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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15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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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에 관한 시 모음> 강세환의 '글라라 수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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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에 관한 시 모음> 강세환의 '글라라 수녀' 외

+ 글라라 수녀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산골에서
모깃불 피워놓고 저녁 미사를 드리는
글라라 수녀 나의 사촌누나

오징어잡이 고깃배 떠나던 여름날
스물일곱살 처녀로 고향을 떠나
영등포구 가리봉동
마리아 프란치스코 수녀원으로 들어갔던 글라라

예수도 사람의 자식일 텐데
이렇게 박절히 떠나는 자식이 어디 있더냐고
목이 타서 더 울지도 못하던 큰어머니

이제 그녀의 기도는 하늘로 올라가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어디
영등포구 가리봉동 어디
목타던 어머니의 저고리 섶에
우리가 잠든 사이 나직나직 내려오고 있다
나의 누나 글라라
(강세환·시인, 1956-)


+ 단풍과 수녀

저마다의 색깔로
하혈하는
가을 산 속
깊이 젖어드는 비
산을 적시다
회임을 위하여 저무는데
저 높은 곳 맺은 언약
땅에서는 잉태되지 못하는 공복
오래 묵은 지방을 태우는
원색의 고해성사
울긋불긋 피어나는가
하늘이 내려와
승화하는 신앙고백
가을에 기대어 실비처럼 울다
가 닿지 않는 곳으로
높아 가고 있다.
(권성훈·시인, 1970-)


+ 수녀(修女)·1

누구의 아내도 아니면서
누구의 엄마도 아니면서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건 여인아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부끄러운 조바심을
평생의 혹처럼 안고 사는 여인아

표백된 빨래를 널다
앞치마에 가득 하늘을 담아
혼자서 들꽃처럼 웃어 보는 여인아

때로는 고독의 소금 광주리
머리에 이고
맨발로 흰 모래밭을
뛰어가는 여인아

누가 뭐래도
그와 함께 살아감으로
온 세상이 너의 것임을 잊지 말아라
모든 이가 네 형제임을 잊지 말아라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하늘에도
연못이 있네"
소리치다
깨어난 아침

창문을 열고                                                      
다시 올려다 본 하늘
꿈에 본 하늘이
하도 반가워

나는 그만
그 하늘에 푹 빠지고 말았네

내 몸에 내 혼에
푸른 물이 깊이 들어
이제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가난한 새의 기도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필요한 만큼만 둥지를 틀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새처럼
당신의 하늘을 날게 해주십시오

가진 것 없어도
맑고 밝은 웃음으로
기쁨의 깃을 치며
오늘을 살게 해주십시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먼길을 떠나는 철새의 당당함으로
텅 빈 하늘을 나는
고독과 자유를 맛보게 해주십시오

오직 사랑 하나로
눈물 속에도 기쁨이 넘쳐날
서원의 삶에
햇살로 넘쳐나는 축복

나의 선택은
가난을 위한 가난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가난이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도
넉넉할 수 있음이니

내 삶의 하늘에 떠다니는
흰 구름의 평화여

날마다 새가 되어
새로 떠나려는 내게
더 이상
무게가 주는 슬픔은 없습니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수녀 - 자기·5
  
수녀가 사과를 고른다
가장 큰 것을 골랐다가
내려놓고
가장 둥근 것을 골랐다가
내려놓고
가장 붉은 것을 골랐다가
다시 내려놓고는
얼굴을 사과로 붉힌다

수녀는 아직도 사과를 고른다
크지 않게 고르고
붉지 않게 고르고
죄 되지 않게 고르다가
수녀는 늙어버린다
(이생진·시인, 1929-)


+ 당신의 초상 - 수녀

수은등 어둔 눈이 섬벅거리는 병원 뒷들,
창밖을 내다보는 목이 긴 소녀,
핼쑥한 눈가에 오랜 투병이 말라 있다.

꽃을 사들고 수녀가 오고 있다.
(김영호·시인)


+ 수녀님

더운 땀방울
안으로 안으로 모아
당신께 바칩니다.

첫 서원 할 때의  
환희의 떨림을,

오늘 문득 내 곁 스치는
수녀님 보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살그머니 펴봅니다.
    
여자로 태어나
세상 유혹 찬란함
다 버리고 멀고 외로운 길
택해 가셨습니다

두건 두른 머리에
한번쯤 예쁘게 치장하고
파마도 하며 노란 물로
변신을 해보고 싶으실까

하얀 너울 같은 옷을 벗고
얼마나 고운 때깔의 옷도
입어보고 싶으실까?
  
나시도 입어보고
찢어진 청바지도 입어보고

그분 앞에 순결로  
백옥 같은 몸단장하고
정결의 옷 입으며
가장 깨끗한 삶을 사시는 분

꽃 같은 축복이 꽃길 따라
별처럼 쏟아지는데

기쁨이 방울방울
맺히는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데

세상 어떤 것이
그분의 사랑보다
더 클 수 있나요?

세상 어떤 것이
그분의 축복보다
충만할 수 있나요?

그분 안에서
땀으로 이슬로 기도되어
살아가는 삶은.
(김세실·시인, 부산 출생)


+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늙어 가고 있고
언젠가는 정말로 늙어 버릴 것을
저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저로 하여금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특히 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마디해야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저를 사려 깊으나 시무룩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남에게 도움을 주되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가진 크나큰 지혜의 창고를 다 이용하지 못하는 건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저도 결국엔 친구가 몇 명 남아 있어야 하겠지요.
끝없이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지 않고
곧장 요점으로 날아가는 날개를 주소서.

내 팔다리, 머리, 허리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막아 주소서.
내 신체의 고통은 해마다 늘어나고
그것들에 대해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은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얘기를 기꺼이 들어줄
은혜야 어찌 바라겠습니까만,
적어도 인내심을 갖고 참아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제 기억력을 좋게 해달라고 감히 청할 순 없지만
저에게 겸손한 마음을 주시어
제 기억이 다른 사람의 기억과 부딪칠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들게 하소서.
나도 가끔 틀릴 수 있다는 영광된 가르침을 주소서.

적당히 착하게 해주소서, 저는
성인까진 되고 싶진 않습니다만......
어떤 성인들은  더불어 살기가 너무 어려우니까요.
그렇더라도 심술궂은 늙은이는 그저
마귀의 자랑거리가 될 뿐입니다.

제가 눈이 점점 어두워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저로 하여금 뜻하지 않은 곳에서 선한 것을 보고
뜻밖의 사람에게서 좋은 재능을 발견하는
능력을 주소서.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을 선뜻 말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주소서.
아멘.
(작자 미상)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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