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달래의 정읍사<제11회>- 상사병
상사병
“달래야. 너 어디가 어떻게 아퍼서 요렇게 암 것도 못 먹고 그리쌌냐.”
“………………”
“요것이 시방 큰 빙 났는가분디 먼 말을 혀야 약이라도 쓰던가 말던가 헐 것 아니여.”
“할무이~ 할무이. 나 암시랑토 않응게 걱정허지 말어라우. 메칠 있으면 기운 안 날랑게벼. 그렁게 그냥 나 혼자 내비두랑게 좀.”
“머시야? 그냥 내비두게 생겼냐? 시방? 아이고 부처님. 우리 달래 어찌 근당가요 잉.”
“할무이. 오늘이 메칠잉가요.”
“메칠이먼 멋 헐라고 그려. 어저끄가 동짓달 시작잉게 초이틀인갑다.”
“그러먼 바깥 날씨 솔찬히 춥겄네요 잉.”
“웬 날씨 탓이어. 시방. 안 추우먼 어디 갈디라도 있어서 그런다냐?”
“야~. 퍼뜩 일어나서 꼭 가보아야 할디가 있고만이라우.”
“얼래, 머시여. 거기가 어디간디 이 동지섣달에 출행헌단 말이어.”
달래는 금산사에 다년온 뒤 심한 몸살에 시달렸다. 온몸의 맥이 풀리고 신열이 났으며 입맛도 없어져 아무것도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았다. 머릿속도 텅 빈 것 같았다. 아무리 부르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가사자락을 날리며 휘적휘적 멀어져 가던 유정의 뒷모습만 자꾸 떠올랐다. 그에게서 풍기던 야릇한 냄새도 여전히 코끝을 맴돌았다. 그의 손을 통해 전해오던 체온도 아직 손바닥에 남아있다. 높이 뜬 찬 달빛이 그의 파르스름한 머리통으로 자꾸 둔갑했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뭔가 체한 것도 같고 어떤 땐 뭉클한 것이 가슴을 치고 올라오기도 했다. 그것은 꼭 피멍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유해선사를 따라 금산사를 내려오면서 유정에 대해 물어보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아주 당돌하게 그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는지 물었어야 했다. 선사는 무엇을 짐작하는지 시종 알듯 모를 듯한 미소만 흘리고 있지 않았던가.
이제라도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왠지 다시는 유정스님을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인연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꽉 붙잡든지 인연이 아니더라도 확실하게 매듭지어야 한다는 결기가 발동했다. 아버지 어머니와 할머니의 나무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열네 살을 넘어 곧 열다섯 살이 된다.
달래는 어머니 배들 댁 모르게, 할머니에게만 귀띔을 하고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동짓달의 매서운 바람이 소매 자락을 파고들었지만 추위를 느낄 여념이 없었다. 댓바람에 정촌(지금의 정읍)까지 내달은 달래는 할머니를 따라 가보았던 길을 어림짐작으로 달려가 이내 내장사 입구인 두주막거리에 당도했다. 그제야 가쁜 숨을 삭였다. 여기까지는 일심으로 달려왔지만 일주문이 보이자 약간의 망설임이 일어났다. 비록 양가집 규수는 아니라 하나 출가 전의 처자로서 불쑥 나타나면 유해선사가 어떻게 대할지 은근히 근심되었다. 당장 돌아가라는 호통이 터질 것 같아 가슴이 콩닥거렸다.
대웅전 앞뜰은 정갈하게 소제되어 있었다. 토방 위 섬돌에 짚신이 두 켤레 가지런히 놓여있고 안에서는 독경소리가 낭랑하게 흘러나왔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문이 열리며 섬돌에 발을 내딛던 유해선사의 눈길을 정면으로 받았다. 쥐구멍이라도 찾을 듯 몸을 웅크리는 달래를 본 선사는 입가에 그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다시 떠올리면서 왜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느냐며 나무랐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다정한 목소리였다. 얼른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예를 올렸다.
“어인 일이더냐.”
“……………”
“어인 일로 혼자 왔느냐고 묻지 않느냐. 이름이 달래라고 했던가?”
“예, 달래고만요. 실은 저어 그냥 왔고만이라우.”
“그냥 오다니? 너 집에는 얘기를 하고 온 것이냐!”
“예~에. 할무이한티 말 혔고만이라우.”
“나무관세음보살. 업보인게야. 아니면 선연일테고.”
“예? 업보라고요? 지가 무슨 잘못을 혔길래 이런 벌을 받는당가요?”
“너도 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벌이 아니니라. 부처님의 자비이니라.”
“부처님의 자비요?”
