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게르힌데르 연대기. - 프롤로그.
그의 존재는 죄악이자 재앙이었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에는 불길이 치솟았다.
그의 손길에는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의 숨결이 닿는 곳에는 모든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의 코에는 피 냄새만이 남았으며 그의 귀에는 비명만 들렸다.
그의 두 눈 속에는 깊은 공허함만이 남았다.
그가 머무른 곳에는 재앙만이 찾아왔다.
그가 머물다 간 자리에는 지옥만이 남아있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다가가면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그 누구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는 혼자여야 했다.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며 그렇게 살아가야했다.
사람들은 그를…….
―크라비스의 서. 지은이 엘머 라이돌프. 1페이지 첫 번째 줄.―
기원전에 살아있었던 위인들 중 가장 자료가 많으며, 살아있던 성자라고 칭송 되어진 엘머 라이돌프(이하 엘머.)가 쓴 책들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크라비스의 서에 쓰여 있던 구절입니다. 고대어로 쓰여 있기에 해석이 정확하게 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운 흔적 때문에 이 뒤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글에 나오는 ‘그’가 실존 인물인지도, 이름에 대해서도 밝혀지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엘머가 쓴 자서전의 해석이 진행됨에 따라 ‘그’에 대한 자료라고 주장할 만한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자서전 중에서 나온 구절입니다.
나는 이제야 그가 왜 나를 증오하는지,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오만이었으며 자만이었다. 나는 그에게 큰 죄를 저질렀었으며 내 목숨을 바치더라도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다. 공허함으로 가득 찬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는데 내가 그를 죄악이자 재앙으로 만든 것이 되어버렸다. 그에게 아무런 위로를 건넬 수도 없었다. 그는 이제 혼자여야 했다. 이제는 다시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며 그렇게 살아가야 했다. 그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엘머 라이돌프의 자서전. 347페이지 14번째 줄.―
이 구절 때문에 ‘그’가 위의 이야기의 ‘그’와 동일 인물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잇따라 나온 자료에 무게가 실렸습니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그’가 엘머의 자서전 초반에 나오는 도둑 꼬마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지 않아 제대로 된 논의를 못하지만 적어도 ‘그’가 가공의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이라는 것에 대한 무게추가 기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점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여태까지 엘머는 자신이 만난 이들의 이름을 적어두었으며 한 번도 사람들에 대해 대명사로 지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 언급된 ‘그’에 대한 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고, 또 그를 알고 있는 듯 한 태도를 보이기까지 합니다. 과연 ‘그’는 누구일까요? 엘머는 왜 ‘그’의 이름을 적어두지 않았을까요? 이 부분은 엘머의 자서전이 완전히 해석이 되어야지만 풀려야 할 과제인 것 같습니다.
―재미있고도 쉽게 배우는 고대 역사. 지은이 이건오.―
가차없는, 사정없는 비평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