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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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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나를 가두다

히카루 조회 2,95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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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에게나 슬픈 날들은 존재한다. 일생을 두고 슬프지 않은 날들을 따져 본다면 대체 며칠이나 될까. 하루를 놓고 우울하거나 서글픈 시간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일생이 참 오래 '슬픔'을 짐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느 아침 눈을 떴을 때, 인수는 자신이 심한 슬픔 속에 있음을 발견했다. 그건 현실 속 어제 일 때문이 아닌, 비현실 속 꿈 속의 일 때문.
 "무서운 꿈을 꾸었어."
 드물게 아침 일찍 수화기를 들어 성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떤 내용인데?"
 일찍 잠이 깨었다는 성원이는 아직 잠자리에서 데굴거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갇힌 꿈."
 "흠, 누가 너를 가두었니?"
 "아니, 처음부터 갇혀 있었어."
 인수는 꿈의 생생함에 머리가 어질했다.
 "출구는 찾아봤어?"
 성원이의 여유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하지만 같이 있던 많은 사람들이 출구를 찾아 어디론가 나갔어. 그러니 마음만 먹는다면 나 역시 다른 이들처럼 밖으로 나갈 수 있었을 거야."
 "그럼 너 역시 갇힌 곳에서 발을 움직여 밖으로 나왔어야지."
 "하지만 그곳 물이 맑았어. 밖은 흙탕물일지도 모르잖아."
 "그럼 슬퍼하지 말아야지. 네가 선택해서 갇혀 있는 것인데."
 "누군가가 같이 있었다면 그랬을 거야. 그런데 마지막 사람이 그 곳을 떠나 돌아오지 않고 나 혼자 남게 되었을 때, 갑자기 무서워졌어."
 인수는 가슴이 어제 밤처럼 답답해짐을 느꼈다.
 "내가 무서움이라는 걸 느끼자 갑자기 내가 있는 곳이 좁아지기 시작하는거야. 무척이나 넓었던 공간이 순식간에 침대 하나 만큼의 크기로 졸어들어버렸고, 난 정말 슬퍼져버렸어."
 인수의 말을 인내심있게 듣고 있던 성원이가 말했다.
 "네가 너를 가둔 건 누구도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거야. 네가 그 맑은 물의 공간을 나와 흙탕물일지도 모를 사람들의 공간으로 들어간다면 무언가 변화하겠지. 그게 좋은 쪽인지 나븐 쪽인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이건 확실해. 네가 움직여서 변화를 찾지 않는다면 넌 맑은 무서움과 슬픔 속에 언제까지고 담겨 있어야 해. 워터볼 세상처럼."
 
 전화를 끊고,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사 두었던 워터볼이 놓여있는 곳으로 인수를 걸음을 옮겼다. 맑은 것처럼 보이는 스노우볼 속 세상. 태엽을 감아주면 때로 맑은 것처럼 들리는 단조로운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때로 눈처럼 보이는 것과 금가루처럼 보이는 것들이 흩날린다. 그 곳은 '무음'의 세상이다. 워터볼 속에 요정이 하나 살고 있다. 투명 크리스탈 요정으로 날개를 달고 있다. 하지만 결코 그 날개를 사용할 수는 없으리라. 워터볼은 정수된 물과 글리세린과 그리고 미리 정해진 몇몇 장치 이외엔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날개짓을 할 만큼 넓지도 않고, 유리를 깨고 나올 만큼 그의 날개가 그리 강하지도 않다.
  워터볼 속 요정은 그냥 투명한 크리스탈 덩어리다. 그에게 자유는 없다. 꿈속의 인수 자신이 그랬다. 침대만큼 작아졌던 공간이 일순 워터볼 속 세상만큼 줄어들어버렸다. 더는 견딜 수 없다. 선택하지 않으면 인수 자신은  오래오래 슬플 것이다.
 투명하게 춤을 추는 것 같은 워터볼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작은 망치도 손에 쥐었다.
 '톡톡.'
 계란 껍질을 깨듯 조심스럽게 워터볼을 두드려 부수어본다. 바닥에 내동댕이 치면 요정마저 위험하다. 그건 보다 슬픈 일이 될 것이 틀림없다. 힘겹게 조금은 끈적한 물이 흘러나오고, 워터볼의 둥근 세상이 기괴한 모양으로 변하였다. 요정은 아직 안에 존재한다. 
 
 오후, 전화 벨이 울린다.  성원이의 번호가 깜빡이고 있다. 
  "나와라. 네 맑은 방 속에서 나와야 숨을 쉬지."
 전화를 끊고, 물이 없는 워터볼을 다시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는다. 외출을 했다 돌아오면 이 속의 요정은 사라지고 없을까.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 그 날개를 사용해서 자신이 모르는 세상 어딘가로 날아가는 것일까. 

 성원이와 오후 거리를 걸으며 요정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언제나처럼 진지하게 듣고 있던 성원이가 한 마디 했다. 
 "요정이 너라고 생각하는 거냐?"
 "겹쳐보이는 때도 있어."
 "아서라. 애초부터 생명이 없던 것과 자유의지가 있는 너를 동일시하는 건 문제야."
 "그래도 혹시 알아? 집으로 들어섰을 때 창을 통해 날아가는 요정의 눈부신 날개짓을 볼 수 있을지."
 성원이는 현명하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과묵한 만큼 눈빛이 깊다. 
 "요정이 날아가는 걸 본다면 나에게도 알려줘. 그건 꽤나 가슴 두근거리는 일일테니까."
 
 성원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 한참을 걷고 걸어 집에 도착하고,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서도 인수는 애써 책상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어떤 결과이든 두렵기 때문이다. 
 그날 밤 꿈 속에서 인수는 여전히 맑은 것처럼 보이는 물 속에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이내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가 버리고, 마지막 남아있던 사람도 그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그가 인수를 돌아보며 묻는다.  
 "이 곳에 남을거니? "
 무언가 웅웅거리는 소리. 
 "여긴 물이 맑아."
 "그 맑음이 너를 숨쉬지 못하게 만들지도 몰라."
 그 말을 남기고 그날의 마지막 사람이 어디론가 가버렸다. 인수는 다시 좁아지는 세상을 느끼고, 그리고 두려워졌다. 발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둘러보았다. 어딘가로 통하는 통로가 있어 저 먼 곳에서 빛이 흘러들고 있다.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이 곳은 물이 맑아.'
 인수는 여전히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있다. 그 때, 크리스탈 요정이 또로록거리며 귓전에서 말을 한다. 
 "네가 나가지 않으면, 나 역시 움직일 수 없어. 변화를 선택하는건 내가 아니라 너야. 워터볼을 깬다고 해도 네가 변화하지 않으면 난 무엇도 할 수 없어. 애초에 자유의지는 내가 아니라 너에게만 주어진 거야. 여긴 조용하고, 먼지도 없고, 이제는 소리도 없어. 하지만 그래서 생명도 없어."
 인수는 발길을 옮기게 될까. 이제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크리스탈 요정(그는 인수에 의해 물 속 세상을 잃었다)과 변화없는 세상에 집착하는 인수라는 한 사람. 대체 다른 사람들이 향했던 저 너머의 세상은 어떤 형태일까. 맑은 것처럼 보이는 물길을  헤짚고 인수가 어딘가로 움직이려 한다. 찰박찰박.

 그리고 아침,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 성원의 번호가 깜박인다.

                  

                                        peace and happy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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