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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에 관한 시 모음> 김시종의 '일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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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에 관한 시 모음> 김시종의 '일기' 외


+ 일기

사관이 삼가 역사를 적듯
고요한 밤에 조용히 꿇어앉아
나의 하루를 적는다.

24시간의 진한 고뇌와 고행이
단 몇 줄의 일기로 남는다.

검열관의 삭제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단정한 나를 남기기 위해
일기장엔 내가 은유로 남는다.

불세례에도 살아남기 위해
철갑을 입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알몸이 되어야 한다.

일기장에도 참된 나는 없다.
이 세상 어디에도 참된
나는 없다.
나도 모르는 새
가식의 옷을 입는다.
(김시종·시인, 1942-)


+ 일기장
  
가는 날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져
낙관을 찍는 수묵화
오는 날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사인하는 수채화
누구라도 한번쯤은 앓았음직한 열병
그 열병으로 채우는 일상들의 집합
끝 모를 선율을 지닌 덮어놓은 피아노
가방에 넣어 메고 다니는 바이올린처럼
감금된 언어들이 벗어놓은 허물
초콜릿이 씌워진 일기장은
창고 한 구석 라면 박스에서
누렇게 뜬 세월을 덮고 잠들고
허무와 번민의 손톱으로 긁는
즉석복권 꽝 같은 일기장을 잡고
다가오는 세월을 추스린다.
(김순진·시인, 1961-)


+ 일기장
    
꼭두새벽
해뜨기 전
삼라만상이 아직 잠들어 있는 시간
두 눈 비비며
하늘 우러러보고 하루를 시작한다.

일기장 속에 담긴 사연들
희로애락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나만이 간직한
자존심 부둥켜안고
세월 따라 삶의 경륜이 익어가고 있다.

하루가 가고
일년 삼백육십오일 쉬는 날 없이
나는 삶의 날개를 펴고
마냥 가난한 심정으로
남은 길을 서둘러 걸어간다.

일기장 속에 펼쳐진
파란만장한 인생의 드라마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꿈을 버리지 못한 채
황혼이 내리는 시간에도
찢어진 마음을 달래며 살아가고 있다.

아!
내 인생의 하룻길을
해 저문 들판에서
빈손 들고
오늘을 돌아본다
(신순균·목사 시인, 1940-)


+ 동해일기·3

바다에 서면
이제는 잃어버린 아름다운 것들이 생각난다
부서진 유리창처럼
상처의 숲을 이룬 가슴이
구석구석 따뜻해지면 평화로워진다
(나해철·시인, 1956-)


+ 노인의 일기

세월은 어느새
쓰다 남은 연필 꼭지.

여백 없는 일기장에
낙서만 갈겨놓고도
지금 와  
후회는 고사하고
눈치보느라 바쁘다.

숙제 못 해온
기죽은 아이들 같이.
(채영묵·시인, 1925-)


+ 눈물일기

즐거운 토요일 서울역 지하도
어미 거지 새끼 거지 도합 네 마리
아비는 끝없는 농군이었단다
어미 거지가 울자 새끼들이 따라 울었다
사람인 나도 사람이 창피한 채로 그냥 창피한 채로
엉엉 울어버렸다
(하덕규·가수 시인, 1958-)


+ 어느 무명인사의 일기

나는 산에 움막 짓고
평생 혼자 살았다
눈을 뜬다
하현달 희미한 계곡
나무들 천천히 걸어온다

눈을 감는다
하얀 어둠은
나를 읽어 미소짓고
별빛은 아직 한 그루
나무 못돼 부끄러워하는
나를 바라본다

귀를 잠그고
마음을 연다
개똥벌레 날아가며
내 마음 열어본다
나뭇잎들 수근댄다

외딴 움막에서
서성이던 오솔길
사람 그리워 아랫마을로
이사 간다

나, 아직 나무 되지 못했다
말을 잃어 이제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어렵다
나는 무엇인가
바람이 무언가 중얼거리며
지나가고 있다
(김종익·시인)


+ 일기

너 모르지?
나 지금도
운다.
(박혜진·시인, 1972-)


