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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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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관한 시 모음> 강세화의 '겨울 맛' 외

도토리 조회 3,16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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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관한 시 모음> 강세화의 '겨울 맛' 외

+ 겨울 맛

겨울에는 더러
하늘이 흐리기도 해야 맛이다.
  
아주 흐려질 때까지
눈 아프게 보고 있다가
설레설레 눈 내리는 모양을 보아야 맛이다.
  
눈이 내리면
그냥 보기는 심심하고
뽀독뽀독 발자국을 만들어야 맛이다.
  
눈이 쌓이면
온돌방에 돌아와
콩비지 찌개를 훌훌 떠먹어야 맛이다.
  
찌개가 끓으면
덩달아 웅성대면서
마음에도 김이 자욱히 서려야 맛이다.
(강세화·시인, 1951-)


+ 겨울사랑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문정희·시인, 1947-)


+ 겨울 편지

그대가 짠 스웨터
잘 입고 있답니다.

입고, 벗을 때마다
정전기가 어찌나 심하던지
머리털까지 쭈뼛쭈뼛 곤두서곤 합니다.

그럴 때면 행복합니다.
해가 뜨고, 지는
매 순간 순간마다
뜨거운 그대 사랑이
내 몸에 흐르고 있음이
몸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김현태·시인)


+ 겨울밤 흰눈 내릴 때

살박살박
머리맡 탁상 시계는
밤마다 깊은 독 속에서
시간의 흰 싸라기를 퍼낸다
  
그 흰쌀 퍼내는 소리가
달빛처럼 고요해질 때면
그 밤 내 잠은
숯불 속 군밤처럼 달다
(박분필·시인, 울산 출생)


+ 빙벽

적막강산이다

바람소리 새소리도 겸손해진다
보름달 터질 듯 부푼다

묵언 속에 숨긴 말씀이 서늘하다
곧 쏟아지겠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정지해있다
고요한 기다림의 시간이다

면벽수행 노승의 등짝이다
(최해춘·시인, 경북 경주 출생)


+ 겨울에

마음 산란하여
문을 여니

흰눈 가득한데
푸른 대가 겨울 견디네

사나운 짐승도 상처받으면
굴속에 내내 웅크리는 법

아아
아직 한참 멀었다

마음만 열고
문은 닫아라.  
(김지하·시인, 1941-)


+ 겨울나무 스케치

구부렸던 손가락을
하나 하나
펴보니 나무가 된다

휘감았던 두 팔을
느슨히
놓아주니 나무가 된다

저절로 무성했던
잎새, 가거라
보내니 나무가 된다

그 또한 겨울나무가 된다

더 이상은 바랄 것 없네
가난은 이리도 자유로워라  
(홍수희·시인)


+ 동면(冬眠)

겨울 산은 눈 속에서
오소리처럼 웅크리고 잠들어 있다.

산의 체온을 감싸고 돋아나 있는
빽빽한 빈 잡목의 모발(毛髮)들

포르르르
장끼 한 마리
포탄처럼 솟았다 떨어지자

산은 잠시 눈을 떴다
다시 감는다.
(임보·시인, 1940-)


+ 11월의 마지막 날

오늘은 11월의 마지막 날
첫눈이 내리다가 비로 바뀌고
다시 비가 눈으로 바뀌곤 한다.
가을과 겨울이 시간의 영역을 다툰다.

단풍나무는 화려한 가을 송별회를 하고
눈바람은 낙엽을 휩쓸며 겨울의 환영회를 벌인다.
가을과 겨울이 줄다리기를 하지만
위풍당당한 겨울에 가냘픈 가을은 당할 수 없다.
젊은이들도 첫눈을 반기며 만남을 약속한다.
가을은 울며 남으로 떠난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내년에 오리라.
계절의 쳇바퀴는 누가 돌리나?
추동춘하 추동춘하 추동춘하...
계절의 쳇바퀴를 돌리면서 세월은 간다.
세월이 가면 사람도 가고 만물도 흐른다.
(녹암 진장춘·시인, )


+ 다시 겨울 아침에

몸 마음
많이 아픈 사람들이
나에게 쏟아놓고 간 눈물이

내 안에 들어와
보석이 되느라고
밤새 뒤척이는
괴로운 신음소리

내가 듣고
내가 놀라
잠들지 못하네

힘들게 일어나
창문을 열면

나의 기침소리
알아듣는
작은 새 한 마리
나를 반기고

어떻게 살까
묻지 않아도

오늘은 희망이라고
깃을 치는 아침 인사에

나는 웃으며
하늘을 보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겨울밤

창밖에 소록소록 하얀 눈이
내리고
방안의 나는
열에 까무러치며
망연히 내 이름을 불러봅니다.
오늘같이 포근하게 추운 날에는
꿩, 비둘기, 토끼, 노루, 다람쥐들도 어디선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틀고 있겠지요,
꿩 가족은 아마 아빠가 따온 빨간
산수유 열매를,
다람쥐 가족은 아마 엄마가 물어온 노오란
도토리 열매를
도란도란 까먹고 있을지 모릅니다.
창밖에는 하얀 눈이 소록소록
내리는데
방안에는 촛불 하나 가물가물
이우는데
땀에 혼곤히 젖은 나는 열에서 막 깨어나
가만히 내 이름을 불러봅니다.
어쩐지 당신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꿩, 비둘기, 토끼, 노루, 다람쥐들도 어디선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트는
겨울밤,
창밖에는
소록소록 하얀 눈이 내리고 ……
(오세영·시인, 1942-)


