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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달래의 정읍사<제12회>-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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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꺼지지 않는 불씨

  
                         추 억

  해미보살은 내장사의 산림보살로 눌러앉기 전까지 고시이(지금의 장성)에 있는 백암사(지금의 백양사)에 몸담고 있었다. 그곳 산림보살의 일손을 거들어주면서 삼시 세끼 밥을 얻어먹었다. 천성이 얌전하고 손 맵시가 있는데다 부지런해 산림보살의 신임을 얻었다. 정식으로 계를 받지 않았지만 부르기 쉽게 보살이라고들 불러주었다. 지난봄의 일이다. 사월초파일의 연등행사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터에 누가 찾아왔다며 나가보라 했다.

  자기를 찾아올 사람은 이 천지에 아무도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곳에 몸담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다. 벌써 십년 전, 죽음 문턱에서 헤매고 있다 산림보살의 눈에 띄어 구명을 하고 그대로 눌러앉은 이래 일주문 밖은 나가보지도 않았다. 도대체 찾아올 사람이 없는 것이다. 순간 일말의 불안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그 애가?

  그녀가 첫사랑에 눈뜬 것은 열여섯 살 때였다. 아직 한 사람 몫의 일꾼 대접을 받기 전이라 어머니의 품팔이를 따라가 부엌일을 거들며 밥을 얻어먹었다. 달녀의 아버지 성상갑은 군관자리에서 물러난 후 병을 얻어 자리보전을 하고 있어 어머니의 품팔이에 생계를 의존해야 했다. 네 살 위인 오라비가 있었으나 어려서부터 병치레를 일삼더니 사람구실을 못하는 반병신이 되었다. 겨우 똥오줌만 가릴 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방안풍수가 되었다.

  모량부리(지금의 고창)의 서쪽 바닷가 해미마을은 지형이 아담하고 물산이 풍부해 예로부터 장수가 나올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오십여 호의 백씨 종친들이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다. 그 중 백중서의 집안이 제일 넉넉했다. 살림이 유족한 만큼 집안에 훈장을 들여놓고 아들 삼형제에게 글공부를 시켰다. 첫째인 하나루는 기골이 장대해 일찍부터 칼 다루기를 좋아하더니 동네 유일의 타성 받이인 성상갑의 천거로 군문에 들어가 오장과 십부장을 거쳐 백부장에 이르렀다. 둘째인 두루는 놀기를 좋아해 부모의 근심을 샀으나 바다로 나가 그물질을 하거나 가마로 소금을 생산해 재물 모으는데 신명이 났다.

  막내인 시루는 영특했다. 글씨도 잘 썼고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 열 살이 넘으면서 시와 부를 다뤘다는 풍문이었다. 그는 예쁘장하고 단정했다. 나이 먹은 사람들도 그 앞에서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되레 무안을 당하는 그의 이치와 언사 때문이었다. 사춘기를 맞은 그의 눈에 달녀가 꽂히고 말았다.

  어느 화창한 봄날, 달녀가 찔레의 새순을 끊어 껍질을 벗긴 다음 입에 넣으면서 무심코 종달새의 흉내를 내어 ‘찔록(찔레) 꽃도 보배요’라고 목청을 돋우었는데 마침 시루가 근처에서 이를 듣고 보았다. 시루의 눈에 그 뒷모습은 천녀를 닮아 있었다. 저도 모르게 다가간 시루는 말을 걸었다.

“이봐! 시방 뭐라고 혔능가.”

“……………?”

“아까 찔록 꽃이 어쩌고 했잖여! 다시 한 번 혀봐!”

“찔록 꽃도 보배라고 혔는디요?”

“그려! 바로 그것이여. 근디 꽃은 아직 안 피었잖어. 근디 그게 보배라는 것이어?”

“눈에는 보이지 안 혀도 꽃은 벌써 피고 있는 것이어요. 뿌리 속의서 피어 있당게요.”

“긍게 너는 시방 그 꽃을 보고 있다는 거여?”

“도련님은 멋이든 눈으로만 보능 게비지? 마음으로도 볼 줄 알어야 배운 사람의 마음인디.”

“배운 사람의 마음?”