+ 유아 일기

애기 쑥갓꽃 같은
하얀 얼굴
네 눈망울이 가장 고요할 때
내 비밀의 화원 일기장에
돌아갈 수 없는 네 어린 시절을 적는다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엄마와
눈과 눈으로 나누는
너와 나의 밀어들
같이 꽃씨 뿌리고 가꾼 얘기를
까맣게 엮어 서랍에 넣어둔다

훗날
슬프거나 사는 것이 괴로울 때
엄마가 쓴 이 詩들을 읽어보렴
홍옥이 빠알갛게 익는데
얼마나 많은 햇살과 바람이 다녀갔는지
네 몸 구석구석
얼마나 많은 손길이 스쳐갔는지
(송연우·시인, 경남 진해 출생)


+ 아픈 날의 일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과 이마를 다친
어느 날 밤

아프다 아프다
혼자 외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편할 때는 잊고 있던
살아 있음의 고마움
한꺼번에 밀려와
감당하기 힘들었지요

자기가 직접 아파야만
남의 아픔 이해하고
마음도 넓어진다던
그대의 말을 기억하면서
울면서도 웃었던 순간

아파도 외로워하진 않으리라
아무도 모르게 결심했지요

상처를 어루만지는
나의 손이 조금은 떨렸을 뿐
내 마음엔 오랜만에
환한 꽃등 하나 밝혀졌습니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도둑 일기

이름 모를 계곡에서 자지러진 꽃단풍도
그냥 내버려두어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연 그대로 놓아두면 이 흉한 얼굴도
그림이 될 것이거늘

형사님 내가 뭐 일제 때 독립투사도 아니고
그렇게 쪼지 마세요 증거도 없으시면서
내가 도둑놈은 맞지만 나 이래봬도
일지매나 장길산을 닮으려고 하옵니다

난 별로 훔친 건 많지 않아도
도둑놈은 도둑놈
그렇습니다
나는 유죄입니다

그렇지만 나 좀 그냥 내버려두세요
나도 한번쯤은 노랑나비 흰나비
춤추며 오는 봄을 그리고 싶어
붓 하나 감춰 놨습니다만

그것만은 제발
꺾지 말아 주세요
형사님 그리고
하느님!
(손우석·시인)


+ 저녁 일기

해가 거나하게
산을 넘으면,
늪에서 허우적이는 취기
멀미를 앓는다.

삶의 작용인가,
부작용인가?
세상의 작용인가,
부작용인가?

하루의 구석구석에서
몰려나와
온몸을 휘감는 어둠,
우리는 하루를
해처럼은 넘을 수가 없나?

몸과 마음의
삐걱거리는 수레
오늘도
가파른 어둠
길을 돌아 오른다.
(백우선·시인, 전남 광양 출생)


+ 일기·3

허허로울 때가 있다
포도주 두 잔을 마셨는데도
눈이 감기지 않아
새벽으로 가는 시계의 시침소리를 들으며
이제 불꺼져 어두워진 아파트 광장을 바라본다
몇 시간 전에 저 길을 걸어
가, 지금은 서울로 간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무엇인가 자식은
내게,
(권복례·교사 시인, 대전 출생)


+ 초봄, 산중일기

오늘은 하루종일 산중에 봄비입니다
문 열면 그대 가듯 가만가만 가고
문 닫으면 그대 오듯 가만가만 옵니다
문 닫으면 열고 싶고
문 열면 닫고 싶고
그 두 맘이 반반입니다
한 맘이 반을 넘어
앞산 뒷산 산산이 다 초록이 되어버리고
그대가 내 맘 안팎에서 빨리
미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내 맘은 지금 비 지나는
물 위 같습니다
자꾸 동그라미가 그대 얼굴로
죽고 삽니다
오늘은 하루종일 서성여도 젖지 않는
산중에 오락가락 봄비였습니다.
(김용택·시인, 1948-)


+ 봄 일기
    
한 줄기의 빛이
온 세상일 수 있음은
당신을 대하는 일이
내게 있음입니다

당신이
거울 속에만 계시지 않는 것은
바람에 더불은
한 가슴 터칠
향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심히 던져보는 눈길에 잡힌
이름 모를 꽃망울에서
나는
당신의 미소가
얼마나 신비로운 창조인가를
알아냅니다

