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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 관한 시 모음> 정연덕의 '지하철에서 만난 그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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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 관한 시 모음> 정연덕의 '지하철에서 만난 그대' 외

+ 지하철에서 만난 그대

우린 낯설지 않다
보통권 한 장이면
서울의 누구든지
기쁘게 만날 수 있다.

지상의 행차를 거부하고
지하로 뛰어든 우리는
같은 부류의 영웅들 아니냐.

작은 꿈 소중하게 마주하며
한강을 건너면 어떻고
구파발로 가면 어떠냐.

벌써 봄은 와 있고
우린 그걸 이야기라면 된다
지하철에서 만난 그대여

벌써 우린 낯선 얼굴이 아니다
조금씩 가슴을 열 수 있는
이 나라 보통사람들 아니냐.

지하철에서 만난 그대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웃음을 가꾸며 땀을 흘린다
밝은 내일을 향하여.  
(정연덕·시인, 1942-)


+ 지하철 서곡

출근 시간이면 내 배는 출산을 앞둔
임산부보다 더욱 배가 부르다
꾸역꾸역 입을 통해 밀려오는 사람들
숨쉴 수 없을 만큼 촘촘히
어깨와 어깨, 힙과 힙이 키스를 한다
빨갛게 먹음직스럽게 익은 연시처럼
매달린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가냘프게 들려오는
안내 방송에 토끼 귀처럼
쫑긋쫑긋 세우고 나갈 출구를 찾는다
인천에서 출발한 나는 부평, 부천을 지나면서
출산 앞둔 숨가쁜 임산부처럼
헉헉거리기 시작한다
온수역에 다다르자
마음껏 포식했던 나의 배가
쭈욱 빠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구로역에서, 신도림역에서
먹었던 것을 또 게워 내고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고
힘겨웠던 임산부의 숨결은
조용한 숨소리로 바뀐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나는
의정부 명찰을 달고 달린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윤용기·시인, 1959-)


+ 새벽 지하철을 타며
    
도심은 커다란 유리성
새끼줄 같은 삶의 끈을 이어간 서민들
철창 없는 감옥에 갇혀 있다
지하철 객실의 희미한 백열등 불빛은
마음의 물결 따라
바람처럼 떠돌다가
어둠 속에 묻히고  
가슴속 아린 영혼은
슬픔을 참아내는 작은 별이 되어
새벽길에 보석처럼 박힌다
작은 사랑에 행복하고
쓴웃음에 수줍어하며
옅은 숨소리로 하루를 여는 사람들
오늘도 새벽 지하철 안은
꿈속에서 손길에 닿을 듯
아른거리는 나비 되어
희망 보따리 한 아름 안고
어두운 도심 한가운데를 건넌다
(미석 김정호·시인, 1961-)


+ 저녁 지하철
  
사람들 살아가는
세상 내음들
지하철 안 가득 실리어 있다
살아가는 사람들 풍기는 내음
저녁 지하철 가득
싣고 달린다

구겨진 옷에 스민
진한 땀내는
하루 일손 젖어든 피곤한 내음
입 밖으로 흘려내는
취한 술내는
지친 몸 씻어내린 입가심 내음
한 구석 남아있는
고운 향내는
헤어지기 아쉬운 연인들 내음

달려가는 저녁 지하철에는
하루를 살고 가는 사람들 있다
사람들 살아가는 내음이 있다
(오보영·시인, 충북 옥천 출생)


+ 지하철에서

목적지를 정하고
안길 수는 있지만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네 품안으로
하루해를 힘들게 붙들던
삶들이 들어간다
허기진 네 창자 속에서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하루살이 같은 육신이
살아 있음을 보이려 꿈틀거린다
보이는 건 어두운 벽
들리는 건 요란한 기차 소리뿐
그러나 사람들은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오래되지 않아 네가 내려놓을
어둠 끝에서
또다시 희망을 꿈꾸는
나를 보기 때문이다.
(조철형·시인)


+ 지하철에서
  
잘못 내린 역에서 돌아가려고
남들 다 빠져 나온 출구
되짚어 들어가는데
이 길 먼저 지나간 사람들
뒷모습이 하나씩 지워진다.

여기까지 나를 밀고 온 세월과
예고 없이 길을 막던 차단기
앞만 보고 걸어온 삶이
이토록 가볍게 지워지다니

터널 지날 때마다
언뜻언뜻 비치던 얼굴들도
아하,
거미줄 같은 땅 밑 길
몸 낮추고 보폭 줄이며
느리게 걷는 법 가르쳐주려고
날마다 거울 저 쪽에서
그렇게 손짓하고 있었구나.
(고두현·시인, 1963-)


+ 지하철에서

잠이 들었다
내릴 곳을 두 역 남겨두고
잠깐 눈을 감고 있는다는 것이
그만 종점까지 오고 말았다

막차였는데
시간에 쫓겨 마구 뛰어와
겨우 탈 수 있었는데
후회스럽고 막막했다

지갑에 돈도 다 떨어지고
전화카드도 없는데
아내는 사정도 모르고
얼굴색이 변하고 있을 텐데

여지껏 살아온 삶도
깜박 깜박 잠들다
지나쳐 온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온 세상을 다 고민하며
주머니마다 다 뒤지다가
뒷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잡히는 느낌
"아 그렇지! 만원 짜리 한 장"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자신을 다시 느껴본다
"그래도 난 괜찮아! 아직은 여유가 있잖아!"
만원 짜리 한 장 덕택에
소시민적 안도감을 다시 얻는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지하철역 남자

