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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16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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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에 관한 시 모음> 반칠환의 '둥근 시집'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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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에 관한 시 모음> 반칠환의 '둥근 시집' 외

+ 둥근 시집

나무의 나이테 속에 벼려넣은
여름이 있고 겨울이 있다
천 개의 손끝에 송이꽃을 들고 불타는 햇빛을 연모하던 기억도 있다
뭇 바람의 제국주의자들이 흔들고 지나갈 때마다
박수를 치던 치욕의 기억조차 새기어놓았다
나이테는 그 여름의 연서이자
그 겨울의 난중일기이다

나이테는 밑동 잘린 고목의 유고 시집이다
천년 고찰은 저 둥근 시집을 읽으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천년 불상조차 한 번도 저 시 낭독이 싫어 외출한 적이 없다
풍경을 두드리는 바람은 견디기 힘든 유혹이지만
붓다의 처음 깨달음도 저 나이테의 그늘 아래서였다

나이테는 제 가슴에 새긴 목판 경전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좀벌레가 기어간다
저 느린 것들이 나이테의 경전의 마저 읽고 나면
곧 새로 늙은 젊은 기둥이 또 한 세월을 받치라
(반칠환·시인, 1964-)


+ 나이테

동그라미 하나
산새소리

동그라미 둘
산바람 소리

동그라미 셋
산골짜기 물소리

동그라미 넷
산토끼 발자국 소리

동그라미 다섯
내 노랫소리
(전영관·아동문학가)


+ 나이테에서 풀리는 산 소리

봄이 온 산길에
전나무 한 그루
지난해 감긴
산 소리를 풀어내고 있다.

뼈빗대는
새 소리
바위틈을 흐르는
개울물 소리
잎새를 누비는
바람 소리.

음반에서 풀리는 노래처럼
나이테에서 흐르는
산 소리, 봄 소리.
(하청호·아동문학가, 1943-)


+ 나이테

밤이 이슥하도록
꿈길 곱게 펴 주시는
어머니의
다듬이질 소리가 들린다.

꼭두새벽을 흔드는
귀에 익은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은물결처럼 출렁이는
깃발소리가 들린다.

세월의 목소리를
담아놓은
레코드.

나무 곁에 서면
안개 자욱한
먼, 먼 날의
고요가 들린다.
(손광세·아동문학가, 1945-)


+ 나이테를 바라보며

네 그늘엔 조각난 탄피가 박혀 있다.
네 그늘엔 깨어진 거울이 잠들어 있다
지금은 말이 없지만
그 내부를 나는 안다.

물결이 스미듯 풀잎들이 흔들리듯
지나가는 역사는 언제나 순간이지만
네 깊이 심어 둔 日月은
늘 피묻은 싸움인 것을.
(이우걸·시인, 1946-)


+ 나이테와 옹이

매서운 칼바람이었다.
바위도 녹을 것 같은 혹서였다.
가을엔 강물이 곱기도 했지만
어느 해 봄인가,
탄생하는 가지로
몸살을 앓았다.
그 깊은 진통이 옹이로 남아, 지금은
시퍼런 대팻날 물어뜯기도 하지만
아름다워라.
굽이치는 물결의 나이테와
소용돌이 붉은 옹이가
이제는 내 가슴 저리도록
예쁜 너.
너는 나의 분신이다.
(설태수·시인, 1954-)


+ 나이테

세월은 속절없는 것이라고
인간들이 똑똑한 척 말을 만들어 놓고
각다귀판에서 저마다 업을 쌓을 때
나무는 우두커니 서서 세월을 잡아
가슴에 옹골차게 쟁여놓았다

하 세월 똑같이 허비하고도
나의 속은
보이지 않는 나이가 그리움만 키워
아무짝에도 쓸모 없이
욕심과 뒤엉켜 보대껴온 것을

지구가 태양을 짝사랑하는 동안
음지와 양지, 포만감과
허기져 사경을 헤맨 계절까지
나무는 제 몸을 짐작만으로 더듬어
나이마저 보이게 꼼꼼히도 적었으니  
지루했을 우주여행 기록이 참으로 아름답다
(권오범·시인)


