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달래의 정읍사<제13회>- 먹잇감
먹잇감
흑치장군이 쇠야치와 쇠돌이 형제를 불렀다. 쇠야치는 방령 목막수의 휘하에서 오십부장이 되어 있었고 쇠돌이는 십부장이다. 형제는 고시산(古尸山 지금의 충남 옥천) 가을마동리(동이면 갈마동리)의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장성했으나 엄격했던 가풍에 따라 아버지의 엄명을 받고 미장가인 채로 황색군에 가담했다. 그동안 황산벌 싸움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흑치장군과 함께 탈출했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해 호강 변(금강 상류)의 고향집을 찾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형제 모두 눈치가 빠르고 야무졌다. 황색군의 정식 병정으로서 궁성의 수비를 담당했던 것을 늘 자랑으로 삼았다. 흑치 장군과 함께 사비성을 탈출, 임존성에 들어와 오십부장과 십부장으로 승진한 형제는 부모님 소식이 궁금해 오래전부터 고향집에 다녀오도록 단 삼일만이라도 짬을 내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제야 그 허락이 떨어지는 줄 알고 기쁜 낯빛으로 장군의 막사에 들어섰다.
“오십부장 양쇠야치, 십부장 양쇠돌이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어? 그래, 잘 왔어. 지금 기다리고 있던 중이라네. 거기에 앉게나.”
“괜찮습니다!”
“아냐, 얘기가 기니까 앉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고향에 양 부모가 다 계시는가?”
“예~에.”
“잘 됐군. 이번에 한 번 다녀오도록 해. 그런데 말이야, 임무가 하나 있어.”
“감사합니다. 어떤 임문데유?”
“그게 말이야. 좀 어려운 일이 돼놔서 말이야.”
“…………?”
“오십부장은 전에 사비성에 있었으니까 성안 사정을 잘 알 것 같은데. 그렇지?”
“예~에, 손바닥 보듯 훤하지유.”
“그러면 성안에 샘이 몇 개나 되는지도 잘 알겠군.”
“그러믄요. 동서남북 네 곳에 하나씩 하고 맨 가운데에 또 하나가 있시유. 그러니께 다섯 군데구먼유. 그리고 있으나마나한 것도 네댓 개 되지유.”
“그렇지? 그런데 이맘때의 수량은 풍부한가?”
“아니여유. 부소산 쪽의 두 군데는 괜찮은디 가운데와 남쪽은 물이 많았다가 줄어들었다가 허는디유.”
“그 밖에 바깥 물을 끌어오는 물길도 있지 않은가.”
“아녀유. 그런 것은 없시유. 강 쪽은 워낙 경사가 심해서유. 그래서 커다란 물 창고에 항상 물을 퍼 날라 저장하는 게 일이지유.”
“아~, 그래?”
“그러믄 저희들보고 지금 거기 샘의 물줄 끊으라고 허시는감유?”
“으응? 으하하하. 역시 자네들은 눈치가 빠르군.”
“그런디 거기를 어찌콤 들어가야 헌데유?”
“내 그 방법을 알려주려는 게야.”
“…………?”
“고향집이 고시산이라 했던가? 일단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찾아뵙고 한 삼 일 쉰 다음에 두잉지(지금의 충남연기군 남면)에 들려서 지난번 심달평 십부 장이 단자를 가져온 쌀 오십 섬을 운반해오도록 해.”
“그런거라면 식은 죽 먹기지유.”
“아닐세. 식은 죽이 아니야. 우선 힘이 좋은 수하 열 명을 데리고 가서 소 달구지를 빌려 나누어 싣고 오게. 아마 두 개에 나누어 실으면 될게야.”
“두개면 충분허지유.”
“달구지 빌리는 삯은 쌀 한 섬 씩 떼어주면 될게야. 그리고 말이야, 함께 오지 말고 각자 멀찍이 떨어져서 와야 하네.”
“예, 알겠구만유. 눈을 피할라믄 그렇게 해야지유.”
“눈을 피하는 게 아니고 되도록 큰 길을 잡아서 쉬엄쉬엄 오도록 해. 혹시 신라병이나 당병의 습격을 받더라도 놀라지 말고 저들의 요구에 순순히 따르도록 해. 목숨이 식량보다 중하니까 말이야. 뒤따르던 달구지 하나만 무사히 가져와도 좋고 세 불리하면 그냥 버려두고 와도 돼.”