“그렇당게요. 우리 아부지도 항상 그리 말 혔당게요. 배운 사람은 배운 사람의 마음이 있어서 그렇지 못한 사람을 부리는 거라고요.”

“……………”

“그러고요. 도련님은 배운 사람이고 재주 있는 사람잉게 못 배우고 없는 사람 마음을 잘 …….”

“잘? 자알 멋을 어떻게 혀야 헌다고?”

“……………”

“말을 혔으면 끝가지 혀야지. 잘 어떻게 말이어.”

“지가 말을 잘 못 혔고만이라우. 나 가봐야 쓰겄는디?”

  이 만남은 시루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달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달녀는 나중에 생각하니 당돌한 얘기를 한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한편 못 할 말을 한 것 같지도 않았다. 동네에서 모두 신동이 났다며 어려워들 하지만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을 것인가. 나이도 어린데. 먹고 살만한 집안이니까 눈치 보느라 할 말도 못하고 미리 고개부터 숙이는 것이 아닌가.

  한편 시루는 그녀의 맑디맑은 눈빛이 아른거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람의 눈이 그렇게 많은 생각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여태껏 자기 앞에서 그렇게 당돌하게 치고 나오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괘씸한 것이 아니라 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여자였다.

  시루는 그림을 그렸다. 밭두렁의 찔레꽃 앞에 선 여인의 그림을 그렸다. 하늘엔 종달새가 짝을 이루어 날고 있다. 그녀의 치맛자락 밑 발가락이 미투리 코를 헤집어 나오는 그림이었다. 얼굴은 수줍음을 돋보이기 위해 담홍색으로 처리했다. 두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의 한 쪽을 왼쪽 가슴 앞으로 뽑았다. 그녀의 눈은 하늘을 향하도록 했다. 그리곤 화제를 썼다. ‘月心春色월심춘색을 써 넣었다.

  그가 몸을 더듬었다. 단단히 동여맨 가슴을 헤집었다. 손길은 부드러웠으나 감당할 수 없는 송곳 찌름이었다. 그가 나를 괴고 내가 그를 괸다고 해서 지금 그를 받아들이면 그 다음은 어찌 되는가. 그는 행세하는 집안의 전도유망한 자제인데 비해 나는 쇠락한 무골집안의 과년한 처자다. 내 아버지 어머니는 그렇다 치고 그쪽의 부모는 우리 사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아니었다. 내 몸뚱이야 희생할 수 있지만 그에게는 얼마나 큰 짐이 될 것인가. 욕심을 버려야 했다. 그의 요구를 물리쳐야 했다. 그것은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를 졸랐다. 아버지와 오빠의 병환을 이대로 두고만 보겠느냐며 어차피 품팔이를 할 바엔 대처로 나가 고생하면서 식구들을 살리자고 주장했다. 정신이 반쯤 나간 듯 어리둥절하던 어머니도 나중엔 달녀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냥 몸만 떠나면 되었다. 변변한 세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리할 전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떠나려면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좋았다.

  이사는 밤에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소문도 내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갈 데를 정한 것도 아니고 대강의 짐을 꾸려 아버지와 오라비를 부축해가면서 길을 떠났다. 달빛이 배웅을 했다. 동구 밖을 벗어나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달녀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렸을 적, 시주 나온 스님이 달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측은한 눈길을 보내더니 ‘부처님 밖에는 누가 있으리오’ 하면서 휘적휘적 사라졌던 기억이 났다. 그게 팔자라는 뜻이었던가 싶다.

  고생한 보람도 없이 아버지는 세상을 하직했다. 아버지는 숨을 거두면서 달녀에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당부했다. 어머니에게는 미안하다고 했다. 오라비에게는 잘 있으라고 했다. 그리곤 편안하게 떠났다. 어머니의 슬픔은 간장을 녹이는 것이었다. 상노(지금의 고창군 무장면)에서 열여섯에 군관에게 시집와 아들딸 낳고 살 것처럼 산다고 했으나 남은 것은 송장이 된 남편과 반편이 된 아들 하나, 과년한 딸 하나였다. 이제 의지할 데조차 없는 과부가 되었다. 눈앞이 캄캄한 만큼 슬픔이 더욱 복받쳤다.

