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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18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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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그날의 봄 - #7 겨울

그냥그런 조회 4,75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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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살 남짓의 한 남성이 부장 자리에 앉아 있다.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부터도 계속 이어진 버릇인가?
정현태라는 이름이 적힌 사원증을 목에 매고 있다.


멍하니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다.
턱을 손에 괴고 곰곰이 앞만을 응시하며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50이 가까워짐에 그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명예퇴직을 권고받았다.

사실 그는 명예퇴직을 돈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이라면 그의 특출난 재능과 노력에 주식으로 벌어둘 대로 벌어뒀기에
하지만 그는 수연과의 이별 후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
고로 자신의 가정은 고사하고 남은 가족도 별로 없었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그렇게 신경 써서 관리하지 않았다.

지금껏 정말 정신없이 살아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왔는지
이렇게 허무하게 퇴직한다는 사실이 뭔가 그의 마음 한편에 걸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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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가 1시간 같이 더디게 흘러가는 때가 있으면 1시간이 1초같이 지나갈 때가 있다.
어쨌든 간 어김없이 시간은 흐른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가을이 완벽히 물러가고 겨울이 그 자리를 꿰찼다.
거의 매일같이 지겹도록 내리는 눈.
하얗게 칠해지는 도로와 집 그리고 나무들


무엇보다도 진짜 겨울이구나 실감하게 해주는 쌀쌀한 날씨.




소년과 같이 짜장면을 밥으로 먹은 지 1달이나 지났다.
여전히 정말 너무 춥지 않다면 일요일은 항상 공원에 나갔고
매 번은 아니지만 소년도 자주 만났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때 소년에게 얻어먹은 짜장면 값을 돌려줄 차례다.


화요일 오후 7시에 우리 집으로 오라고 했다.




한창 일 할 때에 나는 혼자 살았기에 지루함을 날릴 일을 항상 찾아다녔고
만만하게 요리였다.
그것은 나름 재미있어서 꽤 열심히 했었다.


그리고 그 실력은 여전하다.




이제 슬 올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7시 04분 시계의 분침은 5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똑 똑


"할아버지 "

분침이 딱 5를 맞춘 순간 소년이 왔다.

" 그래 들어오려 무나 "


"하하, 오랜만에 뵙네요. 요즘 날씨가 많이 추워졌죠? "


"그래, 진짜 겨울이 온 거 같구나."




이런저런 간단한 안부 같은 얘기를 나누고 나는 부엌으로 들어섰다.
냉장고에서 미리 다져놓은 김치와 양파 갖가지 야채들을 꺼내고 냉장고 문을 닫는다.



탁!


아 계란을 안 꺼낸 것 같다.

다시 문을 열고 계란을 꺼내려는데
2개를 꺼낼까 3개를 꺼낼까.. 묘하게 고민된다.


2개는 너무 적을 것 같고 3개는 또 너무 많을 것 같고.

그래도 적게 해서 못 먹는 것보단
많이 해서 많다 싶으면 더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3개를 꺼낸다.


미리 예열시킨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치이익


그 위에 밥을 올린다.


소리 좋고,


1분 정도 약한 불에 볶다가


야채와 김치를 넣는다.


치이이익



그래 이 냄새지

뭐 비록 옛날과 김치의 맛이 똑같지 않다는 게 흠이지만

아차차


계란을 먼저 했어야 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뭐 중요한 것도 아니고

한 10분쯤 지났을까.
시계를 보니 21분이다.


완성된 요리와 밑반찬을 식탁 위에 올렸다.


"와, 요리 정말 잘하시네요 하하 정말 맛있어 보여요 "


"그래, 누가 한 요리인데? "


"하하, 잘 먹겠습니다."




반찬 위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젓가락
밥그릇과 입을 오고 가는 숟가락



나름 행복한 10분이 지났다.


밥을 다 먹고 반찬을 같이 정리하면서 소년의 얼굴을 얼핏 보았다.
뭔가 근심이 어린 표정이었다.


짝사랑하던 소녀에 관해서는 고백해서 잘 되고 있다고 그때 짜장면을 먹으면서 들었다.


그런데도 근심 어린 표정을 짓는 걸 보니
그 어연 옛날 내가 본 근심의 진정한 원인은 짝사랑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짝사랑은 단지 둘러대기 위한 일종의 스페어같은 고민거리였던 것이다.




물론 그때 서로 잘 알지 못한 사이였으니 진짜 고민을 털 순 없었을 것이다.


나라도 그랬겠지.


그럼 이젠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젠 내가 진짜로 들어줘야한다.

" 자네...."

"네?!"



한결 낮아진 목소리에 적지않게 놀라며 대답한다.


"그때 말한 짝사랑은 진짜 고민이 아니었지?"

"...."


" 이젠 말해줄 수 있지 않은가?"


"....."


"숨겨서... 죄송해요 ... "

" 괜찮아, 다 이해한다. "




그 1시간 같은 1초와 같이 흐르지 않을 것같이 무디게 흘러가는 얼마간의 정적 이후, 소년은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날 소년과 공원에서 처음 만난 날


그에게서 묘한 이끌림을 느꼈던 것은 알지는 못했지만
나와 비슷한 면이 있지 않아서 였을까?