“그 아까운 식량을 앉아서 뺏기라는 말씀인가유?”
“그리고 갈 때는 변복을 하고 돌아올 때는 군복을 입도록. 알겠나?”
“명 받들겠습니다. 충.”
“지금 바로 출발하도록. 어떤 상황이든 백제부흥군으로서의 위용을 잃지 말게나. 부디 임무를 잘 수행하기 바라네.”
쇠야치는 장군의 막사를 나서면서도 무언가 석연치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복을 입고 큰 길로 쉬엄쉬엄 오라니 나들이를 하라는 얘긴가? 쇠돌이도 약간은 미심적은 게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장군의 지시에 하자가 있을 리 없다는 믿음에서였다.
저녁을 일찍 먹자마자 수하 열 명을 변복시켜 대동하고 성문을 나섰다. 가는 길에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면 밤길을 서둘러야 했다. 두 명, 세 명씩 짝을 지어 보부상 행세를 했다. 맨 앞서 가는 쇠야치는 중간 중간에 나뭇가지나 돌무더기로 표식을 남겨 나머지 일행이 뒤따르도록 했다. 밤새 길을 재촉한 덕에 동이 틀 때쯤에는 길게 누운 호강이 보이는 언덕배기에 당도했다.
갑자기 열두 명의 장정이 떼거리로 찾아든 가을마동리 양楊칠석의 집안은 일대 난리였다. 수삼년 동안 소식조차 없던 두 아들이 번듯하게 살아 돌아와 큰절을 올리자 양씨 부부는 꿈인가 생시인가 할 정도로 경황이 없었다. 가까운 친척들에게 연통해 불러오는가 하면 장정들의 조반을 준비하느라 부산했다.
온 동리 잔치가 흥겨울 만도 했지만 역시 눈치 하나 빠른 아버지 양철석은 용의주도했다. 오십부장, 십부장이 됐다는 두 아들이 수하를 열 명씩이나 데리고 불쑥 나타난 것은 분명 심상찮은 일일 터라고 짐작했다. 과묵한 아버지는 그 사연에 대해 일언반구도 운을 떼지 않은 체 아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며 뒷바라지만 했다. 집안사람들에겐 입조심을 거듭거듭 당부했다.
한 나절을 단 잠으로 때운 수하들은 늦은 점심요기를 하자마자 강변으로 나가 그물질을 하기도 하고 낚시질을 하기도 하며 흥겹게 놀았다. 쇠야치 형제에게 호강은 마치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안식처였다. 강변은 놀이터이기도 했고 대화 상대이기도 했다. 한 겨우내 잠잠히 흐르던 강은 봄이 오는 것을 먼저 알아 꼬르륵 꼬르륵 소리를 내며 강변의 얼음조각을 훑어 내렸고 여름 장마에는 마치 새끼 잃은 암곰처럼 으르렁거리며 강둑을 넘실댔다. 그러다 가을 하늘이 높아지면 수면에 잔주름을 잔뜩 그리며 건들건들 흘러내려갔다. 전날 매놓은 발에 메기라도 한 마리 걸리면 저녁상이 비릿함으로 푸짐해 더 없이 살가운 그런 강이었다.
일행은 다음날 새벽밥을 먹고 곧바로 길을 나섰다. 흑치장군은 한 삼일 쉬었다 오라했지만 아버지의 눈빛이 출발을 재촉했다. 임무를 부여받은 장졸의 마음가짐이라고 여겼으리라. 가을마동리에서 두잉지까지는 험준한 황등야산(지금의 계룡산)을 넘어야 하는 장정의 하룻길이다. 재를 넘어 주막거리에서 늦은 점심을 요기하고 겨우 해전에 두잉지에 도착했다. 일행을 마을 초입 야산에 남겨놓고 쇠야치와 쇠돌이 둘이서 나那씨 부자집을 찾았다. 오십 연갑의 나씨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형제를 맞았다.
“어르신, 임존성에서 왔구만유.”
“으~응? 임존성이오? 그러면 지난번 왔다간 달팽이란 사람의 단자 건으로?”
“예~에. 지는 고시산 가을마동리 사는 양쇠야치라고 헙니다유. 여기는 지동상이구유.”
“그러니께 지금 임존성이 아니고 고시산에서 왔다는 말이유?”
“예~에. 거기 부모님 잠깐 뵙고 오느라 그리 되았구만유.”
“아~. 그려유? 그러믄 거기 어딘가 양칠석 옹 사는 동리 아닌가베?”
