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맑음(2)
“화분 같은 거야. 사랑도 살아서 숨 쉬는 거라니까. 그냥 좀 우량한 화분이 있고, 어떤 화분은 좀 작게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어떤 화분이라도 열심히 물만 주면 괜찮아.”
그는 30분 째 친구를 설득하고 있다. 결혼을 두 달 남겨둔 친구가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했다.
시발. 머릿속으로 욕이 나왔지만 그래도 태연한 척 앉아있었다. ‘사랑? 지랄하내 네가 사랑을 아냐?
그냥 네 부인보다 반반하게 생겼지. 젊지. 몸매 좋지 하니까 연애 한번 하고 싶겠지. 아니 한번 자고
싶은 거겠지. 근데 그게 성욕이라고 해버리면 네가 너무 짐승 같으니까 사랑이라고 한번 포장하는
거지.’그의 머릿속과 입은 아까부터 쉼 없이 멀티플레이 중이다. 친구가 고개를 숙이면 두 눈으로 친구의
정수리를 내려 보다가 친구가 고개를 들면 대신 그의 눈동자는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 잠깐 스쳐지나 가는 거겠지?”
친구가 구부려진 어깨로 잔속에 눈빛을 던지며 말했다.
“야야, 내가 장담하는데 니 1년 지나고도 그 여자가 그렇게 그리우면 내가 니 차 사줄께. 아무리
튼튼하게 태어난 화분이라 해도, 한 1년 물 안주고 놔두면 다 말라 죽는다니까? 대신에 제수씨한테는
열심히 물 부어주고. 그러면 그 화분이 더 싱싱하게 자란다니까.”
“그래, 내가 더 잘해야지. 근데 미치겠다. 진짜 미치겠다”
친구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는 한참을 ‘내가 미친놈이다. 내가 미친놈이야’라며 자책했다.
“뭘 또 그렇게까지 자책하나. 원래 사람들 결혼 전에는 다들 그런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 뭐 신부,
신랑 도망가는 증후군 그런 것도 있다고 하더라고.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나중에 한번 찾아봐.
진짜 있더라.”
“그래 고맙다. 근데 너 결혼식 때 사회 보기로 한 거 기억하지? 장모님이 사회 잘 봐야 한다고 걱정
하시더라.”
“그래 오버안하고 잘할 테니까 걱정마라.”
그는 무의식적으로 욕이 나올 뻔 했던 상황을 잘 넘겼다.
“근데 나 그 여자 너무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을 그녀에게 한 번도 건네 본 적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와 헤어지고 난 뒤
무던히도 자신의 감정을 해체시켜 보았던 그였다. 도저히 견디지 못할 그 공허함, 결핍이 대체 무엇
때문이지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유욕일까. 성욕일까. 위로 받는 것이 즐거웠을까.
연애라는 행위에 즐거움이 있었을까.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 비어있는 그 자리를 서둘러 메꾸고 싶어서였다.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전부터 자신을 따라다니던 동기에게 서둘러 고백하고 빠르게
연애했다. 진도도 팍팍 나갔다. 습관적으로 사랑한다 말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대체 무얼
대변하는 명사인지도 모르면서 그의 입은 기계적으로 사랑이라 말했다. 경험적으로 축적된 연애들을
쏟아내었다. 외로움은 때로 해소되었고 성욕도 때로 해소되었다. 행복이라 불리는 이미지 컷들을
관찰하고 열심히 수집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밥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하루만지나면 다시 배가 고팠으니까. 내심 새로운
여자친구를 원하지 않게 되면 어쩌나 억지로 연기라도 하게 될까 걱정했는데, 때가되면 외로움이
밀려왔고 때가 되면 성욕이 자신을 깨워주었다. 꾸준히 자라는 손톱을 깍듯이 그렇게 자라나면
깎아내고 자라나면 깎아냈다. 다행이었다.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손톱은 저절로 자라났고, 깎고 싶어
죽겠을 욕망이 꾸준히 재생되었다. 필요할 때 사랑이라 말하고 견딜만할 때는 바쁘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기고 간 결핍은 때론 채워지는 듯 했으나 틈만 나면 그를 괴롭혔다. 일상적이던
삶에 남겨진 특별함이 그에게 고통이 되었다. 한 번도 불행한 삶이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삶이
너무 불행하다고 느껴졌다. 단 한번 달콤했던 순간은 나머지 삶을 평범에서 불행으로 전락시켰다.
“이 기사 봤어?”
멍하게 앉아있던 그에게 여자친구가 물었다.
“이번에 일어난 엽기 살인 있잖아. 그거 남자가 바람나서 애인이랑 같이 공모해서 자기 부인 죽인거래.”
그녀의 여자친구는 스마트폰에 눈을 두고 하나하나 기사를 읽어갔다.
“맙소사. 그 여자 인터뷰가 가관이네. 잘 들어봐.”
이번에 일어난 엽기 살인의 가해자는 불륜의 남녀였고, 남편은 이혼해주지 않는 부인을 애인과
공모하여 계획살인 하였다. 그리고 범행이 발각되자 남편은 도피했고, 경찰에 붙잡힌 불륜녀는 왜
그랬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사람이 내 생에 마지막 남자라고 생각했어요.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그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