+ 나이테 속을 걸어

제재소 옆을 지나다가
담 옆에 켜놓은 통나무 하나를 본다
잘린 단면의 나이테가 선명하다
여러 굽이 에돌아 만들어진 나무 속 등고선
해발 몇백 미터의 산을 품고
걸어온 첩첩의 붉은 산을 품고
나무는 산정을 오를수록
점점 몸피와 나이를 줄인다
청명한 공기와 햇빛으로부터
아득히 멀고 먼
걸음을 옮길수록 숨막히고 어두운
나무의 안, 안
가는 실금의 첫 나이테가
제 생의 마지막 등고선,
최고의 산봉우리였다네
숨을 고르며 오랫동안 산정에 서 있다가
하산한 나무 한 그루가
뿌리, 제 신고 온 투박하고 낡은 신발을
산 속에 벗어놓고
가지런히 누워 있네
(고영민·시인, 1968-)


+ 나이테

그 언젠가
깜깜한 둥근 오막살이집에서
안으로만 숨쉬어 온 열기들이
갑갑함을 못 이겨 사방을 허우적거리다
지친 나머지
그대로 타서 굳어 버린
흔적이 첩첩이 둘러 처져 있고

태양이 뱉어 버린 찌꺼기들이
버짐 되어 더덕더덕 들러붙어 있는
나무둥치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실의 액을 빼앗아 가는
새들의 휘파람 소리만이
보이지 않는 사슬을
열심히 감고 있을 뿐.
(전병철·교사 시인)


+ 나이테

밑동 잘린 나무를 무심히 바라보다
몇 해나 살다 저리 베어졌을까
하나 둘 셋...... 나이테를 센다

나이테 세기를 마치고 제대로 세었는지
다시 한 번 세어보려고 처음 나이테로 간다
동그랗고 예쁘다

다시 하나, 둘, 셋...... 나이테를 센다
동그랗고 반듯이 돌던 나이테가 구부러진다
동그랗고 반듯이 돌던 나이테 앞에 옹이가 있다

나이테는 옹이를 뚫지 못하고 구부러져 돈다
다시 돌아와서도 구부러져 돌고 돌다 다른 옹이를 만난다
또 다른 틈이 생기고 또 다르게 구부러지는 나이테

옹이와 마주칠 때마다 옹이를 뚫지 못한  
밑동 잘린 나무의 나이테를 유심히 바라본다

사람 사람 사이의 옹이를 뚫지 못했던 내 삶의 등고선이다.
(정재현·시인, 충북 괴산 출생)


+ 나이테

우리도 나무처럼
볼 수 없는 곳에
둥근 원을 긋고 살았겠지
가슴 깊은 곳에
희망의 금을 긋고
사랑의 금도 긋고
곰삭은 아픔도
좁은 가슴에 새기며 살았겠지

오늘
짚고 넘어온 세월의 둥근 금을 세다가
나이 탓만 하고 있다오
얼굴은 보이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고
이름은 떠오르는데 얼굴이 흐려지고
아마도 나이테에
건망증의 금이 더해가네 보네
아니면 새겨 놓은 금 하나 지워지고 있나봐.
(노태웅·시인)


+ 나이테의 소리가 들리나요

시계 소리만 커지는 아침 열시
누군가 자꾸 벽을 두드리는 소리
그 울림 집안을 채운다
나가보니 머리에 빨간 모자를 쓴 딱따구리가
콘크리트 벽을 쪼고 있다
많은 나무 놓아주고 하필이면 벽을?
부리 아프게 두드려 보아도 벌레 한 마리 없는
집 한 칸 세들 수 없는 벽을.

눈 먼 새인가?
시각이 멀면 청각이 밝아진다는데
벽 속에 숨겨진 나무 소리를 듣나 보다
잠자고 있는 집안의 가구들을 깨워
그들이 먼 기억으로부터 일어나는
소리를 듣나 보다

저것 보세요!
책상 나무 무늬가 파도처럼 출렁인다
마루 바닥이 물씬 송진내를 토해낸다
창틀에는 푸른 가지가 피어난다
어떤 나뭇가지는 벌써 하늘을 가릴 만큼 커져 있다

빨간 모자 쓴 딱따구리가 휙 날아간다
나무 창틀이 솟아올린 숲으로.
(유봉희·재미 시인)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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