“예~에? 어떻게 아시는가유? 지 가친이구만유.”
“뭣이유? 양칠석 옹 자제라구? 허어, 반갑소이다. 물론 강녕하시지유? 오래 전부터 존함을 들었지유. 우리 집안에서 그쪽으로 혼사한 사람도 있구유.”
“아이고 사둔지간이구만유. 그러믄 인자 말씀 낮추시구유. 다시 인사를 올려야 허겄구만유.”
“아니 별 말씀을……. 그건 그렇고 단자물목은 어떻게 운반할 요량이유?”
“예~에, 소달구지를 두엇 빌릴 생각이구만유. 저희 수하 여럿이 저 앞 산 자락에서 기다리고 있구만유. 그리고 여기 단자유.”
“어디 보자. 그렇지. 맞구만 맞아. 그땐 경황이 없어 쌀 오십 섬이라고 혔지만 여럿이 왔다니께 아무래도 좀 더 실어 보내야 허겄고만. 오늘은 늦었으니께 여기서 유하고 내일 일찍 발행허도록 허시유. 우선 일행을 데려와 서 저녁부터 먹어야지유.”
“이렇게 고마우실 데가…….”
나씨 부자의 인심이 참으로 후했다. 저녁대접도 푸짐했다. 통째로 삶은 닭 서너 마리에다 탁배기도 동이 째로 내왔다. 산길을 재촉한데다 푸짐한 저녁 덕에 식곤증이 몰려와 자리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쇠야치는 밖에서 한 식경이나 번을 서다가 들어와 수하 하나를 깨워 교대를 했다. 그리곤 첫닭이 울자마자 눈을 뜬 쇠돌아가 번을 교대했다. 모두 일어나 새벽밥을 먹고 나서야 동이 뿌옇게 밝아왔다. 일행은 부리나케 황색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사이 나씨 부자는 인근에서 소달구지 셋을 불러왔다. 하나에 삼십 석씩 야무지게 실었다. 하나에 쌀 한 섬씩 한다는 삯은 나씨 부자가 굳이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동구 밖까지 배웅하는 나 부자의 눈빛이 참 서글했다. 점심요기까지 넉넉하게 장만해 실어주었다. 쇠돌이가 수하 다섯과 함께 달구지 한 대를 이끌고 맨 앞서 출발한 다음 반 마장 쯤 뒤에 쇠야치가 두 대를 호위해 따랐다. 변복한 채인 한 사람은 중간쯤에서 앞뒤 상황을 연결했다.
동짓달에 접어들면서 날씨가 사뭇 쌀쌀해졌다. 응달진 쪽엔 서릿발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소는 목에 단 워낭을 딸랑거리며 묵묵히 걸었다. 한 발 한 발 서두르지도 않고 꾀부리지도 않았다. 옆에서 따르고 있는 사람의 발걸음을 자로 재는 듯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가도 어느 땐 조금 가볍게 걷기도 했다. 언덕배기에선 다소 힘에 부치는 듯 침을 흘리다가도 내리막에선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터덜터덜 걸었다. 중화참이 되어서야 무성산을 지나 운암 삼거리에 도착했다. 깊은 산간이어서인지 인적이 드물었다. 쇠돌이는 개울가를 택해 늦은 점심보따리를 풀었다. 수하 하나를 부리나케 뒤에 따르는 형 쇠야치에게 보내, 기별을 했다. 아직까지 아무 탈이 없어 다행이었지만 왠지 싱겁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이제 남은 길은 옥녀봉을 지나 벌음지를 거쳐 차령고개만 넘으면 임존성이 지척이다. 꼬불꼬불한 옥녀봉을 휘돌아가는 길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이럴 때면 입담 좋은 벼락이 헤픈 소리로 발길을 가볍게 한다. 옹벼락은 진내 불화(지금의 충남 금산군 부리면 불아리)출신으로 문자속도 그럴 듯 했다. 아버지 옹천둥은 금쪽같은 외아들을 징병으로 보내면서 억장이 무너지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을 만큼 강단이 있는 사람이었다.
“야, 천둥 아들넘아! 먼 소리라도 한 번 혀봐라. 심심허닝게 말여.”
“멋이여? 어찌 울 아버지 함자까지 들먹이는거여?”
“베락이 칠라믄 천둥부텀 칭게 그러지야.”
“그냥 좋게 뙤라기 하나 혀 달라고 허면 되지 안남유?”