가슴은 이내
하늘이 되고
창 밖에선 당신의 이름이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쥐어
얼굴에 부벼 봅니다
봄빛이 눈 부시는 오후에
(문인귀·시인, 1939-)


+ 가을 일기

가을 일기
잎새와의 이별에
나무들은 저마다
가슴이 아프구나

가을의 시작부터
시로 물든 내 마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에
조용히 흔들리는 마음이
너를 향한 그리움인 것을
가을을 보내며
비로소 아는구나

곁에 없어도
늘 함께 있는 너에게
가을 내내
단풍 위에 썼던
고운 편지들이
한 잎 한 잎 떨어지고 있구나

지상에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동안
붉게 물들었던 아픔들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려
새로운 별로 솟아오르는 기쁨을
나는 어느새
기다리고 있구나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겨울 일기(日記)
    
틀에 끼인
한 장의 사진 속에 평안이 있다.

아내의 싱싱한 머리카락 사이에
여름 햇빛들이 수런대고
철없는 어린것이 물장난을 치고

액자 옆에는 시들어 버린 꽃, 또는
고개를 숙인 인형,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는 해안엔
어부가 호올로 그물을 깁는다.

찢어진 생활의 한 컷을 넘기면서
1971年 1月4日,
날씨, 흐리다.
온종일 라디오를 들으며
편지를 쓰고 찢었다.

얼어붙은 시간의 저쪽에서
철없는 어린것이 물장난을 치고
생애의 슬픔을 건너온 바닷바람이
물거품을 밀어 올린다.

틀에 끼인 한 장의 사진,
그 속의 평화,
그 속에 잠든 아내의 얼굴,
흰 파도에 부서지는
여름이 보였다.
(오세영·시인, 1942-)


+ 얼음수도원 -피정(避靜) 일기

지난밤 꿈에
남극에 있는 한 수도원을 보았다.

얼음벽돌로 세워진
얼음수도원.
흰곰의 가죽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수도사들은,
얼음십자가상과
얼음성모상 앞에서
찬미가를 불렀다.

하얀 콧김과 하얀 입김이 펄펄 날리며
수도사들의
긴 머리칼과
눈썹과
수염에
고드름을 맺히게 했다.

저녁미사 시간,
수도사들이 바치는
비나리의 뜨거운 숨결이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얼음집을 다 녹였다.
얼음수도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수도사들도 사라졌다.

잠을 깨고 난 뒤, 온종일
사라져버린 얼음수도원을 묵상했다.
무념무상의 설원(雪原)에 들 수 있었다.
(고진하·목사 시인, 1953-)


+ 슬픈 날 일기

새벽이면 동생은 골목길로 나갔습니다
흐린 날도 비오는 날도 어김없이 여섯 시에 골목으로 갔습니다

골목에서 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인데
새벽같이 일어나 나갔습니다
한참을 있다가 돌아오는데 언제나 시무룩한 얼굴로
말이 없어서 묻지도 못했습니다
아침마다 무어 좋은 일이냐고 묻지도 못했습니다

날마다 초췌하니 야위던 동생이
엊저녁부터는 몸이 불덩어리였습니다
신열이 오르락내리락 밤새 시달리다가
새벽에사 깜박 잠이 든 동생이 헛소리를 합니다
엄마가 올텐데, 나 일어날 테야
엄마를 기다려야 한단 말이야

동생은 날마다 골목에서 엄마를 기다린 것입니다
서울에서 밤새 기차를 타고 새벽에 닿을
엄마를 기다린 것입니다

가슴이 뭉클해서 동생의 손을 꼭 쥐었습니다
동생은,
사무친 그리움에 병이 난 것입니다
엄마는 서울에 있지 않습니다
엄마는, 엄마는 다른 곳에 계십니다

나는 동생이 아파도 병원에 데리고 가지 못했습니다
열이 심해 온 몸이 불덩이같이 뜨거운 동생을
병원에 데리고 갈 수 없는 것이 슬퍼서
종일을 울었습니다
오늘은 슬픈 날입니다
(박용주·시인, 1973-)


+ 어느 조카의 일기

내가 타는 버스는 삼촌이 공장에서 만든다
내가 입는 옷은 누나가 공장에서 만든다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소중한 물건
누구나 살아가는 데 필요하겠지

