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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에 관한 시 모음> 박덕중의 '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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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에 관한 시 모음> 박덕중의 '혀' 외

+ 혀

혀는
칼이 되기도 하고
꽃이 되기도 한다
화(火)가 되기도 하고
빛이 되기도 한다
혀에 찔려
피 흘리는 사람
혀로 불 붙여
가슴 타는 사람



혀뿌리가 무섭다
(박덕중·시인, 1942-)


+ 혀

보검은 둔한 칼집 속에 머무네, 빛을 감춘 채.
(유용선·시인, 1967-)


+ 혀舌
  
다물면 뵈지않고
길대야 네치寸인데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네그려

창검槍劍도
무색하구나
가공可恐스런 무기여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혀

육신의 안녕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자리라서
청렴결백하게 옥석을 가리라고
조물주가 지정해준 음식물 들머리 엄지가락

볼 수 없어
짐작만으로 더듬거리지만
한번 경험한 맛은
숟가락 놓을 때까지 기억하리라

척척한 굴속에 갇혀
평생 누워지내려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그리하여 바깥일까지 참견하고 싶은 것이다

하여간 참을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침묵훈련을 시켜야 한다
까딱하면 묘혈을 파는
간사하기 그지없는 것이라서
(권오범·시인)


+ 똑똑한 혀

한평생 한솥밥 먹고 살았건만
갈수록 멍청해지는 머리에 비해
뇌도 없는 것이
어찌나 약삭빠른지

눈은커녕 귀마저 없이
척척한 굴속에 누워 빈둥대다가도
무엇이 들어오면 금방 알아
기억력 하나 귀신같은 너

요건 쌀밥 요건 보리밥 요건 소주 요건 막걸리
갓김치와 씀바귀나물이 함께 들어가도
맛을 하나하나 분리해보고 알았으니 즐겁게 통과
그러다 뉘나 머리카락이라도 만나면 기겁하는 여린 것

평생 입술과 동업이지만, 말 만드는 기술은 더 기막혀
오만가지 소리 잘 낳으려고 적당히 몸 폈다 오그렸다
입천장에 무시로 알아서 붙었다 떨어졌다
좌우지간 너 때문에 내가 삶에 대한 맛을 알아
(권오범·시인)


+ 혀

혀는 부드럽다
직설을 좋아하는 혀
혀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
혀로 기만하고 돌아서서
낼름 내미는 카멜레온의 혀들
눈뜨면 혀부터 다듬고
혀에 입힐 옷에 대하여
고민하는 사람들
전쟁을 일으키는 혀
비수가 되고 총알이 되어
혀로 망하는 숭고한 사상
평생을 못된 것 핥아도
불행하게도 닳지 않는 혀
혀의 중심이 목구멍이 아닌 사람들
혀 짧은소리로만 을러대다가
갈라터진 우리의 입술
(박만식·시인, 전북 익산 출생)
  
  
+ 연장론

다 꺼내봤자 세 치밖에 안 되는 것으로
아이 눈에 박힌 티끌 핥아내고
한 남자의 무릎 내 앞에 꿇게 만들고
마음 떠난 애인의 뒤통수에 직사포가 되어 박히던,
이렇게 탄력적인 연장이 있던가
어느 강의실, 이것 내두른 대가로 오만 원 받아들고 나오면서
궁한 내 삶을 먹여 살리는
이 연장의 탄성에 쩝! 입맛을 다신다
맛이란 맛은 다 찍어 올리고
이것 이리저리 휘둘러대는 덕분에 내 몸 거둬 먹고살고 있다면
이처럼 믿을만한 연장도 없다
궁지에 몰릴 때 이 연장의 뿌리 舌舌舌 오그라들고
세상 살맛 잃을 때 이 연장 바닥이 까끌까끌해지고
병에서 회복될 때 가장 먼저 이 끝으로 신호가 오는
예민한 이 연장,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사마천은 이것 함부로 놀려서 궁형의 치욕을
한비자는 민첩하게 사용 못한 죄로 사약받고 죽었다는데
잘못 사용하면 남이 아니라
내게 먼저 화근이 되는
가장 비싸면서 가장 싼
천년만년 녹슬지 않는
붉은 근육질의 저!
(김나영·시인, 경북 영천 출생)


+ 불타는 혀

뿌리로부터 끌어올리던
허다한 낱말들
하나 둘 단식에 든 지 열흘
허욕의 이목구비 다 틀어막고
허리 꼿꼿이 서서
먼 눈빛
마음의 무게를 줄이며
가볍게, 가볍게
뜨는 몸
몸이 흔들릴 때마다
하늘하늘 내려앉는
금빛 나비떼
바싹바싹 몸은 여위고
가뭄 속 황토밭처럼
점점 붉게 타는 혀
스스로 제 혓바닥을 다 태워
말을 버리니
마침내 알몸으로 홀홀 떠오르는
가을 나무
(홍일표·시인, 1958-)


+ 붉은 혀

몸은 태우고
어둠 속에 살아남은
붉은 혀.

