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게르힌데르 연대기. - 어서 오세요. 평화로운 로렌스 마을입니다. (2)
이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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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형!”
굉장히 적당하게 생긴 사내는 못 들었는지, 아니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언급하는 것을 모르는지 허공만 쳐다보며 허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사람은 혹시 자신에게 개성이라는 것을 부여하기 위해서 헛것을 보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지금 혼잣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한데 말이야.
어찌되었든 나는 덴버 아줌마가 시킨 것만 하면 되기에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사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사내는 나를 바라보았다가 잠시 동안 내 손에 들린 빵을 쳐다보더니 갑작스레 활짝 웃음 지어보였다. 우와.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었던 것 같다. 이 사내는 생김새만 평범한 거였다.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의사와의 신속한 상담이 필요해!
“형.”
“으, 응?”
여전히 사내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인상을 보니까 인상도 평범하게 생겼다. 보통 이정도의 대화에서, 대화랄 것도 없지만, 바로 본론으로 진행되지만 왠지 모르게 엄청나게, 극도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하게 생긴 사내랑 마주보게 되자 말을 더 걸고 싶었다. 이럴 수가! 난 남자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내 성(姓)정체성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형 몇 살이야?”
“21살.”
“흠. 나는 18살 이니까. 형 맞지?”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가만히 끄덕거렸다. 대답 안하고 끄덕 거리면서 웃기만 하니까 더 이상해! 그냥 말을 해! 잠시 동안 둘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나만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내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저, 저기 이름이 뭐야?”
“엘머 라이돌프. 너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덴, 덴버 아줌마. 아줌마 사람 잘못 고른 것 같은데요? 이 사람 아무래도 지위가 높은 거 같아요. 우리 같은 아랫것들에게는 없는 성(聲)이 붙어있단 말이에요! 엘머 라이돌프라고 했다고! 라이돌프 가문에서 나온 귀족 자제가 아니야! 귀족 자제분이 이런 허름한 마을에 서민 체험 해보시려고 오셨다고요! 아니면, 어쩌면 우리 마을의 제일 높으신 분이 되실 지도 몰라요! 아, 그건 이름에 직책을 알려주는 게 안 붙어있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에요. 그나저나 이 망할 아줌마야! 마을의 지도자한테 융숭한 대접을 못할망정 나를 내보내? 나 말 잘못했다가 당신 말처럼 머리를 새로 바꿔 달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이 망할 신 자식아! 누가 이딴 식으로 내 소원 들어 달래? 내 소원은 우리 마을에서 당한 여행자가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가서 신고하기를 바란 거란 말이야! 내 머리가 바뀌는 건 바라지 않았다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어항 속에 갇혀있는 붕어처럼 입만 뻐끔뻐끔 거렸다.
“너는?”
“아, 저 그, 그러니까……. 여태까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덴버 아줌마에게 무릎을 꿇었던 것과는 다르게 빛의 속도로 무릎을 꿇었다. 큰 소리가 나긴 했는데 무릎이 아픈지도 모르겠다.
어머니! 아버지! 아들 잘못하면 먼저 간 부모님을 따라서 좋은 곳에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혹시 그곳에서 보기 된다면 ‘허허. 우리 아들 녀석 참 많이 커서 돌아왔구먼. 여보! 우리 아들이 왔어요!’라며 반겨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으아! 이게 아니라! 그러니까 왜 사랑의 도피를 이딴 곳으로 왔냐고! 그리고 왜 나를 낳은 거야!
오. 나랑 같이 달리기 시합을 했던 수많은 친구들아. 너희들은 왜 나를 이기지 못한 거야! 왜 나를 시험에 들게 하시나요. 신이시여! 방금 전에 욕한 거 취소 할 테니 어서 나 좀 구해줘요!
“아, 혹시 내가 귀족일까 봐 그러는 거야?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나는 귀족이 아니고 성직자야. 옷보면 딱 알잖아?”
이런 나의 간절한 바람이 닿았는지 모르겠다. 헤헤. 신님 감사합니다. 이런 소원은 바로바로 들어주시네. 근데 미리미리 이런 일이 없도록 사전 예방을 해달라고요!
무릎을 꿇었던 거와 마찬가지로 빛의 속도로 일어나서 흙이 묻은 무릎을 탁탁 털었다. 여태까지 긴장을 해서 몰랐는데 급하게 꿇다보니 무릎이 깨진 것 같다. 아파라! 무릎을 어루만지며 엘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의 말처럼 옷이 조금 특이했다. 온통 흰색 옷에 요상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옷 중간 중간에 흙으로 보이는 것들이 묻어있었다. 근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이 동네에서만 살았고 두어 번 정도만 큰 도시로 가봤지 다른 곳으로는 가본적도 없어. 심지어 성직자는 처음 본단 말이야!