“암, 그렇고말고. 천지조화를 깨우치시려는 대자대비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날
이 저물었으니 어서 안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편히 쉬어라.”
“ ………?”
“유정은 여기에 없느니라. 지금 벽면수행 중이니라.”
“벽면수행이요? 그게 언지 끝나는디요?”
“내일 얘기하자꾸나. 관세음보살.”
요사체에는 벌써 저녁상과 잠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한 방을 쓰게 된 나이 지긋한 보살은 마치 어린 딸을 대하듯 자상하고 부드러웠다. 달래의 저녁 먹는 모습과 잠자리를 준비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살피던 해미 보살은 달래의 얼굴에서 수심을 읽어내고서는 마치 자기 일인 양 가슴아파했다. 해미 보살은 천장을 향해 반듯하게 누워 잠을 청하는 달래를 옆에 누운 채 쳐다보지도 않고 혼자소리를 하듯 말을 건넸다.
“처자는 참 좋은 얼굴을 타고났구만.”
“……………”
“전생에 달을 머금은 듯 하구만. 이승의 달도 가슴에 품고 살아야겠지.”
“……………”
“이름이 달래라고 했던가?”
“예? 예~에. 그렇고만이라우. 보살님.”
“처자가 품고 있는 달은 달로 그쳐야 할 터인데, 그 달이 내세까지 품고 갈 짐이 되고 있음이야. 그래도 나쁘지는 않아. 여자 팔자 그만하면 이승 을 살다 간 흔적이 되겠지. 나무아미타불.”
“…………?”
“이제 그만 눈을 붙여 봐. 내일 선사님께서 이르실 말씀이 있을 게야.”
늦잠을 잤다. 얼마 만에 이렇게 단잠을 잤는지 모를 만큼 푹 잤다. 밖에서는 비 돋는 소리가 들렸다. 초겨울의 빗소리는 그 추적거림이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달래는 밖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다 선뜻 일어나 부엌을 향했다. 해미보살은 혼자서 아침공양을 준비하고 있었다. 달래를 보자 아무 말 없이 공양소반을 내밀며 법당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엉겁결에 두 손으로 소반을 받아 법당을 향했다. 독경 중인 유해선사의 뒤로 다가가 소반을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소반을 어디에 놓는지도 모르고 아무데나 놓을 수도 없었다.
“저기 촛대 옆에 올려놓고 이리와 앉아라.”
“예~에.”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 기수급고독원…………”
법화경의 첫머리인 줄은 모르지만 유해선사의 독경은 정신을 맑게 해주고 귀도 시원하게 해주었다. 순간 지난번 초상집에서 들었던 유정스님의 독경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또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가느다란 신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달래의 신음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독경을 마친 때문일까 선사가 공양소반을 도로 가져오라고 하더니 나무 숟가락을 들었다. 선사는 여분의 숟가락을 건네면서 함께 먹을 것을 권했다. 거역할 수 없는 무엇이 주눅 들게 했다. 선사를 따라 무심히 숟가락질을 하고 있는데 선사의 느닷없는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으어허허허……”
“…………?”
“놀랠 것 없다. 세상의 이치는 이렇게 우스운 것이니라.”
“…………?”
“달래야. 너 오늘부터 여기서 기거하면서 나한테 불경도 배우고 문자도 익히도록 해라. 불심만이 너의 마음을 치료할 것임이야.”
“…………?”
“다내 너희 집에는 내가 별도로 연통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거라. 이번 겨울을 넘기면 눈이 뜨일 것이야.”
“선사님. 그리 헐랑만요.”
“으응? 그것은 네 뜻이 아니고 부처님 뜻인 게야. 해미 보살이 잘 수발해 줄 것이야.”
“예~에, 알겄고만이라우.”
낮엔 선사로부터 문자를 배우고 불법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반야경을 익혀나갔다. 밤엔 요사체에서 해미 보살과 함께 기거하면서 세심한 보살핌을 받았다. 해미보살은 날마다 밤늦도록 얘기보따리를 풀었다. 불법에 관한 얘기, 고승들의 수행 얘기는 물론 절밥 짓기와 경내 생활 등 무슨 얘기든지 재미있게 풀어나갔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도록 유정스님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그렇다고 불쑥 묻기도 망설여져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해미보살이 아침저녁 공양을 들고 절 뒤켠으로 갔다 오는 것을 보면 분명히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은 틀림없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보살이 들려주는 얘기가 미약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첫 싸락눈이 문창호지를 두들기던 날 밤에는 보살 자신의 내력을 마치 남의 얘기처럼 들려주었다.
<다음은 '제2부 꺼지지 않는 불씨-추억'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