‘그려, 그려. 뙤라기 하나 풀어보아.“
“그러지유. 전에 말이유. 홀아비 시아부지와 청상 과수된 며느리가 안 살았답디여?”
“낮에는 시아부지 며느리고 밤에는 여보 당신이란 뙤라기인거여?”
“아이고~. 그런게 아니고요. 들어보란 말이유.”
“그려, 그려. 어셔 혀봐!”
“둘이 아주 재미있게 살았다고 안 헌가유. 하루 저녁엔 시아부지가 며느리한테 내일 조동하니께 입고 갈 옷을 잘 시침해놓으라 혔는디 며느리가 일 찍 불 끄고 자버리는거유.”
“고것이 맹랑허구먼.”
“그래서 시아부지가 안채의 며느리에게 들으라고 ‘아가, 그냥 자냐?’ 혔더니 며느리가 큰 소리로 ‘아니유. 이불 덮고 자유.’ 그러더랑구만유.”
“그러니께 며느리가 꽤나 심통이 있구먼.”
“다음날 시아부지가 출행했다가 오는 길에 비를 흠뻑 맞고 돌아왔는디 며느리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인 시아부지 보기가 민망혀서 ‘아이고 아버님. 어디서부텀 비를 맞으셨당가유.’하고 위로혔더니 시아부지가 ‘어디서는 어디 서겄냐, 머리끝에서부텀 맞았지.’ 하더랑만유. 이번에는 시아부지가 한 방 먹였지유.”
“으하하하. 근디 천둥아들놈 뙤라기 하나는 잘 현다.”
“또 아부지 함자 부르능가유?”
“잘 못혔구먼. 인자부텀 안그럴텡게 하나 더 혀봐!”
“또 시아부지허구 며느리 뙤라기인데유. 홀로 된 시아부지가 머리를 감고 틀어 올리는데 똑바로 잘 안 되능거유. 그래서 안방의 며느리를 불렀시유. 애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던 며느리가 무슨 다급한 일인가 싶어 얼른 사랑 으로 건너갔더니 시아부지가 고개를 푹 숙이고서는 ‘아가, 내 머리 좀 틀 어 올려봐라’ 그러는거유. 며느리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조심스럽게 머리채를 붙잡고 말아 올리는디 눈을 감고 있던 시아부지가 답답혀서 눈을 떠봉게 바로 코앞에 며느리의 젖꼭지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거여유. 애 젖 먹이다 급한 김에 그냥 온고지유.”
“야! 그리서 다짜고짜 덮쳤냐! 원 이거 아랫도리 불끈거려서 못 참겄네. 빨리 말혀 봐!”
“그게 아니구유. 시아버지가 보기에 하도 탐스러워서 그냥 입으로 한 번 쭉 빨았대유.”
“그런디, 그담에 며느리가 어찌 나왔단 말이여~”
“그랬더니 며느리가 화들짝 놀라서는 뛰쳐 나가버렸대유.”
“야! 베락아. 그게 다여? 그걸 뙤라기라고 허냐?”
“아니지유.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자 고대로 일렀대유. 그랬더니 남편이 화가 나서 당장 사랑으로 달려가 아부지에게 따졌대유. ‘아부지! 어찌 내 마 누라 젖을 빨아먹었남유!’ 하고유”
“멱살을 잡고 말이냐?”
‘아녀유. 어떻게 아버지 멱살을 잡는대유. 그랬더니 아부지가 오히려 역정을 내면서 ’야, 이눔아! 니 마누라 젖 한 번 빨았다고 이 야단이냐? 너는 내 마누라 젖을 멫 년이나 빨았는지 아냐?‘ 그러더래유.“
“으하하하”
“으하하하”
웃음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웅진성(지금의 충남 공주) 남쪽을 막 지나고 있어 조금만 더 가면 차령고개다. 차령을 넘으면 임존성까지는 한 나절 단걸음이다. 청색 군복과 벙거지로 보아 신라군임이 역력했다. 이십여 명이 넘는 것 같았다. 십여 명이 주위를 포위하고 대여섯 명은 창검을 꼬나들고 등등한 기세로 다가왔다. 이쪽은 십부장 쇠돌이를 포함해 겨우 다섯 명. 중과부적이었다. 낌새를 파악한 쇠돌이는 수하들을 다독거려 순순히 장검을 내려놓았다. ‘목숨이 식량보다 중하지 않느냐’는 흑치장군의 말이 귀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창대로 달구지에 실은 쌀가마를 쿡쿡 찔러대던 나병들은 꿇어앉은 황색군 가운데 쇠돌이의 복색으로 그가 수장임을 알고 일으켜 세워 저희들 수장 앞으로 끌고 갔다. 쇠돌이는 허기져 지쳐있는 상대의 모습을 보고 한 번 부딪쳐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억지로 참으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먼저 날아온 것이 돌주먹이었다. 왼쪽 볼이 욱신거렸다. 그래도 눈을 치뜨고 그를 노려봤다. 수장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하더니 수작을 건넸다.