집으로 돌아가려 지하철을 타는데
계단을 내려가려 하니 한 노숙자가 누워있다
누워있는 것도 그냥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천하 태평스럽게 대(大)자로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이 험한 시절에
누워있는 것도 이상한데
어떻게 저리 편안해 보일까 생각해보니
대통령도 그 높다는 위치에서
좌불안석하는 마당에,
저 사람 복도 대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옷은 누추해 보이지만
마음은 저리 태평하니,
겉은 멀쩡해도
늘 불안해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누추하고도 태평한
저 노숙자의 마음 씀씀이가
의미하는 바가 크지 않은가
(박재동·시인)


+ 지하철 노선표가 주는 사랑의 교훈

만남에서 출발해서
사랑까지 도착하려면
호감이라는 환승역에서
갈아타기를 잘해야 한다

갈아타기를 잘못해서
운명의 장난처럼
사랑까지 갈 수 없는
가슴 아픈 인연이 많으니까
(김병훈·시인)


+ 지하철에서

서울에는 한강 모래알만큼
기독교인들이 많다.

일요일 11시 전후만은
지하철은 앉아서 갈 수 있다.

그래서 이 시간대만은
지옥철이 아니라
천국철이다.

찬송가를 부르는 동전냄비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교회로 가서인지
지하철 안이 텅 비었다.
(김시종·시인)


+ 지하철  

잿빛 교도소
하루에도 수만 번
견고한 쇠문이
열리고 닫힌다

들어갈 땐
낯선 이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스스로 장막을 친다

갇힌 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듯
무장해제되어
손잡이에 매달렸다

쏟아지는 사람들
악어 입 오물 토해
위선의 탈을 벗기어
세상 밖으로 내몬다

남겨진 자에게
던져진 수의(囚衣)
무감각한 회개
전원 사면 복권이다

반복되는 구속과
석방의 악순환
(공석진·시인)
  

+ 지하철 안

하이고,
지하철 안 쌈이 났네.

나이 먹은 여자
"양보 좀 하지!"

젊은 여자
"애는 어디 앉고? 왜, 양보 하누?!"
  
"애가 좋은 거 배우겠다!"

자리다툼에
여자 둘이 나이 따지네.

고래고래
화통을 삶아 먹었나
목청들도 씩씩하지.
(고은영·시인, 1956-)


+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을 타고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피곤한 몸을
맡긴다 이대로 목적지를 지나 계속 가고 싶다 그러나,
불은 꺼지고 더 이상 가지 않으니 어서 내리라는 역무
원의 안내 방송이 왕왕 댄다

  인생도 어려운 고비 넘기고 이제 살만하면 끝났다고
어서 내리라고 황혼이 찾아든다.
(김영월·시인이며 수필가, 1948-)


+ 지하철 환승 계단에서
  
어깨를 부딪히며 흘러가는
너와 나의 인연은 무엇이냐
향기 짙은 머리 결이나 살짝 위로 치켜든
눈 매무새가 낯설지 않은 얼굴
어디선가 한번은 만났을 것이다마는
오류동 산 27번지에서 먹고 내려온 아침이
벌써 힘을 잃어 기억이 문을 열지 않으니
오늘은 모른 체하기로 하자
열고 또 열어도 끝없이 마주치기만 하는
세상의 문 앞에서
언제나 막막한 너와 나는, 봄날
거리를 배회하는 수양버들 꽃씨처럼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는
누구의 쓸모에도 들지 않는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숨만은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고 있다가
오늘 아침 너와 나의 짤막한 스침에
또 한번 나이테를 풀고 가는 것이리라
행여 눈먼 행운이라도 따라
저 황금빛 바다에 던져진다해도
너와 나의 가슴은 더욱 허전할 것이니
또 어느 우주의 귀퉁이에서
한참을 서성인 끝에 만날 것이다마는, 그땐
겹겹이 눌려 더욱 납작해진 인연의 보따리
다 풀어 제켜 놓고라도
우리 모른 체하지 말자
(김승동·시인, 1957-)


+ 지하철에게

우리집 베란다 창문 너머로는
창동 지하철 기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아파트 담벼락인 양 늘어서 있는
꽤 울창한 나무들의 숲이
창동 기지와 바로 맞닿아 있다

거미줄처럼 얽힌
가느다란 선로들을 따라

빽빽이 들어차 있는
족히 수백 량은 되는 지하철들

새벽부터 밤 이슥하도록  
수많은 승객들을 실어 나르는
고단한 하루의 운행을 마치고

이제는 가지런히 정렬하여
단체로 오수를 즐기는
지하철들 위로

사월의 마지막 날의  
따순 햇살이
사뿐히 내려앉는다

이따금 지하철역을 빠져 나와
잠시 햇살을 보기도 하겠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어둠 속에 살아야 하는
저 지하철들은
밝은 햇살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저 지하철들 중에는
나를 실어 나른 녀석도 있으리라

잠시의 휴식이 끝나면
다시 분주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고단한 생의 모든 근심과 피로를 잊고
깊이 안식하여라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하는
착한 지하철이여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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