저 폐수 흘러나온 만큼 사장님 통장엔 기름 흐르고
저 매연 솟는 만큼 사장님 웃음소리 커져가는데
삼촌은 집에만 오면 피곤하다며 쓰러져 잠들고
처녀인 누나는 벌써부터 허리가 아파 침맞으러 다니다

열심히 일해도 느는 것은 피로와 가난
성냥 한 개피 직접 만들지 않는 사장네들
지구의 목조르는 일에 열을 올릴수록
잘난 부자가 된다

그래서 나는 삼촌과 누나가 좋다
가난해도 정직하고 부지런한 삼촌과 누나가 좋다
아이들이 마음놓고 꿈꾸며 뛰놀 수 있도록
하늘과 땅과 물과 사랑을 함께 나누며
사람 사는 데 필요한 물건 직접 만들어내는
조금은 허기져 보이는 노동자가 좋다

나도 커서 어른이 되면
삼촌과 누나 같은 정직한 노동자 되어
공해나 뿜어대며 배불리는 사장님들은
스스로 병들고 가난해져야 한다는 것을
정직하고 건강한 노동자의 이름으로 가르쳐야지.
(홍관희·시인, 1959-)


+ 어느 아이의 일기

하나님, 나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착한 사람이 아니어도 좋으니 우리 엄마아빠랑 매일매일 활짝 웃으며 살았음 좋겠어요. 아빠는 회사 일로 매일 늦게 들어오고 엄마는 아빠를 돕는다며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요. 식당 일이 오후 11시쯤 끝나 엄마아빠 보기가 아주 힘들어요. 엄마는 우릴 위해 저녁마다 피자나 치킨, 자장면을 시켜주지만(처음엔 그게 참 좋았어요), 이제는 엄마가 해주는 밥이 먹고 싶어요. 내일이 내 생일인데 엄마가 해주는 미역국을 먹을 수 있을지… 걱정이 돼요. 전에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아빠 생일날 먹은 오곡밥과 미역국, 참 맛있었거든요. 이제는 어떤 예쁜 케이크를 보아도 먹고 싶지가 않아요. 보기도 싫어요. 아침엔 토스트, 점심엔 급식, 저녁엔 피자나 치킨, 자장면… 그런 것 말고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이 먹고 싶어요. 엄마아빠랑 함께 식탁에 앉아 오순도순 웃으며 먹는 그런 밥이 먹고 싶어요. 하나님,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 못 되어도 좋으니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김상미·시인, 1957-)


+ 불효일기 - 어버이날

5월 8일, 올해도 아침 일찍 고향으로 전화를 걸었다 간단하게 전화 한 통으로 부모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새끼들이 어서 일어나서 내 가슴에도 카네이션을 달아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출근시간에 쫓겨 올해도 그냥 집을 나서다가 문득 골목어귀에서 만나는 어머니, 가슴에 카네이션을 자랑스럽게 달고 말없이 자식 자랑을 하면서 지나가시는 남의 어머니가 캄캄하게 다가섰다 5월 8일이 한없이 느린 걸음으로 내 가슴을 지나갔다
(이상호·의사 시인, 1950-)


+ 일기를 쓰다가

이 세상 한 장 넘기면 다른 세상이 펼쳐지겠습니까.
눈물 묻은 손으로 그대 넘기면 다른 사랑이 오겠습니까.
계곡이 산봉우리를 다른 빛깔로 넘기고 계절이 넘겨지다가 용수철에 끼인 듯 뻑뻑하게 넘어가지 않는 이 새벽.
저는 목줄기 너머로 넘길 수 없는 제 청춘과 넘겨지지 않는 슬픔을 느낍니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그대 그리움을 삼키다가 목메어 질식할 것만 같습니다.
모든 게 책이고 노트라면 살아가는 게 이월(移越)이라면
저를 넘겨 그대에게 넘어가 그대 삶 읽고 싶습니다.
제가 그대 마음에 도착해 일기 속에 쓰이고 등장하는 시간을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꿈조차 불가능입니다. 매일매일 새벽을 넘기면 제게로 쓰러지는 건 아침 아니라 무한한 좌절입니다. 절망입니다.
제가 그대에게 갈 수 있는 시간의 페이지는 어느 세계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김하인·소설가 시인, 1962-)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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