“느그들이 황색군이냐?”
“…………”
“니캉 죽고 싶네? 와 여기꺼정 와서 양곡을 수탐해 가는 기야!”
“수탐이라니? 우리 백성이 주는 것 받아가는디 그게 무슨 수탐이란 말여!”
“뭬라고? 우리 백승? 느그 나라 망해뿌린게 언젠데 느그 나라 백승이어?”
“아직 안 망혔다. 인자 너그들이 곧 망할 거여.”
“이눔아가 시방 말장난 하자는기가! 일마들 모도 쥑이삐리까?”
“니놈 손에는 안 죽을 거니께 염려 붙들어 매고 양식이 탐나거든 얼른 끌고 가거라. 내 수하는 건들지 말고.”
“기렇게는 안 되지. 느그들 모도 델꼬 가야겄다. 야그들아. 일마들 손 뒤 로 묶어서 끌고 가자. 오늘 횡재 했다 아이가.”
“어디로 간다는 거여?”
‘어디는 어디여. 소부리성이지. 문초는 거기 가서 헐 거이고 잔말 말고 순순히 땡겨 와!“
쇠돌이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벼락이의 뙤라기에 정신이 팔려 경계를 게을리 한 것이 화근이었다. 중간쯤의 연락병이 이를 눈치 챘으면 뒤따르는 형 쇠야치의 구원이 있을 것이다. 불과 반 마장이니까 한 식경 안에는 쫓아올 것이다. 나병들은 웅진성 쪽의 반대방향인 차령산 산자락을 타고 대용천을 따라 솔치고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쇠돌이는 아마 고개 중턱쯤이면 결판이 나리라는 기대로 태연하게 그들을 따랐다.
한편 중간 연락병의 다급한 전갈을 받은 쇠야치는 눈에 심지를 세우며 숨을 몰아쉬었다. 수하들이 다가와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가려는 태세였다. 그러나 쇠야치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끓어오르는 분을 억지로 삭이고 있었다. 흑치장군의 의도가 이것이었던가? 큰 길을 택해 쉬엄쉬엄 오라는 것도, 함께 오지 말고 멀찍이 떨어져 오라는 것도, 식량을 내어주어도 좋다는 것도 모두 일부러 먹잇감이 되라는 뜻이었단 말인가? 그제야 흑치장군의 의아했던 명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사비성에 잠입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한 말이 새삼 기억났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앞장서서 나아갈 것인데 생각이 짧았다는 후회가 들었다. 식량은 빼앗긴다 해도 쇠돌이와 병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쩌면 생명이 위태할 수도 있다. 얼른 가서 한 판 붙어 수하들을 구해 와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혹시 이것이 흑치장군의 진짜 계책이었다면? 생명까지 담보로 하는 함정이었다면? 이렇게 오십부장이 잠시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수하 몇 명은 창검을 꼬나 쥐며 명을 재촉하는 표정들이었다.
