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 이야기
특별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길 위에 전봇대 하나가 서 있었다. 앞서 말했듯 너무나도 평범한 이 전봇대에게는 당연히 그림자도 붙어 있었다. 삐쭉 크기만 하고 이리저리 뜯어보아도 멋스러울 것이 없는 그림자였다. 전봇대는 자신의 밋밋한 그림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때로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거리를 지나는 많은 존재들을 자신의 그늘에 붙들어놓고 싶어했다.
전봇대는 폭우 쏟아지는 날이 싫었다. 왜냐하면 거리를 지나는 대부분의 존재들이 종종걸음을 치기 때문이다. 어딘가 자신이 향할 수 있는 장소가 있는 듯, 앞뒤양옆 어디도 돌아보지 않았다. 지친 듯 터벅거리는 사람도 드물었다. 폭우 쏟아지는 날은 날씨가 세상을 지배한다.
어느, 해가 쨍쨍하여 사람들이 날씨 이외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에 충분한 날, 전봇대는 문득 밋밋한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너, 막대기냐?”
라고 투덜거렸다.
“이봐, 봇대. 자네가 좀 큰 막대기잖아. 자신이 생긴 것을 기억해야지, 왜 정직한 그림자를 가지고 야단이야. ”
그림자 주제에 말은 잘 한다. 전봇대 허락도 없이 어디서 그런 말재간은 배웠을까.
“응용 가능한 그림자가 될 수는 없냐? 왜 있잖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말고, 하다 못해 뽀샵처리라도 하면...”
“바랄 걸 바래. 세상은 정직하게 사는 게 남는거야. 자기 정체성에 순응하길 바래.”
그래서 전봇대는 그림자의 말대로 정직해지기로 했다. 그림자가 마음에 안 들면 바꾸면 되는 것이다.
아, 저쪽에서 걸어오는 사뿐한 걸음. A라인 스커트를 입은 젊은 처자다. 마침 옷에 어울리는 힐을 신고 있다. 틀림없이 전봇대 앞에서 멈춰설 것이다.
“으, 발 아파. 뒤꿈치가 남아나질 않겠군.”
전봇대를 짚고 선 A라인 처자. 발이 아파 신발을 고쳐 신고 있다. 흠, 전봇대는 그림자를 내려본다.
‘어설픈 촛대처럼 보이는군.’
이내 A라인 처자가 갈 길을 가고, 이번에는 리어카를 끄는 중년의 아저씨가 다가온다. 그는 그냥 지나갈 것이다. 전봇대는 휴식을 취하기에는 그림자의 넓이가 넉넉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번에 오는 이는 유모차를 끌고 있다. 할머니라면 틀림없이 멈추는데, 역시 할머니시다.
“에구에구 허리야.”
전봇대를 짚고 선 할머니와 유모차. 이건 또 무슨 모양이지? 인형극에 나오는 병정 같은 느낌이군. 다시 할머니와 유모차가 지나간다.
‘이번에는...’
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림자가 말을 붙인다.
“이봐, 그래봤자, 자네 그림자는 아니잖아. 그냥 생긴대로 살지.”
“지나가버리니까 재밌는거잖아. 너도 좀 즐겨봐. ”
전봇대의 무심한 말에 그림자가 슬프다.
“지나가 버리는 건 서글픈 거야. 돌아오더라도 처음의 모양은 아니니까 말이야. 너는 방금 지나간 A라인 처자와 유모차 할머니의 촛대 같고 병정 같은 모습을 기억할 거야. 그리고 그들은 언젠가 다시 이 길을 지나가다 멈춰서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건 그들의 지금 모습이 아냐. 시간이 지난 다음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야. ”
전봇대는 그림자가 세상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살려는 건 아닌지 궁금해졌다.
“이봐 내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인 한 내 그림자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 때로 전단지가 붙어 오래 나풀거리기도 하지만 그건 내 본 모습이 아니야. 곧 도시 미관을 중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떼어내어질 테니까. 그래도 가끔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는게 뭐가 나빠? 그건 이내 지나가 버리니까 지나가버리는대로 좋은 거잖아. ”
전봇대와 그림자는 가치관이 다르다. 하지만 이건 정말 다름의 문제일 뿐 옳고 그른 것과는 차이가 난다.
거리에는 수많은 전봇대가 있고, 전봇대의 그림자가 있다. 함께 있는 것 같지만 별개의 것일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전봇대의 모습이 길쭉한 한, 그림자의 모습도 길쭉이다. 때로 구름이 지나가다 왕관을 씌워주기도 하고, 새가 날아가다 UFO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지상의 것들 중에는 A라인 아가씨와 유모차 할머니와 리어카 아저씨 그리고 또 다른 움직이는 것들이 전봇대의 모양에 다양성을 더해주기도 한다. 이것이 현실이고, 전봇대와 그림자가 어떤 것을 선호하든 그것은 현실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비정상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 사는 방법은. 별 것 없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자가 나와 공존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기꺼이 내 의견을 말한 뒤, 상대방의 의견 역시 흔쾌히 귀담아들어주는 것뿐이다. 뭐, 자신의 생각을 굳이 바꿀 필요가 있겠는가. 자신이 믿고 추구하는 바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단 나는 전봇대이고, 너는 그림자이며, 그림자가 전봇대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된다. 같이 있지만 결코 같은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평범한 길 위에 오늘도 많은 것들이 지나다닌다. 각자 자신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때로 다른 것과 겹쳐져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본래의 자신만을 원한다고? 그럼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라. 이내 본래의 자신과 그 자신의 그림자일 것이다. 그 이외에는 순간의 변화를 만끽하라.
peace and happy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