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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에 관한 시 모음> 천상병의 '담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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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에 관한 시 모음> 천상병의 '담배' 외

+ 담배
 
담배는 몸에 해롭다고 하는데
그걸 알면서도
나는 끊지 못한다.

시인이 만약 금연한다면
시를 한 편도 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시를 쓰다가 막히면
우선 담배부터 찾는다.

담배연기는 금시 사라진다.
그런데 그 연기를 보고 있으면
인생의 진리를 알 것만 같다.

모름지기 담배를 피울 일이다.
그러면 인생의 참맛을 알게 될 터이니까!
(천상병·시인, 1930-1993)


+ 담배

나의 담배는
그대를 만나고 싶은 얘기라우
아마 말없는 시간이 타나 보우
(김광섭·시인, 1905-1977)


+ 담배
   
담배를 먹는다고 한다.
왜 먹는 것일까
담배는 음식과 구분된다.
권련이건, 시가건
젓가락을 대신해
검지와 중지로 집는 담배,
담배는 연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실은
불을 먹는 것이다.
한 모금
- 후욱 -
가슴속으로 빨아들이는 불,
육신은 밥으로 살지만
정신은 불로 산다.
용암을 빨아들여
화안히 등불을 켜든 꽃처럼
내 원고지의 빈칸을 밝히는
하늘의 불,
태초에
천상의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가
맨 처음
이 지상에서 했던 짓은
아마도
담뱃불을 붙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오세영·시인, 1942)


+ 담배 연기처럼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 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 다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두레박질이여.

사랑해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맷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퍼 못 다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신동엽·시인, 1930-1969)


+ 담배연기
   
들국화는 아직도
화랑담배연기 그 빛깔로 꽃피누나
낙동강 전투의 그 격전 흔적대로
보라 물빛보라
들국화는 천지베까리 예대로구나
철모 나뒹굴던 그 기슭 그 골짝에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눠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여>
내 열 살 아잇적의 애창노래대로
모든 담배연기는 그 연기 빛깔이다
1950년 그해 가을의 빛깔이다.
(유안진·시인, 1941-)


+ 담배

심심할 때
아주 쪼금 외로울 때
아주 정말 쪼금 슬플 때
뿌옇게 가슴을 메워주는 담배

시가 멀리서 다가오지 않을 때
갈증으로 핏줄이 소스라칠 때

사람이 아름답고
풍경이 아름답고
눈 비 바람이 아름답고
그렇게 아름답고 아름다울 때

음악처럼 속으로 젖어드는
담배 한 모금...
(류석우·시인, 1943-)


+ 첫 담배

새벽에 첫 담배를 태우니
참 좋습니다
여유 있게 커피까지 곁들여
오늘 일을 계획하며 아침을 기다립니다
시간에 쫓겨 아침을 굶을 일도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움직일 일도
늦잠 때문에 피곤해질 일도
다 남의 얘기만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도 난
그대에게 많이 고맙습니다
(원태연·시인, 1971-)


+ 루즈가 묻은 담배꽁초는 섹시하다

새벽 미사가 끝나자 눈이 내린다
어깨를 구부리고 눈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롱부츠를 신은 여자가 가로등 불빛 아래 담배를 피우며 서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이라도 한번 더 보기 위하여 찾아온 것일까
큰수녀님은 싸리 빗자루로 성당 앞에 내리는 눈을 쓸고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가 기어내려온 사내처럼
알몸의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여자 앞을 지나간다
여자는 눈송이 사이로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입술을 내던지듯 담배꽁초를 휙 내던진다
눈길에 떨어진
붉은 루즈가 묻은 담배꽁초는 섹시하다
만나기 전에 이미 헤어지고
헤어지기 전에 이미 만난 적이 있었던가
눈은 내리는데
가로등 불빛 아래 하루살이떼처럼 눈송이는 날리는데
여자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정호승·시인, 1950-)
 

+ 담배·2 

호기심으로 댕긴 불씨 하나가
나도 몰래
고래심줄 인연이 될 줄
짐작도 못했던 어리석은 중생

참을 수 없는 욕구
불사르고 나면
후회로 끈적이는
중독 된 나의 입술

작정하고 미소 흘리는 꽃뱀처럼
피를 말리려고 세상에 태어난
너와의 만남이
내 생애 최대 실수였다

사랑은 맹목적이라지만
무슨 놈의 정나미가
갱년기도 없이
무시로 쪽쪽 빨고 싶게 하는지
(권오범·시인)


+ 그대는 담배연기처럼

인이 박혔다는 말들을 하지요. 그래서 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생각나는 것이 담배라고.
그랬습니다. 그대 또한 내 가슴 깊숙이 인이 박힌 것이어서
잊으려고 하면 외려 더욱 생각나곤 했습니다.

