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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풍경> 고증식의 '아름다운 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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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풍경> 고증식의 '아름다운 잠' 외  

+ 아름다운 잠

우리 어머니
눈감기 사흘 전에
곡기 딱 끊으셨다

몸부터 깨끗이 비워낸 뒤

평생의 외로움과
일체의 미움 버리고
비로소
깊은 단잠에 드셨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평온한 얼굴로
(고증식·교사 시인, 강원도 횡성 출생)


+ 한 농부의 추억

그는 살아서 세상에 알려진 적도 없다
대의원도 군수도, 한 골을 쩌렁쩌렁 울리는 지주도 아니었고
후세에 경종을 울릴만한 계율도 학설도 남기지 못하였다

그는 다만 오십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살았고
유월의 햇살과 고추밭과 물감자꽃을 사랑했고
토담과 수양버들 그늘과 아주까리 잎새를 미끄러지는
작은 바람을 좋아했다
유동꽃 이우는 저녁에는 서쪽 산기슭에 우는
비둘기 울음을 좋아했고
타는 들녘끝 가뭄 속에서는 소나기를 날로 맞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는 쇠똥과 아침 이슬과 돌자갈을 은화처럼 매만졌고
쟁기와 가래와 쇠스랑을 자식처럼 사랑했다
더러는 제삿날 제상에 어리는 불빛을 좋아했고
농주 한 잔에도 생애의 시름을 잊곤 했다
수많은 영웅과 재사와 명언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이 농부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가 쓰던 낫과 그가 키우던 키 큰 밤나무와
밤꽃이 필 때 그가 완강한 삶의 일손을 놓고
소슬한 뒤란으로 돌아간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이기철·시, 1943-)


+ 어떤 죽음 - 둑길行·18

술 마시고 농약을 뿜어대던 주정뱅이가
드디어 다 저녁 때 쓰러지고 말았다
동네 젊은이는 식모살이 딸에게 전보 치러 떠나고
늙은 이장은 토방에 앉아 부고를 쓰는데
싸늘한 저녁 기운 차일에 덮이고
헛간 지붕 위에는 새하얀 박꽃
죽은 사람 말해야 무슨 소용이랴
사람들은 상두술에 취하여 인사를 나누고
빙 둘러앉아 화투를 치고, 혹은
큰 소리로 춤을 추며 윷가락을 던지다가
마침내 멱살을 잡고 싸워대는데
젊은 아낙은 상복을 말아 눈물을 닦으며
잠시의 쉼도 없이 술상 보아 놓는다
젊은 나이에 어찌 홀로 살아갈 것인가
화톳불은 서서히 꺼져가고
차일 위에 쏟아지는 으스스한 달빛
두엄더미 썩어 가는 구렁목길에는
바람조차 지나는 기색이 없고
어린 상주만 동그마니 화톳불을 지키며
연신 하품을 토해냈다
(구재기·시인, 1950-)


+ 한 소작인의 죽음

한 죽음이 자주 나를 깨운다

숨이 끊겼다 이어지고 가래 끓이며
임종을 앞둔 노인이
둘러앉아 훌쩍이는 식구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인자 마 안 되겠다 두루매기 베끼도!

우얘된 일이고 무신 소리고
훌쩍이던 사람들이 두 눈 뚱그래 멀뚱거리는데
---두루매기 베끼온나 안카나
더 우째 해볼라캤는데......문 열거라

달빛이 열린 문으로 들어와
벽에 걸린 두루마기 푸르게 빛나는데
---문은 와 닫노 인자 마 도저히 안 되겠다 갈란다

사는 일과 죽는 일의 경계가 얼마쯤 될까
한 죽음이 자주 나를 깨운다
평생 소작인으로 살다 가는데
죽음 앞에서 궁상 한번 없다

내 사는 일로 어찌 이리 망설이나
너거 다 묵거라 내 신발 우쨌노
밖에서 기다리마
(백무산·노동운동가 시인, 1955-)


+ 낯선 죽음

인도인 노동자 라나씨는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는 불법 체류자.
낯선 땅에서 보낸 고된 노동의 시간,
과로와 영양 부족으로 얻은 급성 간염.
상한 몸으로 일만 해온 그도 인도엔
부인도, 아들도, 딸도 있는 가장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꺼린다는 3D 업종에서
외로움을 끌어안고 꿈을 키워왔던 라나씨.
"아프다. 아프다."
혼수상태에서도 이 말은 우리말로 했다는 데.
흑달진 그의 얼굴이 아프다. 아프다.
타향살이가 아프고, 낯선 인정이 아프고,
불법체류가 아프고, 보고싶었던 가족이 있어 아프고,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한 한국인이 아프고,
아픔이 없는 곳으로 영원히 떠나서 아프다.
(목필균·시인)


+ 아버지의 죽음

사진첩 속 사진이 퇴색할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기억이 있다.