  달녀의 고심은 더 컸다. 재산이 있어 데릴사위를 얻을 것인가. 타지로 시집을 가고나면 병신 된 오빠와 나이 많은 어머니를 누가 돌볼 것인가. 날이 갈수록 시루의 생각이 간절했지만 애써 지나간 일이라고 치부했다. 봄여름 가을이야 품을 팔아 연명한다지만 겨울을 나기가 걱정이다. 고지를 주는 집도 있으나 그것도 남정네라야 가능했다.

  고심 끝에 얻은 결론은 넉넉한 집안에 씨받이로 가는 것이었다. 마침 중매도 들어왔다. 망설임 없이 결행했다. 그것이 어머니와 오라비를 살리는 길이었다. 논 두마지기와 밭 한마지기를 받기로 하고 애를 낳아주러 갔다. 남자는 오라비보다 못한 병신이었다. 양발이 오그라져 걷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했다. 똥오줌도 받아내야 했다. 남자구실도 제대로 못해 애가 들어서지 않았다. 그래도 여섯 달 만에 애가 생겨 아홉 달을 지나 순산했다. 사내였다. 다행히 온전했다. 두 살 때까지는 키워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 삼년 동안 달녀는 인생을 다 살아버린 것처럼 지치고 힘들었다. 자식을 떼어놓고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정에 돌아와 병이 났다. 삼년간의 고초에다 자식을 떼어놓은 아픔이 연합하여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삼년 동안 병치레를 하느라 씨받이 대가로 받았던 전답을 도로 팔아치웠다. 결국 남은 것은 빈손이었다. 거기에다 오라비도 죽고 말았다. 그리고 연이어 어머니마저도 심화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바닷가에 나가 굴비두름 일을 하거나 생선 몇 마리를 머리에 이고 행상을 하거나 산나물을 캐어 팔거나 하면서 생명을 부지했으나 이미 살맛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슴푸레 어렸을 적의 기억이 났다. ‘부처님 밖에는 누가 있으리오.’라고 들었던 생각이 났다. 그래서 산사를 찾아 길을 나서 눈발을 헤치고 산길을 헤매다 쓰러져 백암사 산림보살의 구호로 살아났다. 그리곤 절이 집이 되었다.

  그런데 자기를 찾아온 이가 있다는 전갈이다. 순간 그녀의 뇌리에 씨받이로 낳은 아들 건이 스쳤다. 그 아이라면 지금 열여섯이 되어 있으리라. 능히 제 생모를 찾을만한 나이다. 장성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달녀의 마음은 딴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자식을 만난들 무슨 득이 될 것인가. 십 수 년 전 시루를 피해 떠나왔던 아픔이 되살아났다. 그렇다. 부처님 밖에 누가 있을 것인가. 그녀는 발길을 돌려 요사체로 피했다.

  밤이 이슥해지자 산림보살에게 두말없이 하직인사를 하고 내장사를 향했다. 절의 살림살이를 배우고 불법을 익히면서 생기를 되찾아 사람구실을 하게 되었을 때 언젠가 묵었다 가던 스님 한 분이 달녀를 스쳐지나가며 혼잣소리로 ‘부처님밖에는 누가 있으리오’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달녀는 쫓아가 어느 절에 계시는 누구인지를 여쭈었다. 당연하다는 듯 내장사의 유해라고 대답하곤 휘적휘적 걸어가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달녀는 떠나기 전 자기의 행방은 부처님만이 아신다는 말로 소문내지 말 것을 귀띔했다.

  유해선사는 혜안으로 무엇을 꿰뚫어 보았던지 수심이 가득해 찾아온 그녀를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로 무덤덤하게 맞으면서 고향마을의 이름을 본떠 해미라는 법명을 내려주었다. 그리고는 산림보살을 맡으라 했다. 사찰의 건립과 준공을 묵묵히 뒷바라지하면서 그녀의 불심이 몰라보게 깊어져 선사와 선문답을 주고받을 만큼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해선사가 오늘 찾아오는 시주를 잘 보살펴달라고 당부했던 것이라며 부처님의 뜻을 알게 될 때까지 눌러 있으라고 권했다.

                    <다음은 '먹잇감'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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