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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1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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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맑음 (1)

큰샘 조회 2,55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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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


문자를 확인하고 그는 잠시 멈칫했다.

잠시 후 의도와는 전혀 다른 문장들을 손가락이 꾹꾹 눌러댔다.


'그래, 너도'


‘그때 집 앞에 찾아가 술주정이라도 부려볼걸,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볼 껄.’ 이제 서야 그는 

후회하지만 이제는 늦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늦었음'이라고 생각했던 처음의 그 순간에는 그다지 늦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정말 

늦어버린 것 같다는 의미다.


‘그 날 저녁, 휴가 나온 후배를 따라 클럽에 있지 않았다면, 늦게라도 그녀의 집 앞에서 얼굴이라도 

비추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까. 클럽에서 그녀를 소개시켜준 친구가 의문스러운 경고를 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졌을까. 그녀의 방에서 몰래 본 휴대전화에 캐묻고 싶은 메시지를 보지 

않았다면 또 달랐을까. 처음으로 다투던 그날 밤, 그냥 그 날 하루만 보지 않고 지나쳤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그는 독서실 옥상에 앉아 몇 백번이나 우려먹은 후회를 우려내며 머리를 식혔다. 그리고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작은 방, 창가 쪽으로 누여져 있던 침대와 그 옆에 

놓여있던 작은 책장과 그 위의 향수들. 향수 냄새는 머리가 아파 질색이었지만, 자기 전 잠옷대신 

향수를 뿌린다는 그녀를 위해 태어나 처음으로 향수를 구매하기로 결심했던 그였다. 

침대위에 누워 잠든 그녀의 얼굴이 너무 생소했다. 어떤 그림보다 풍경보다 아름다워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검지를 가만히 대어본다. 이마 정중앙에서 시작해 부드럽게 아래로 검지를 내리며 더욱 자세히

그녀의 얼굴을 관찰한다. 그러자 가슴 안에 무언가 벅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의 마음이 심장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뻔히 알고 있음에도, 심장 쪽에서 무언가 ‘뭉클’하는 신체적 감각을 그는 느낀 

것이다. (상상한 것이 아닌 외부의 자극으로서)

어느새 코, 입술, 턱에 이르자 그녀가 눈을 떴다. 깜박이는 눈을 바라본다. 같이 눈을 깜박여 본다. 

자꾸만 웃음이 나와 실없는 농담을 던지고 침대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는 허공에 손을 뻗어 

손을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한다.


“뭔가 잡힐 것만 같아.”


지금껏 살아오며 한 번도 느껴지지 않았던 그 텅 빈 공간들이 지금은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알 수도 없는 것들이 자신의 몸을 감싸고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길을 걷던 

그날 밤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빈 공간속에 조용히 채워져 있던, 투명한 액체들을 느꼈다. ‘어떻게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을까.’ 4월 중순, 이제 막 봄이 익숙해지던 그 날 그녀와 길을 걷고 있었고, 그는 

이제 막 세상에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모든 것이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길에 쏟아지는 가로등의 황금빛 줄기가 피부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손등에 내려앉은 조명이 신기해 

그는 손을 뒤집어 보았다. 그리고는 손바닥에 가득한 빛들이 잡힐 것만 같아 천천히 손을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해보았다. 앞뒤로 흔들리는 팔은 물속을 유영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이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 자기도 모르게 걸친 옷들을 다 벗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손바닥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었다.


“너무 좋아. 지금 이 순간이. 날씨가 풍경..  모든게.”


“내가 있어서 그런게 아니고?”


그랬다. 그녀가 있다는 것만으로, 그녀가 내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이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연애들은, 사랑이라 말했던 것들은 그녀 앞에선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할 

거짓이 되어버렸고 10년 가까이 했던 연애들은 대체 무엇들이었는지 한순간에 정채불명이 되어버렸다.


코끝이 차다. 시계를 보자 이미 시간이 꽤 흘러있었고, 그는 서둘러 독서실 옥상 문을 열고 계단으로 

향했다. 통로는 적막했고 비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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