六·二五 전쟁, 一四후퇴때
빙판길 미끄러지며 미끄러지며
찾아간 첫 피난 마을

피난간 빈집, 안방 차지하고
쌀독이며 김칫독이며 마구 허는 재미에
전쟁도 잠시 잊은 듯 마냥 흥겹기까지 한 피난민들
그 속에 우리도 끼여서 하룻밤을 잤지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튿날 아침, 우리 소 우리 소가 없어진 것을,
우리 여섯 식구의 전 재산을 실은 우리 소

놀란 아버지 찾아나섰지만
소는 이미 어떤 집 마당
큰 가마솥에서 끓고 있고
소의 머리통, 버젓이 전승물처럼 걸어놓고
무법천지 음미하고 있는 그들
"이 소 ,우리 소요"
채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대여섯 장정 우르르 몰려나와

"무슨 개수작이냐"며
소주인도 소처럼 요절낼 듯한
아-그 험한 얼굴들

나는 그때 보았다.
아버지의 하얗게 질린 얼굴
햐얗다 못해 파아래진 안색

그 안색은 그 후에 회복이 되지 않았다.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시고
자주 자주 깨시던 아버지

의사들은 주사바늘 꽂으며
"신장염입니다. 만성 신장염입니다."
꽤나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들은 모른다.

그 후 십 년 동안 곯다가 곯다가 가신
우리 아버지의 정말 병명을
그들은 모른다.
(김동호·시인, 1934-)


+ 어떤 노인의 죽음

며칠 전 나는 장대비를 맞으며
동래 금정산기슭 양로원을 방문했다.
부모처럼 낯익히며 친분을 쌓던 노원장.
타는 가슴 하소연이라도 해 보려는 듯
세상에 이럴 수 있나 한탄하시며
늙고 병든 부모 모시기 귀찮다
어느 날 밤 문 앞에 버려 두고간 노인
하도 불쌍해서 오랜 날 수족 같이 돌봐주다
아픔으로 삶의 붕대를 싸매고
恨의 私利가 된 사신(死身)을
후세상에 가서라도 편안한 휴식 취하라
궂은 일 마다 않고 장례를 치르려 해도
자식이 보호자가 된 노인인지라
자식 허락 없이 장례를 치를 수 없는 법.
그 법 때문에 전산망으로 수소문한 끝에
알고 보니 지척이 천리라
코앞에 자식놈 살면서도
부모 초상조차 내몰라라
아무리 오라해도 나타나지 않아
황천길 가는 길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목숨의 휘장 찢어진 불쌍한 노인의 죽음.
불사 불사 죽음도 불사하며
다 내어준 탕감된 목숨.
가로막고 목 조르고
사슬 묶어 발목 잡는
아- 비명의 외마디 소리
뼈추리는 바람안에 뼈를 깎으며
요즘 노인들은 쓰레기가 된다.
자식 귀찮다 버리는 쓰레기
효도관광 핑계삼아 버리는 쓰레기
그 쓰레기더미에 묻혀 뒤죽박죽
인간 쓰레기 하치장 냄새를 풍기며
죽음의 최면술에 걸려 있는 세상.
노아의 홍수 때처럼 비가 온다
비가 와 다 쓸어버리려 비가 온다.
(박송죽·시인, 1939-)


+ 어떤 노인의 죽음
  
그 老人
늘 그렇게 병들어 있으면서
가랑잎 대롱거리듯이
억지로 매달려 있었다
찰떡을 좋아한다고 했다
어린아이처럼 사탕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 老人
늘 그렇게 병들어 있으면서
이층집 그 휑한 울안에서 홀로
시간과 싸우며 울다가 지쳐 잠들곤 했었다
그때부터 노인은 대문 열라는 벨소리도
대문 두드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 老人
결국은 새우잠을 자던 채로 떠나가고 말았는데
아무도 손댈 사람이 없었다
비로소 장의사가 와서
대나무처럼 꺾고
움츠린 정강이를 짓누르자
우지직거리며 팔을 펴고
툭탁거리며 발을 뻗쳤다

그 老人
아들을 앞세운 늙은이라 하여
화장터로 실려가 한 시간 반만에
재가 되어 나왔는데
하얀 뼈다귀 몇 개
쇠절구에 쿵쿵 찧어
흐르는 시냇물에
띄워졌다

그 老人
늘 그렇게 외롭더니만
바람에 섞이고 물에 풀려서
떠나가고 말았다
(임종호·시인, 1935-)


+ 조장(鳥葬)

티베트 드넓은 평원에 가서
사십 대 여인의 장례를 지켜보았다.

라마승이 내장을 꺼내어 언저리에 뿌리자
수십 마리의 독수리들이 달겨들더니 삽시에
머리카락과 앙상한 뼈만 남았다, 다시
쇠망치로 뼈를 부수어 밀보리와 반죽한 것을
독수리들이 깨끗이 먹어치웠다, 잠깐이었다.

포식한 독수리들이 하늘로 날아오르자
의식은 끝났다, 그렇게 여인은 허, 공에 묻혔다
독수리의 몸은 무덤이었다 여인의
영혼은 무거운 육신의 옷을 벗고
하늘로 돌아갔다, 독수리의 날개를 빌어 타고
처음으로 하늘을 훨훨 날 수 있었을 게다.

장례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는 유족들은
울지 않았다, 침울하지 않았다, 평온했다
대퇴골로 피리를 만들어 불던 스님의 표정도
경건했다, 믿기지 않았다
살아생전 못된 놈의 시신은 독수리들도
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들은 그럴 때만 슬퍼한다고 했다.

언덕길을 내려오다 들꽃 한 송이를 보며
문득 죽은 여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평원의 풀과 나무들도, 모래알도, 독수리도
그냥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어귀에 이르자 꾀죄죄한 소년들이
허리를 굽히며 간절하게 손을 내밀었다.

삶과 죽음이 한통속이었다.
(김선태·시인, 1960-)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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