마침내 명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말라는 명이었다. 대신 연락병은 얼른 따라가서 앞의 행렬이 눈치 채지 않게 뒤따르며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아오라고 일렀다. 쇠야치는 눈이 휘둥그레진 수하들의 태도에는 아랑곳없이 흑치장군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백제부흥군의 위용을 잃지 말라’는 장군의 말은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잔뜩 겁에 질린 수하들과 함께 끌려가는 쇠돌이는 솔치고개 중턱에 이르러서도 쇠야치 형 일행이 나타나지 않자 역시 흑치장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되새기며 죽음을 각오했다. 그제야 형이 제발 나타나지 말고 무사히 귀성하기를 빌었다. 반드시 후일 어떤 계책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속으로 낭패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달구지를 끌고 온 우부였다. 어찌 쌀 한 섬이 좀 과한 삯이라는 생각을 했었으나 이처럼 위험한 일일 줄은 몰랐다. 달구지야 새로 장만하면 되지만 근동에서 힘 좋기로 소문난 누렁소를 빼앗길까봐 전전긍긍이었다. 논밭뙈기 하나 없이 오로지 소달구지로 연명하는 처지였다. 이제 소를 잃어버리면 늙은 어머니까지 여섯 식구는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해야 한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밤이 이슥해서야 사비성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소나무골에 당도했다. 나병들은 목적지에 다 왔다는 안도감으로 잠시 쉬어가자며 걸음을 멈췄다. 우부는 이때다 싶어 어둠을 틈타 소의 멍에를 한 뼘쯤 치켜 올려놓고는 시치미를 뗐다. 양쪽 아래턱에 매단 워낭은 일찌감치 떼어낸 후였다. 다시 출발하자는 수장의 외침이 있었지만 소달구지가 움직이질 않았다. 멍에가 잔등에 느슨하게 걸려있어 소가 힘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수하들이 달려들어 달구지를 밀거니 당기거니 해보았으나 수레는 반 바퀴도 구르지 못하고 도로 서고 말았다.
우부는 소의 아랫배를 살살 문지르면서 내일모레 출산인데 이 주인을 잘못 만나 이 지경이 되었다며 눈물 콧물을 흘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너도나도 어쩔 줄을 몰랐다. 더러는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눈물을 찔끔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 쇠돌이가 나섰다. 우부에게 가장 미안했던 사람은 누구보다 쇠돌이였던 것이다. 우부에게는 온 식구의 명줄이 달린 소라는 생각에 참으로 미안했었다.
“이 보기여. 느그덜이 사람인감? 말 못하는 짐승한테 이거이 헐 짓이냔 말여!”
“……………?”
“아, 얼른 풀어주어야 안 허겄는감. 뱃속에 새끼까장 들었다는디.”
“일마가 머라 캐쌋노! 누구는 알고 그럭 캤어? 벡지 승질 부리고 있네.”
“저그가 사비성 아닌가베. 바로 코앞 아녀! 인자 소는 쉬었다 가라고 풀어 주란 말이여.”
“……………”
“여그다 쌀가마 내려놓고 날 새는 대로 성에 있는 사람들 불러서 한 가마니 씩 져나르면 될 거 아닌가베. 야 이 새 대그빡아!”
“머라꼬? 새 대글빡? 니 증말 그 말버릇 몬 고치나!”
“고칠라믄 느그덜 맴씨나 고쳐야 쓰겄다. 손에 쥐어줘도 모름서.”
말씨름에서 나병들이 지고 말았다. 밤이 깊어져 사위가 적막한데 괜한 말썽이라도 생기면 다된 밥에 콧물 빠치는 격이라고 생각했는지 쇠돌이의 말을 따랐다. 우부에게 소를 풀어 돌아가라고 이르고는 쌀섬을 풀어 등에 메고 갈만큼 담아주었다. 우부는 아직까지 코를 훌쩍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미안케 되았심더. 우리사 마, 소가 새끼 밴 줄 어케 알겠십니꺼. 밤길 조심해서 건너 가입시다. 새끼 잘 놓았으먼 좋겠심더.”
“아이고 원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당감. 백제고 신라고 다 한 조상 한 핏줄인디, 지발 쌈질 허지 말고 잘들 지냈으면 좋겄는디유 잉.”
“아따 사슬 그만 늘어놓고 퍼뜩 가이소!”
“야~야. 그러지유. 근디 저그 뒹지(두잉지)에서 온 양반 말이유. 우리 여섯 식구 죽은 목심 살려 준 것 안 잊어버릴 거여유. 나중에 꼭 한 번 찾아오 시유. 내 소식 전할 게유.”
참 넉살 좋은 사람이었다. 넉살을 핑계 삼아 할 말은 다하고서 느릿느릿 떠나갔다. 나머지 일행에게 상황을 알리겠다는 말 대신 소식을 전하겠다고 에둘러 말하는가 하면 한 조상 한 핏줄이니 절대 목숨은 상하지 말라는 언질을 하지 않는가. 혹시 두잉지에 후환이 있을까봐 뒹지라고 말하는 기지를 발휘하지 않는가. 또 소가 새끼 밴 줄을 주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알겠는가. 그럴싸한 임기웅변이 소의 목숨까지도 구했던 것이다.
<다음은 '꺼지지 않는 불씨'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