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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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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 시 모음> 정해종의 '연애편지를 쓰는 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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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 시 모음> 정해종의 '연애편지를 쓰는 밤' 외

+ 연애편지를 쓰는 밤

당신이 마련하신
기쁨과 고통의 행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몇 명이 다녀가셨다지요
꽃을 준비하지 못한 건
시들지 않는 기쁨을
선사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시들지 않는 꽃이란 게
끝내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이란 게
있기나 하던가요
살아 있음을 인생이라 하고
피어 있을 때만이 꽃이라 하고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사랑이라 하지 않던가요
믿을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대의 문을 두드리지 못한 건
이 믿을 수 없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정해종·시인, 1965-)


+ 편지

가는 길이 어두워
내 편지는 네게 닿지 못한다.
어둠 위에 육필의 자모가 나가고
어둠이 뜯어버린 단어들이
하던 말을 멈추고 있다.
어두워 못 가는 편지
그대, 모든 촉수 터질 듯 높여
반짝이는 그리움의 자모를 맞춰보라.
가슴털 뽑힌 우표 한 장 붙이고
네 이름의 외곽에서
쓰러져 잠든 내 언어들을 해독해보라.
(최문자·시인, 1941-)


+ 편지로 할 말은 눈물이라서

편지로 할 말은 눈물이라서
詩만 적어 보냅니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스스로의 어둠을 감추는 것
그대와의 시계바늘을 바꾸는 것
그건 다시 말해서
모든 걸 망각하는 것
백지로 쓴 편지 같은 것

그대에게 할 말은 바람 같아서
詩만 적어 보냅니다
(김기만·시인)


+ 눈 오는 날의 편지

목청껏
소리치고 싶었다
한 영혼에 사무쳐
오래오래 메아리치도록
진달래 꽃빛깔로
송두리째 물들이며
사로잡고 싶었던
한 마음이여

보았느냐
보이는 저 목소리를
기막힌 고백의
내 언어를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우며 울림하며
차가운 눈발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뜨거운 외침을 보았느냐
(유안진·시인, 1941-)


+ 초겨울 편지

앞산에
고운 잎
다 졌답니다
빈 산을 그리며
저 강에
흰눈
내리겠지요

눈 내리기 전에
한번 보고 싶습니다
(김용택·시인, 1948-)


+ 겨울편지

겨울이 되면 떠오르는 남해 바닷가
그리움의 열병이 마구 망치질하면
더욱 달려가고픈 마음의 고향

오늘 문득 그곳을 생각하며
그대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너무 소식 전한 지 오래되어
손은 굳었지만 마음만은
용암처럼 펄펄 끓어오르지요

올 들어 처음 써보는 편지이기에
맞춤법도 사랑스런 단어도
삼삼하게 피어오르진 않지만
그대 향한 그리움은
쨍쨍 깨지는 얼음처럼 바삭거려요

함께했던 추억의 그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그리움이 뭉글몽글 피어오르네요

겨울의 초입에서 쓰는 이 편지는
그대에게 바치는 나의 전부랍니다

Honey, 감기 조심하셔요

겨울 편지는 낼 모레 도착할 예정입니다
(반기룡·시인)


+ 흐린 날의 연서

까마귀산에 그녀가 산다
비는 내리고 까마귀산자락에서 서성거렸다
백 번 그녀를 만나고 한 번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였다
예술의 전당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고
먼저 전화 걸던 사람이
그래도 당신
검은 빗방울이 머리통을 두드리고
내부로만 점층법처럼 커지는 소리
당신이 가지고 다니던 가죽가방 그 가죽의 주인
어느 동물과의 인연 같은 인연이라면
내 당신을 잊겠다는 말을 전하려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독해지는 마음만
까마귀산자락 여인숙으로 들어가
빗소리보다 더 가늘고 슬프게 울었다
모기가 내 눈동자의 피를 빨게 될지라도
내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리라
그래도 당신
(함민복·시인, 1962-)


+ 사랑을 정리하며 - 편지함

이제쯤
엇갈리기만 하는 너를 정리해야겠다고
편지함을 연다

받은 편지함을 휘저어 보며
과장된 말들을 골라내고

보낸 편지함을 뒤져보며
이별의 예감들을 솎아낸다

이미 한 번 지워진 사연들이
줄줄이 잡혀와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는 지운 편지함

"선택된 메시지를 영구적으로 삭제시키겠습니까?"
예(Y), 아니오(N)

잠시 머뭇거리다
예(Y)를 누른다
다시 한번 가위질 당하는
나만의 이야기들

이제 영원히 놓쳐버린 것을
빈 눈으로 서성거려 보지만
가슴엔 미련이 선명하게 찍힌다
(목필균·시인)


+ 마지막 편지

완성될 줄 모르는 편지는
너에게 도달되지 않고
공간에 머무르면서
우체국으로 접수될 줄 모른다
부치지 못할 편지는
쓰지도 말자면서 돌아서는 법을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연습하지만
정작으로 돌아서야 할 시간에는
변두리만 돌다가 다시 돌아서 버리는 건망증
필생에 한 번 혼자서만 좋아하고
잊어야 하는 삶의 징벌 쓰기도 하여라
(김초혜·시인, 1943-)


+ 연애편지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한 그리움이며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있나 없나 수없이 되읽어 보며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 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속에서도 꿨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 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안도현·시인, 1961-)


+ 숲속 편지

헤맬수록 쓸쓸한 길 끝에는
별들의 집이 있고
겨드랑이에선 푸른 깃털이 돋는데
누가 이곳에 몸만의 사랑을 심어놓았던가요.
날지 못한 깃, 서릿발 하얀 응달에
편지로 쌓인 오늘
가슴에 단단한 옹이가 만져지는 건
당신, 어두운 기억 속에서
나란히 발 묻고
따뜻한 체온 서로 덮어주던 때가 그리운 게지요
그렇게 오래도록 그리워하다 보면
뿌리째 썩는 아픔이 올까 몰라,
차라리 통째 베어지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문옥영·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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