여러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귀찮아서 엘머를 쳐다보며 입안에 침을 가득 모와서 ‘퉤’하고 뱉었다. 그래도 엘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방실방실 웃지 말란 말이야! 사람 골려놓고 그렇게 좋아? 내가 성직자가 성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
“내 이름은 캬스발이다. 캬스발. 앙? 이 돌멩이가 인상에 더 잘 남을 정도로 평범하게 생긴 망할 작자야! 그런 거라면 얼른얼른 말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망할 돌팔이 성직자가!”
“그건 그렇고.”
“뭐가 그건 그래! 중요한 거야! 빨리 사과해.”
“뭐가 미안한진 모르겠지만…….”
“뭐가 미안한지 모르겠다고? 왼손과 오른손의 이중주 합창곡으로 한 번 신명나게 맞아볼래? 몇 악장까지 해줄까? 앙?”
나는 어쩔 수 없는 소인배인가 보다. 덴버라는 무지막지한 벽. 아니 무지막지하게 큰 가축에게는 실실거리고, 이 망할 성직자가 귀족이라고 생각했었을 때에는 그저 빌빌댔었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걸 알고 나니까 이렇게 변하니 말이다. 나 되게 쉬운 남자네. 나의 가벼운 모욕에도 엘머는 여전히 얼굴에 웃음음기를 띄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동전 하나를 꺼내들었다.
“캬스발이라고 했지? 네가 나한테 접근한 이유가 그 빵을 팔려는 거겠지? 이거 진짜 1펜스야.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이것밖에 없고 이게 내 전 재산이야. 그 빵 나에게 팔래?”
엘머가 말을 마치자 동시에 그의 배에서 꼬르륵 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1펜스를 보자 그에게 품었던 적개심이 금세 풀려버렸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성직자가 이 세상에서 최고로 착해 보이기까지 했다. 오우. 젠장. 내가 진짜 남자에게 끌리는 건가? 아니면 돈의 효과인가?
1메소가 가장 기초적인 화폐 단위이고 한 사람당 기본적으로 한 달을 살아가는데 최소한의 돈으로 1페소가 필요하다. 빵 하나에 2메소라고 생각하면 되고 1000메소가 1페소이다. 그리고 100페소가 모여야 1펜스가 된다. 그러니까 1메소가 몇 개가 모여야지……. 으아악! 머리 아파! 1, 1펜스. 1펜스면 내가 몇 달 동안 일을 안 해도 되는 돈이란 말인가! 어쩌면 내가 평생을 살면서 만져보지도 못 할 그런 돈 일지도 모른다!
지금 확 빵을 팔아버릴까? 순간 갈등이 되긴 했지만 곧, 현실을 직시했다. 그렇게 한다면 아마 덴버 아줌마에게 빼앗기게 되겠지. 그리고 제대로 일을 안했다고 맞을 거야. 아마 내가 엘머에게 제시한 왼손과 오른손의 합창곡으로 신명나게 맞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그래. 난 캬스발이다!
왼손으로 빵을 쥐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엘머의 시선도 내 왼손에 머물렀다.
“돈.”
“같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봐. 성직자씨. 자네 여행이 처음 아닌가?”
엘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은 빵에 고정한 채였다.
“지금 자네가 상황을 모르나 본데. 세 종족하고 마찰이 있는 건 알고 있지?”
“물론이지. 그래서 내가 지금…….”
“이봐. 이봐. 어른이 말하면 들어야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내가 형…….”
“조용히 하라니까? 지금 상황이 아주 심각해요. 이 아저씨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주 그냥 걱정이 되. 아이고. 삭신이야. 죽겠네. 온 몸이 여기저기 쑤셔서 안 아픈 데가 없어요. 저기 널브러져 있는 아저씨 보여? 학생?”
