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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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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성찰 시 모음> 이재무의 '항아리 속 된장처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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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성찰 시 모음> 이재무의 '항아리 속 된장처럼' 외

+ 항아리 속 된장처럼

세월 뜸들여 깊은 맛 우려내려면
우선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자는 거야
햇장이니 갑갑증이 일겠지
펄펄 끓는 성질에 독이라도 깨고 싶겠지
그럴수록 된장으로 들어앉아서 진득하니 기다리자는 거야
원치 않는 불순물도 뛰어들겠지
고것까지 내 살(肉)로 풀어보자는 거야
썩고 썩다가 간과 허파가 녹고
내장까지 다 녹아나고 그럴 즈음에
햇볕 좋은 날 말짱하게 말린 몸으로
식탁에 오르자는 것이야
(이재무·시인, 1958-)
 

+ 짤막한 노래

정직하고 부드러운 빵
아름다운 푸른곰팡이를 피워내는군
자신이 썩었음을 알려주는군
(박경원·시인, 1963-)


+ 키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는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 난장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유안진·시인, 1941-)


+ 징

누가 나를 제대로 한방
먹여줬으면 좋겠다
피가 철철 흐르도록
퍼런 멍이 평생 지워지지 않도록
찡하게 맞았으면 좋겠다
상처가 깊을수록
은은한 소리를 낸다는데
멍울진 가슴 한복판에 명중해야
멀리멀리 울려 퍼진다는데
오늘도 나는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서쪽 산 정수리로 망연히
붉은 징 하나를 넘기고야 만다
징채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제대로 한번 울어보지도 못하고
모가지로 매달린 채
녹슨 밥을 먹으면서
(박정원·시인, 1954-)


+ 석공

일년에 한두 자씩
십 년 걸려 한두 획씩
비문을 새긴다.
남의 비문이 아니라,
한평생
남의 비문만 새기다 간다는
스스로의
비문을 새긴다.
(손광세·시인, 1945-)


+ 목격 - 속도에 관한 명상

질주하는 바퀴가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

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반칠환, 시인, 1964-)


+ 다시 나만 남았다

영혼을 쫓아다니느라 땀이 흘렸다
영혼을 쫓아다니는데 옷이 찢겼다
자꾸 외로워지는 산길
염소쯤이야 하고 쫓아갔는데
염소가 간 길은 없어지고 나만 남았다
곳곳에 나만 남았다

허수아비가 된 나도 있었고
돌무덤이 된 나도 있었고
나무뿌리로 박힌 나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내가 많아도 나는 외로웠다.
(이생진·시인, 1929-)


+ 납

나는 내가 항상 무겁다,
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무거워
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
나는 나의 짐이다.

맑고 고요한 내 눈물을
밤이슬처럼 맺혀보아도,
눈물은 나를 떼어낸 조그만 납덩이가 되고 만다.

가장 맑고 아름다운
나의 시를 써보지만,
울리지 않는다. -- 금과 은과 같이는

나를 만지는 네 손도 무거울 것이다.
나를 때리는 네 주먹도
시원치는 않을 것이다.
나의 음성
나의 눈빛

내 기침소리마저도
나를 무겁게 한다.

내 속에는 아마도
납덩이가 들어 있나부다,
나는 납을 삼켰나부다,
나는 내 영혼인 줄 알고 그만 납을
삼켜버렸나부다.
(김현승·시인, 1913-1975)


+ 일월 속에서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 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마가 한결 빛나고

강물은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 듯이 알리나니

이 천편일률로 똑같은
쳇바퀴 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 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박재삼·시인, 1933-1997)


+ 내 나이 벌써

땅 위에 태어나서 나 하늘 높이에
이념의 깃대 하나 세우지 못한다
가난뱅이들이 부자들의 마을에 가서 고자질할까 봐 그런 것도 아니다
내 나이 벌써 마흔 다섯이다

하늘 아래 태어나서 나 땅 위에
계급의 뿌리 하나 내리지 못하고 있다.
부자들이 가난뱅이들 마을에 와서 행패를 부릴까 봐 그런 것도 아니다
내 나이 벌써 마흔 다섯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나 할 일이 없는가 이렇게도 없는가
까마득한 세월 10년 전 그날처럼
나는 이제 지하로 흐르는 물도 되지 못하고
지상에서 먹고 살 만한 동네에 살면서
이런 말 저런 글 팔고다닌다
그것도 허가난 집회에서나
그것도 인가난 잡지에서나
내 나이 벌써 이렇게 됐는가!
(김남주·시인, 1946-1994)


+ 내가 계절이다

계절이 바뀌면
뱀도 개구리도 숲에 사는 것들은 모두 몸을 바꾼다
보호색으로 변색을 한다
흙빛으로 또는 가랑잎 색깔로

나도 머리가 희어진다 천천히 묽어진다
먼지에도 숨을 수 있도록 나이도 묽어진다

흙에 몸을 감출 수 있도록
가랑잎에 숨어 잠들 수 있도록
몸을 바꾸고 자신을 숨기지만

그러나 긴 고요에 들면 더 이상 숨는 것이 아니다
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나는 계절 따라 생멸하지 않는다
내가 계절이다
(백무산·노동운동가 시인, 1955-)


+ 설해목雪害木

가벼운 것도 쌓이면 어깨가 부러지는가
흩어져 날리던 눈발들
쌓이고 쌓여 만든
얼음침묵 위에서

만져진다 저 혼자 딱딱해져서
이제 통증도 없어진 내 편견의 옹벽과
옹이들

겨울 숲
말의 곁가지 잠재운 속에서
훤히 보이기 시작한
내 생의 부러진 등뼈
(정순옥·시인, 전남 곡성 출생)


+ 내가 나를 바라보니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기는 벌레 한 마리가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조오현·승려 시인, 1932-)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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