2층은 가정집이야. 늘 그곳에서 버스를 내리고 있잖아. 약국 주인 부부가 산다는 그 집. 산세베리아가 햇살을 너무 받아서 시들거리는 그 베란다의 집. 오늘도 시들거리는 산세베리아를 확인하고 왔는걸."
성수는 기범의 손을 잡아끌고 약국 쪽으로 향했다. 2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어야 할 약국을 6분만에야 찾아낸 두 사람. 아, 그런데, 그곳은 버스 정류장의 그 약국이 아니었다. 2층은 사우나도 가정집도 아니고, 엉뚱하게도 슈퍼마켓이었다. ''청마' 슈퍼'
"장사 참 안 될 것 같다. 어떻게 2층에 슈퍼가 있냐. 누가 물건을 서러 2층까지 올라가. 엘리베이터도 없어 보이는구만. "
이런 태평한 소리를 하는 기범에게 성수가 말했다.
"핵심은 그게 아니야. 2층에 '청마 사우나'도 가정집도 없다는게 핵심이야. 그러고 보니 너, 버스정류장 봤어?"
"어, 그러고 보니 이 방향이 아니었나? "
눈을 껌뻑이는 기범을 보다가, 슈퍼를 보다가, 약국 안을 우연히 들여다 보게 된 성수는 깜짝 놀라게 되었다.
"아, '청마 사우나'의 아주머니다. 약사 가운이라니. 언제 약사가 되신거야. 우리 나라는 약사가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는 곳이었니?"
성수의 말에 기범은 약국을 흘낏 보더니
"약사처럼 생겼구만, 무슨 말이야. '청마' 사우나 주인이었다고? 투잡인가보다."
라고 말했다. 마치 2층 가정집이 슈퍼가 되었어도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약국 주인이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졌는데도 말이다.
"농담이 나오니? 들어가 보자. 나를 기억하실지도 몰라."
잘 닦인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억속의 모습보다 상당히 젊은, 20살 정도는 젊어보이는 '청마'의 주인이었음이 틀림없는 약사 가운의 여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3층 빌라 청년. 어쩐 일이야. 오늘도 배탈이 난거야?"
아, 성수가 자주 다니던 약국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이 기억에 남아 있지 않는데, 뭔가 이상하다.
"안녕하세요. 아무래도 제 머리가 이상해졌나봐요... 혹시, '청마'의 아주머니 아니세요?"
이 말을 들은 약국 가운의 여자는 손가락을 들어 천장 쪽을 가리켰다.
"올라가봐."
"네?"
"슈퍼 말이야. 올라가봐. 머리가 이상하면 슈퍼에 가봐. 뭐든 다 있어."
머리가 이상하다는 사람에게 병원을 소개하는 것도 아니고, 약을 지어주는 것도 아니고, 2층 슈퍼를 가리키는 약사. 성수와 기범은 약국 계단을 통해 2층 슈퍼로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높아도 40계단 이상이 되지 않을 텐데, 200계단을 올라도 2층에 도달하지를 않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드래곤 볼의 '신님'이 사는 곳인가보다. 올라도올라도 끝이 없어. 체력테스트인가봐. "
기범의 말에 성수가
"만화에서처럼이라면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길이 열리겠지. 설마, 저도 계단인데, 언젠가는 끝이 있지 않겠어."
그리고 다시 200계단을 더 오른 다음 드디어, 2층 문에 도달하고, 손잡이를 돌리자 슈퍼라는 곳이 나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슈퍼라는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간판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 안 하나 보다. 문 닫혀있잖아. 슈퍼가 참 개성 넘치시네. 2층에 올라앉아 있지를 앉나. 문을 닫고 있지 않나."
태평한 기범의 말을 뒤로 하고, 성수는 슈퍼 문의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삐익~'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소란한 계산기 소리가 철컹거리는 슈퍼가 눈 앞에 펼쳐졌다. 그건 참으로 이상한 느낌의 슈퍼마켓이었다. 각양각색의 노트를 손에 든 사람들이 계산대를 향해 줄을 서 있고, 계산원인 듯한 사람들이 노트를 들여다보고, 무언가 끝없이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철컹철컹철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