+ 지구

천체의 운행에도 차가 막힐까.
지구는 하늘 길에 걸린 신호등
봄 되어 푸른 불,
별들 일제히 움직이고
가을 되어 빨간 불,
별들 일제히 정지한다.
지금 우주는 겨울, 신호 대기 중
새파랗게 얼어붙은 하늘 길을
아차,
미끄러져 까마득히 추락하는
유성 하나.
그래도 서두를 것은 없다.
우주의 목적은 항상 새로운 출발이니까.
(오세영·시인, 1942-)


+ 겨울의 문턱에서

이 겨울엔
설령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될지라도
능히 극복하고 헤쳐나갈 수 있기를!

이 겨울엔
설령 곤고한 처지에 이르게 될지라도
오래 인내하고 잘 견뎌낼 수 있기를!

이 겨울엔
설령 억울한 입장을 만나게 될지라도
용서로 보듬고 중보기도할 수 있기를!

이 겨울엔
설령 육신은 많이 갈하고 추울지라도
영혼만은 흡족하고 따뜻할 수 있기를!

이 겨울엔
설령 원치 않은 이별을 당케 될지라도
조금도 후회 없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겨울행

열 살에 아름답던 노을이
마흔 살 되어 또다시 아름답다
호젓함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들판 위에
추운 나무와 집들의 마을,
마을 위에 산,
산 위에 하늘,

죽은 자들은 하늘로 가
구름이 되고 언 별빛이 되지만
산 자들은 마을로 가
따뜻한 등불이 되는 걸 보리라.
(나태주·시인, 1945-)


+ 겨울 나기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주려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 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얼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도종환·시인, 1954-)


+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도현·시인, 1961-)


+ 이 겨울에

한파가 한차례 밀어닥칠 것이라는
이 겨울에
나는 서고 싶다 한 그루의 나무로
우람하여 듬직한 느티나무로는 아니고
키가 커서 남보다
한참은 올려다봐야 할 미루나무로도 아니고
삭풍에 눈보라가 쳐서 살이 터지고
뼈까지 하얗게 드러난 키 작은 나무쯤으로
그 나무 키는 작지만
단단하게 자란 도토리나무
밤나무골 사람들이 세워둔 파수병으로 서서
그 나무 몸집은 작지만
다부지게 생긴 상수리나무
감나무골 사람들이 내보낸 척후병으로 서서
싸리나무 옻나무 너도밤나무와 함께
마을 어귀 한구석이라도 지키고 싶다
밤에는 하늘가에
그믐달 같은 낫 하나 시퍼렇게 걸어놓고
한파와 맞서고 싶다
(김남주·시인, 1946-1994)


+ 겨울 만다라

대한 지나 입춘날
오던 눈 멎고 바람 추운 날
빨간 장화 신은 비둘기 한 마리가
눈 위에 총총총 발자국을 찍는다
세상 온통 한 장의 수의에 덮여
이승이 흡사 저승 같은 날
압정 같은 부리로 키보드 치듯
언 땅을 쿡쿡 쪼아 햇볕을 파종한다
사방이 일순 다냥하게 부풀어
내 가슴속 빈터가 확 넓어지고
먼 마을 풍매화꽃 벙그는 소리
들린다, 참았던 슬픔 터지는 소리
하얀 운판을 쪼아 또박또박 시 쓰듯
한 끼의 양식을 찾는 비둘기
하루를 헤집다 공친 발만 시리다
아니다, 잠시 소요하듯 지상에 내려
요기도 안 될 시 몇 줄만 남기면 되는
오, 눈물겨운 노역의 작은 평화여
저 정경 넘기면 과연 공일까?
혼신을 다해 사바를 노크하는
겨울 만다라!
(임영조·시인, 1943-)


+ 노숙자를 보며

춥다
찾아오는 밤이 두렵다
너덜너덜 찢어진 노숙이 서럽도록 새어드는 밤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이리저리 구겨지다가
구겨진 삶을 접고 오들오들 떨고 있다
뒤엉킨 실타래처럼 수치심마저 잃어버린
육신이 아무 데나 자리를 깐다
바닥에 누워있는 종이박스 한 장이 스멀스멀 파고드는
냉기를 막고 끈적끈적하고 매캐한 공기가
그의 육신 곁에 눈을 감는다
겨울 한철 지날 때마다 몸 속의 뼈는 부식되어 가고
생애도 점점 허물어져 간다 소주병이 쓰러진다
빈 소주병과 함께 나뒹구는 부스스한 시간
가슴속에 불빛으로 번질거리는 허공을 움켜쥔 채
살얼음을 배설하는 아련한 추억 한 토막
(문근영·시인, 대구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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