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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16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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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시 모음> 곽재구의 '민들레 꽃씨들은 어디로'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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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시 모음> 곽재구의 '민들레 꽃씨들은 어디로' 외

+ 민들레 꽃씨들은 어디로  

그날
당신이 높은 산을
오르던 도중
후, 하고 바람에 날려보낸
민들레 꽃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하릴없이
무너지는 내 마음이
파, 하고 바람에 날려보낸
그 많은
민들레 꽃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곽재구·시인, 1954-)


+ 서울 민들레  

보도블럭 틈새에
노랗게, 목숨 걸었다
코흘리개 아이들 등교길 따라가다
봄 햇살 등에 업고 장난치며
놀다가, 길을 놓쳤다
꿀꺽-- 서산으로 넘어가는
봄.
(김옥진·시인, 1962-)


+ 민들레의 연가

은밀히 감겨 간 생각의 실타래를
밖으로 풀어내긴 어쩐지 허전해서
날마다 봄 하늘에 시를 쓰는 민들레

앉은뱅이 몸으로는 갈 길이 멀어
하얗게 머리 풀고 얇은 씨를 날리면
춤추는 나비들도 길 비켜 가네.

꽃씨만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
해에게 준 마음 후회 없어라.
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
(이해인·수녀, 1945-)


+ 꽃의 자존심

뭉쳐놓은 듯 버려놓은 듯 땅에 바짝 엎드려
꽃자루 없이 앉은 앉은뱅이 꽃 피우는 노랑 민들레

흔해서 보이지 않고 흔해서 짓밟히는 꽃이 제 씨앗
은빛으로 둥글게 빚는 바로 그 순간

하늘로 꽃대 단숨에 쑥쑥 밀어 올리는 꽃의 마지막
자존심이 있다
(정일근·시인, 1958-)


+ 민들레

민들레꽃 진 자리
환한 행성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가벼운 홀씨들이
햇빛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정거장도
아닌 곳에
머물러 있는 행성 하나

마음의 끝에는
돌아오지 않을
행성 하나 있어

뿔뿔이 흩어질
홀씨들의
여려터진 마음이 있어

민들레는 높이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윤학·시인, 1965-)


+ 민들레

풀씨로 흩날려
산천을 떠돌다
못 다한 넋이 되어
길가에 내려앉다

곧은 심지를 땅 속에 드리우고
초록이 어두워 대낮에도 노랗게 불 밝히며
겸손되이 자세 낮춘
앉은뱅이 꽃이여!

불면 퍼지는 하이얀 씨등
바람결에 흩날려도
머무는 곳 가리지 않는
떠도는 넋이여,
끝없는 여정이여!

뜯겨도, 짓밟혀도
하얀 피로 항거하며
문드러진 몸을 털고
다시금 고개 드는 끈질긴 생명
(손정호·시인)


+ 신기한 노랑 민들레 하나
  
3월 14일
따뜻한 오후
2004년

신기하다
노랑 민들레 하나

잎은 바짝 땅에 붙고
꽃대도 없는
노랑 민들레 하나

자갈 깔린 마당
돌 사이에 피어난
노랑 민들레 하나

놀랍다는 느낌이
가슴에서 배로
스쳐 간다

정말 처음이야
저 노랑 민들레는
정말 신기해
(김항식·시인, 1925년 만주 흑룡강성 출생)


+ 민들레꽃 연가
  
한적한 논둑 길
이름 없는 들풀 속에 자라나서
어느 봄날
노란 꽃잎 곱게 펼쳐
미소를 보낼 때
그때도 당신이 모른 척하시면

그리움으로 맺힌
씨앗 하나하나에
은빛 날개를 달아서
그대 창에 날려보내노니
어느 것은 바람에 방향을 잃고
어느 것은 봄비에 쓸려가기도 하겠지만

간절한 그리움의 씨앗 하나
그대 창에 닿거든
무심히 버려둬서
척박한 돌 틈에 자라게 하지 말고
그대 품 같은 따스한
햇살 잘 드는 뜨락에 심어서
이듬해 봄 화사하게 피어나면
내 행복의 미소인냥 아소서
(이임영·시인)


+ 나는 민들레를 좋아합니다

꽃집에는
민들레꽃이 없습니다.

그것은
팔 수 있는 꽃이
아닌가 봅니다.

마치
우리가
사랑과 다정함
우정과 소중한 사람을
살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야생으로 자라나
한적하게 꽃을 피우고
마침내
자신을 향해
허리를 굽힐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나는 당신에게
민들레꽃 하나를
꺾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꽃이 몹시 원망스런 눈빛으로
나를 보았습니다.

나는
무언가 다른 것이 없는지
두리번거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안드레아 슈바르트·독일)


+ 앉은뱅이 부처꽃

천지 사방에다 무허가 판잣집을 지은 그는
이름 없는 목수였다
갈 봄 여름 없이
연장통을 옆에 끼고
삼천대천세계를 정처 없이 떠돌았다
깎아지른 벼랑 위에 암자를 지었고
지붕 위로 날려온 흙 위에도 초가를 지었다
눕는 곳이 집이었고
멈추는 곳이 절이었다
몇 달 전부터 요사채 말석에
가부좌를 틀고 웅크리고 앉아
문득 한 소식을 얻었는지
노오란 안테나를 하늘로 띄우며
꽃씨 몇 개 날리며 천리 길을 떠나는 그는
제 앞으로 등기한 집 한 채 없이도
바닥에서 자유롭게 살았다

오늘은 민들레꽃이 세운 집 한 채를 보았다.
(고영섭·시인, 1963-)


+ 작은 잎사귀들이 세상을 펼치고 있다

시멘트 블록과 블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돋아있는 민들레 잎사귀들이 작은 실톱 같다
이제 막 시멘트 블록을 힘들게 톱질하고 나온 듯하다
무엇이 저렇듯 비좁은 공간을 굳이
떠밀고 나오게 했을까
저 여리고 푸른 톱날들을 하나도 부러뜨리지 않고
시멘트 블록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있다
이제 꽃대를 올리면 금빛 꿈의 꽃망울이 허공에 반짝
피어나겠지
시멘트 불록과 불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작은 민들레 한 포기 푸르게 펼쳐놓은 세상을 본다
저 푸른 세상 속 그 무엇이 이렇듯 나를 잡아끌고 있는 것일까
아니 나는 짐짓 끌려가 또 한 세상 깜빡 빠져드는 것일까
시멘트 블록과 블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실톱 같은 작은 잎사귀들이 푸르게 세상을 펼치고 있다
(이나명·시인, 강원도 원주 출생)


+ 민들레 압정

아침에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습니다 민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습니다
지난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습니다
꽃을 날려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직도 초록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입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입니다
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는지요
지난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습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 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습니다 물기가 남아
있는 한 홀씨는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습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홀씨는 물기의 끝, 무게의 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 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
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저렇게 헤어집니다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나는 순간, 이별도 함께
시작됩니다 민들레는 꽃대를 밀어 올리며 지극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
홀씨들을 다 날려보낸 민들레가 압정처럼 땅에 박혀 있습니다
(이문재·시인, 1959-)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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