화려하게 꽃을 피워내야 할 청춘의 끝 무렵에 갈팡질팡하며

꽃을 피워내지 못한 나와 같이 그 소년 또한 꿈과 현실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기에 자신의 꿈을 줄곧이 숨겨왔던 그는
청춘의 끝 무렵이자 진정한 삶의 시작인 그 시발점 위에 서서 발을 옮기길 망설이고 있다.



문제는 숨긴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숨기면 숨길수록 더욱 강해지고 강해져
결정적인 순간 그 머리를 들이밀고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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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와 거실 불을 켰다.
9시 남짓
명예퇴직.
꿈도 버리고 아니 현실에 그 답답하지만 안정적인 그 느낌에 파묻혀 이상을 좇길 포기했던

그간의 삶 동안 해왔던 이 일마저 이제 하지 못하게 되니
갑작스레 기분이 묘해진다.


50중반의 나이에 이제 와서 이상을 좇는다? 꿈을 좇는다? 당치도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지친 몸뚱어리를 끌다시피 이끌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넥타이는 풀리는데 어째 머릿속은 더 복잡해지는 것 같다.



꿈을 택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고
꿈과 이상마저 버리고 현실을 택한 순간이 있었고
그렇게 둘 다 버렸음에도 내 이상에 도전해 볼 수 있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난


꿈을 택하지 않았고
현실 속에 파묻혔으며
정말 천금같이 찾아온 기회에 도전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렇게 애써 차가운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왔건만
막상 이젠 그 현실에서의 일조차 끝난다니


허무맹랑하다.



세상을 바꾸자 했던 그 열정에 가슴이 불탔던 그럼에도 우주를 꿈꿨던

십 대의 소년의 마음은 지금에 와서 어떠하게 변하였는가


꿈을 포기한 날, 하지만 온전히 포기하지 못한, 그 꿈이 사라진 공간엔 공허가 찼고
이상마저 포기한 날, 하지만 역시 온전히 포기하지 못한, 그 이상이 사라진 공간엔 또 공허가 찼다.


그리고 마침내 현실에서의 일조차 끝난 이 순간.


이제 늙어버린 소년의 아니 중년의 마음에는 정말 공허밖에 남지 않았다.



편의점에 갔다.

부질없지만 아무리 채워봐야 결국 아래로 흩어질 뿐이지만

애초에 그 공허를 채울 목적이 아닌 잠시 잊을 목적이기에 상관없다 생각했다.


날이 새도록 마셨다.


그 간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세월만큼 무의미하게 술을 흘려보냈다.

오늘이 금요일임에 작은 고마움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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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년의 고민을 들어줘야 한다고 자신 있게 생각했지만
난 아직 답을 찾지 못 했다.
난 그것으로 고민했고 언제가 끝날 것 같던 그 고민은 결국 끝나지 않았고
난 결국 그것과 싸우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난 이 소년에게 나도 내지 못한 답을 내줘야 한다.



소년에겐 여름은커녕 가을조차 없다고 느끼겠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삶의 봄이 끝나고
바로 겨울이 왔을 거라 느낄 것이다.

꿈과 현실 사이를 선택해야만 하는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봄조차
끝나버렸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나도 겪어본 그리고 넘지 못한

혹독하고 매서운 바람이다.



정말 미안하지만.
난 지금 소년에게 답을 줄 수가 없다.


하지만


답을 내줘야만 한다.



인생의 끝 무렵, 가끔씩 나에게 왜 이런 새로운 인연이 왔는가 고민해봤다.
이제 인생의 마무리만을 남겨둔 그 어느 것 하나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갈팡질팡했던 삶의 끝에 서있는 나에게 이제 막 시작하려는 젊은 삶과의 인연이


난 참 묘했다.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난 비록 그 선택의 기로에서 매번 갈팡질팡하며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끝마쳤지만
이 소년은 그 갈팡질팡을 막을 수 있다.

그것이다.

지금 헤매고 있는 이 소년에게
헤매버린다면 언제가 마음속 공허가 생길 이 소년에게

난 그런 결과를 그 비참한 끝을 그 소년에게 주지 않기 위해
그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통해 소년을 만난 것이다.


비록 오늘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끝없이 고민할 것이다


1초를 1시간처럼 보내며 반드시...



" 자네, 내 정말 미안하네... "


".. 네?"


"이 늙은이에게... 하루만 줄 수 있겠는가? "


"네! 죄송해요.. 걱정 끼쳐드려서.. "


" 아니, 미안해하지 말게. 내 반드시 그 답을 내일 자네에게 줄 걸세. "


"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그럼.. 내일 뵐게요.."


" 그래.. 밤이 늦었으니 조심히 들어가게나 .. "

"네! "


끼익 탁




일생 동안 풀지 못한 답을 하루 안에 풀어야 하는 상황에서 착잡한 마음을 가지고 잠자리에 든다.

지 긴 밤이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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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고 내 자리에 가 앉았다.
우리 회사에는 알리움이라는 꽃이 있는데
생긴 게 예뻐서 샀다.

근데 알고 보니 꽃말이 끝없는 슬픔 이더라..

그 아름다운 자태에 슬픈 속 사정이 숨겨져 있다 생각하니
뭔가 씁쓸하기도 하고 끝없는 슬픔이라는 꽃말이
어째 지금 내 상황과 비슷한 거 같아 동질감 같은 것도 느껴졌다.



사직서를 썼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짐을 챙겼다.



그리고 부탁 하나 했다.


저 알리움은 내가 가져가도 되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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