날름거리는 혓바닥이
제 입술을 찾아
어둠 속을 헤매는,
죽지 않고
끝내 죽을 수 없는,

저 광기(狂氣), 타오르는 불꽃
네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
(이수익·시인, 1942-)


+ 혀

언제나 진실을 말한다고?
말씀은 정체를 감추는 갑옷
세상은 온통 가면무도
모든 혀는 허위虛僞의 창槍

우리들 내면의 진실은 항상 언어의 뒤에 숨는다.
싫어하지만 좋아하는 척 말하기도 하고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척 말하기도 한다.
진실을 말하는 자는 오직 천진한 아이와 천치뿐이다.
우리는 매일 언어의 창으로 이웃을 도륙하고 있다.
(임보·시인, 1940-)


+ 혀 닦기

이 닦기와 입 닦기의 차이는
단지 이와 입 차이밖에는 없다고 믿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 닦기는 하루에 세 번
식후 3분 이내, 3분간 하는
구강외과 영역이고
입 닦기는 하고서도 안한 척하는
윤리도덕 영역이었다

허나 한세상 평안하게 살기 위해선
이 닦기와 입 닦기를 모두 잘해야 한다며
밥숟갈 놓기 무섭게 아내는  
개 쫓듯 화장실로 나를 몰아내었고
(심지어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있는 척도, 아는 척도, 행한 척도 하지 말고
그저 입 싹싹 닦고 사는 게 최고라며
출근할 때면 으레 닦달하는 말을 들으면서
이제부터라도 나는
혀 닦기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늘도 세 치 혀를 날름거리며
얼마나 많은 허위와 가식의 죄를 범했던가
때론 과장의 말로 자신을 변호하거나
잘못을 얼버무리고 또는
진심으로 뉘우치는 듯 표정까지 덧붙이면서

혀를 잘라내고는 살 수가 없다면
밤마다 내 죄악의 뿌리는
내 몸을 덮고
내 식솔들의 가슴을 덮고
내 작은 아파트를 덮고
내 직장을 덮고 아아,
그 엄청난 죄는 마침내 세상을 덮으리니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정치인들도 많지만)

차라리 아무 말 않고
주검처럼 엎어져 사는 것이
무시로 해야 하는 혀 닦기보다는
훨씬 편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우리 집 가훈은 지금부터 침묵이라고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양승준·시인, 1956-)


+ 입 안의 혀

나는 만두 속의 쏘가 되지 못하면서
세탁소의 물뿌리개가 되지 못하면서

보세요
그림 속의 양이나
목욕하는 裸婦가 되지 못하면서

내 말 속에 들어오라고
내 말을 이해하라고

얼마나 불가능한 소망입니까
시인들은

당신이 내 입 안의 혀가 되지 못하듯이
나는 세상 밖에서 늘
외마디 소리로 남습니다

아아,
(김영천·시인, 1948-)



+ 詩를 쓰려거든 세 치 혀를 자르라

반계리 은행나무는
천년, 태고의 숨을 몰아쉬며
꼭 다문 입의 혀를 자르고 있었다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있었다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천 년 세월을
가슴에 묻고 있었다

언제라도 떨어져 나갈 듯한 두꺼운 껍질은
천 년 세월을 비집고 들어간 발자욱처럼
내 詩의 벌집같이 꿀을 담아 두고 있었다

(詩 스승이 없는 내가 반계리 은행나무를 마음속에 詩 스승으로 모시고 스승님이 주시는 은행 알 하나 문질러 까먹는데, 똥 냄새뿐이다 이게 무슨 숙제일까 몇 년을 생각하다가 겨우 생각이 미치는데, 똥 냄새인지 스승의 숙제인지 구분 못하는 놈이 무슨 시를 쓰겠는가 당장 세 치 혀부터 잘라버려야 할 것 같다 세상 단맛 쓴맛 다 보고, 들을 것 볼 것 다 듣고 보고 무슨 제왕이 되어 詩를 쓰겠느냐는 꾸지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옳다 옳다 반계리
은행나무 詩의 스승께서
詩를 쓰려면 세 치 혀를 자르고
천 년 만년 읽을 수 있는
지문 같은 詩를 쓰라 한다
(임영석·시인, 196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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