할렌 아저씨 고마워요. 어렸을 적에는 아저씨가 말도 안 되는 무용담을 들려주실 때에는 재미있었어요. 뭐,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말이에요. 그리고 가끔씩 절 신경써주시는 것도 감사했어요. 근데 아저씨. 제가 나이가 먹고 항상 아저씨보고 술만 먹고 다닌다고 뭐라고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되고 있네요. 그거 알고 있어요? 그럼 그렇게 가만히만 있어주세요. 아니, 그렇게 움직이려고 꿈틀대지 마세요. 아니. 그러지 말다니까요? 맞아요. 그래. 그거에요. 그래요. 그냥 죽은 듯이 계세요. 어쩌면 제가 1펜스 받으면 아저씨에게 술 사드릴지도 모르겠거든요. 그럼 아저씨도 좋잖아요? 그렇죠? 물론, 여기에 어쩌면 이라는 전제가 들어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시면 안 돼요.
“학생. 저 아저씨는 학생이 지금 사려고 하는 빵 한조각도 못 얻어먹어서 저렇게 되어버렸다고. 알고 있어? 하긴 모르겠지. 이 아저씨도 곧 저렇게 되어버릴지도 모르겠어. 신전에 계시면서 고귀하게 자라신 성직자 같은 분이 우리 같은 하급 계층의 일까지 생각할 겨를이 있겠어? 내가 너한테 머리를 조아린 건 내가 너희 망할 성직자들이 신전에서 안 나오니까 처음 봐서 그런 거라고!”
뭔가 뒷말을 이상하게 해버린 것 같지만 엘 머는 꽤나 큰 충격을 받은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혼자 “이렇게까지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니.”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오른손을 뻗었다.
“학생. 이런 상황이니 이 아저씨가 돈을 먼저 달라는 거야. 학생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고. 물론 빵을 먼저 줄 수도 있겠지. 근데 줬는데 만약 학생이 도망치면 아저씨는? 아저씨는 이게 얼마 남지 않은 빵이라고. 우리 누워계신 어머니가……. 크흑.”
빵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야. 그래도 우리 집이 아무리 가난하다지만 어떻게든 먹고 살겠지. 덴버 아주머니만 아니라면 다른 마을 사람들은 나름대로 친절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말이야 거짓말이더라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성직자군.
엄마 미안. 나 엄마를 들먹였어. 근데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거니까 엄마도 이해해주겠지? 엄마도 좋은 곳에서 아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있을 거야. 언제까지 덴버 아줌마 밑에서 일하라는 거야? 그것도 정도가 있지. 가끔가다 이렇게 운수 좋은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내가 이 돈 받으면 당장이라도 집을 옮기고 만다!
엘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손바닥 위에 1펜스를 올려놓았다. 1메소보다 크고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동전 뒷면에는 이상한 인물이 그려져 있었다. 아. 1펜스가 이렇게 생겼구나. 처음보네. 그러나 여전히 엘머는 빵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꼬르륵 이라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미, 미안. 이렇게까지 사정이 안 좋을 줄 몰랐다. 그럼 반만 주면 안 될까? 아니야. 그건 너에게 너무 가혹한 것 같아. 반의반? 아니, 한 입. 딱 한 입만. 미안하지만 한 입만 주지 않을래?”
빵으로 천천히 동그라미를 그리자 엘머의 눈동자도 빵을 따라서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거 재밌는데? 계속하고는 싶지만 저기 멀리서 덴버 아주머니가 빨리 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보이기에 계속할 수 없었다. 빵을 엘머의 코까지 가지고 갔다가 재빨리 땠다.
“1펜스는 냄새 값. 빵 값이 많이 올라서 말이야. 냄새라도 맡은걸 고맙게 여겨.”
“뭐, 뭐? 장난치지 말고. 네가 어려운 건 알겠는데. 진짜 딱 한 입 만 부탁할게.”
“그리고 형.”
엘머가 부탁하는 말은 상큼하게 무시해주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나는 친절하게 형이라고 존대를 해줬다. 너무 섭섭해 하지 마. 그리고 꼭 이 일이 끝나고 돌아올 때 신전에 신고를 해서 돌아와야 해. 빌어먹을 우리 마을을 신고해 달라고! 관군, 아니 신군? 하여튼 군대를 이끌고 와! 그럼 내가 업어주지. 원한다면 동네 한 바퀴도 돌아줄 수 있어. 그건 나에게 너무 힘들 까나? 그럼 그냥 업어주지 뭐.
“형. 혹시 뜀뛰기 좋아해?”
엘머는 여전히 빵에서 눈을 못 때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손을 빵으로 뻗기 시작했다. 그런 엘머의 손을 뿌리쳐줬다. 나는 열심히 앞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약속 했던 것처럼 덴버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둑이야!”
덴버 아줌마의 큰 목소리가 마을의 대대적인 행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