하기사 담배를 끊은 적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쩌다 한나절을 끊었다 치더라도
온 신경이 부르르 떨리고야 마는 금단현상 때문에
결국엔 두 손 들고 말았었지요.
그랬습니다. 내 목을 댕강 쳐버리기 전에는
결코 끊을 수 없는 담배처럼
그대 또한 내가 죽기 전까지는
결코 끊을 수 없는 인연인가 봅니다.
참으로 내 가슴 깊숙이 인이 박힌 것이어서
새벽녘, 잠 깨었을 때 그대부터 찾게 되는가 봅니다.
(이정하·시인, 1962-)


+ 담배

담배는 샀지만
다른 사랑은 사지 않겠습니다

담배는 피웠지만
바람은 피우지 않겠습니다

담뱃재는 털어버렸지만
그대를 향한 그리움은
늘 버리지 않겠습니다

담배꽁초는 버렸지만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은
절대 버리지 않겠습니다
(김병훈·시인)


+ 담배꽃
 
시를 배우는 국어 시간에
다른 애들이 화사한 목소리로
노오란 튤립을 얘기할 때
대준이는 듣고만 있었다
빠알간 장미와 안개꽃과 카네이션과
진달래와 개나리가 다투어 피어나고
아이들 모두 꽃이 되어 깔깔거릴 때
처음부터 표정 없던 대준이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담배꽃이요!"
 와― 무너질 듯 흔들리는
아이들의 꽃밭 한 녘
대준이의 가슴속 새벽 이슬 머금은
피려면 아직 한참인
대준이의 담배꽃
책가방도 되고 청바지도 되고 가끔은
달콤한 아이스크림도 되는
아버지의 억센 손아귀에서 피어나는
대준이의 담배꽃
(김시천·시인, 1956-)


+ 등대와 담배 - 등대 이야기·37
 
뛰어놀던 학교가 자기 앞에서 폐교되고
운동장 잡초처럼 수염이 길어져서야
횡간도 서씨 노인 소풍 갔던 일이 생각났다

마을 뒷산 보리밭 헤치고
큰 바위에 올라
암초에 서 있는 무인등대
그것 보는 것으로 소풍이 끝났는데
지금 인생이 마감되는 마당에서
그 등대가 생각나
가시밭 헤치고 다시 가봤다

그때 소풍 왔던 사람 다 죽고
하추자도에 사는 친구 하나
그도 늙어서 찾아오지 않는다며
그 친구 생각나면 등대를 찾는다는 노인

이제 등대도 찾아가지 못하면
자기도 끝나는 것이라고
담배를 문다
살아서 추억이란 전혀 없을 것 같던 노인
그가 담배를 끊지 않는 이유를
이제 알겠다
(이생진·시인, 1929-)


+ 담배와 신
   
60년 동안 피워온 담배
끊었다오
어떻게 끊었느냐고
허리 분질러놓고 끊었지
신이 나더러 이것 한번 들라 해서
원목 무거운 것 들어올리려다
딱 소리가 나게
허리를 분질러 버렸다오
석달 동안 숨도 크게 못 쉬고
누워 있었소
기둥이 부러졌으니 무슨 일인들 하겠소
척추를 내리치는 번개
기침이 날 때면 반은 죽소
그러니 기침날까봐
담배 죽어도 못 피지
이렇게 해서 담배 끊게 됐다오
허전해서
날마다 빈둥거리면서도
신의 지도를 고맙게 여기고 있다오.
(김규동·시인, 1925-)


+ 담배 묵고    

담배 묵세!
담배 묵세!
짧은 파이프는 그만두고
기인 장죽 끝에 침 바르고 이빨 꽉 물고서
담배나 묵세.
한 대 다 피우고 난 뒤,
놋쇠 재떨이를 땅땅 치면
북쪽 오랑캐랑 서쪽 양코들 모두
겁이 나서 물러갈 테지.
담배 묵고
또 담배 묵고
헛기침 헛기운 헛큰소리나
쳐보세
(이정우·시인)


+ 담배

비쩍 마른
너의 몸뚱이에
불을 지피면

너는 고분고분
제물(祭物)이 된다

기쁠 때나 슬플 때에도
너는 변함없이
나와 함께 했지

제 한 몸
아낌없이 불살라

재가 되어
연기가 되어

세상살이 온갖
괴로움과 시름

가뿐히
허공으로 날려보내는

오!
거룩한 한 생이여
(정연복·시인, 1957-)


+ 담배

한 개비 목숨 태우며 스러져간 당신과의 만남을 생각합니다. 한때 별과 달과 나무와 꽃을 다 거느렸던 우리들 사랑의 사원(寺院)을 생각합니다. 전 당신의 종교였고 당신은 제 신앙이었던 시간의 절정을 생각합니다. 한 세계가 저물고 또 다른 세상이 자라는 이 저녁, 전 사랑의 폐허에서 내뿜는 한숨과도 같은 연기를 입으로 토해 냅니다. 제 속에 남은 당신을 토해 냅니다. 전 당신으로 인해 죽음보다 깊은 병으로 죽고 말 겁니다. 다시는 당신처럼 사랑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당신을 떠나보내야만 했는지. 저를 태워 없앤다 해도 이 심연(深淵)의 고통을 해독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허공 속으로 흩어집니다.
(김하인·시인이며 소설가, 1962-)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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