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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에 관한 시 모음> 이해인의 '우체국 가는 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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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에 관한 시 모음> 이해인의 '우체국 가는 길' 외

+ 우체국 가는 길

세상은
편지로 이어지는
길이 아닐까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하나
미루나무로 줄지어 서고
사랑의 말들이
백일홍 꽃밭으로 펼쳐지는 길

설레임 때문에
봉해지지 않는
한 통의 편지가 되어
내가 뛰어가는 길

세상의 모든 슬픔
모든 기쁨을
다 끌어안을 수 있을까

작은 발로는 갈 수가 없어
넓은 날개를 달고
사랑을 나르는
편지 천사가
되고 싶네, 나는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푸른 곰팡이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이문재·시인, 1959-)


+ 가을 우체국

가을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인보다 때론 우체부가 좋지
많이 걸을 수 있지
재수 좋으면 바닷가도 걸을 수 있어
은빛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낙엽 위를 달려가
조요로운 오후를 깨우고
돌아오는 길 산자락에 서서
이마에 손을 동그랗게 얹고
지는 해를 한참 바라볼 수 있지

시인은 늘 앉아만 있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 뚱뚱해지지

가을 우체국에서 파블로 아저씨에게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시인이 아니라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가 아니라 내가 직접
크고 불룩한 가방을 메고
멀고먼 안달루시아 남쪽
그가 살고 있는
매혹의 마을에 닿고 싶다고 생각한다
(문정희·시인, 1947-)


+ 우체국 가는 길

소리 없이 쏟아지는 눈송이처럼
닿으면 녹아 없어질 것만 같은
긴긴 겨울밤 잠 못 이루고 애태웠던
수줍어 말 못한 고운 사연을 엮어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시린 겨울바람이 묻지 않게
따스한 가슴에 대고
손금으로 꼭꼭 누르며 우체국 가는 길
당신 손에 받아 들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떠올라
연지 볼이 빨갛게 달아오릅니다

지난 가을을 건너온
섬유질뿐인 마른나무가지도
저 홀로 부끄러워 옆구리를 비비더니
몇 잎 남은 잎새를 수줍게 흔들어줍니다

받아보기 전에 많이 궁금하실까봐
마지막 구절만 읽어 드릴게요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이름 모를 풀꽃의 향기 같은
수줍은 내 사연을
고스란히 당신께 전하기 위해
하늘이 맑고, 청한 바람 부는 날
내 지문이 묻어있고
내 사랑이 가득 밴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에 갑니다
(김설하·시인이며 수필가)


+ 오늘도 우체국에 간다

오늘도 난 우체국에 간다
마른 잎 수북히 추억처럼 쌓인 길
홀로 걷는 외로움도 축복이라며

하늘 호수에 담근 흰 구름
청량한 햇살에 말린 단풍잎과
그늘 한 점 없는 구절초의 보랏빛 미소
잔가지 눈물처럼 흔드는 방울새 울음소리

하나도 새지 않게 쪽빛 한지에 싸서
네 이름 꽃씨처럼 새긴 봉투에 넣고
떨리듯 기도를 하지
네 품에 안길 이 편지 바로 나였으면...
편지를 물고 가는 흰 제비도
기쁘게 날갯짓하겠다

오늘도 나는 우체국에 간다
너에게 나를 보내기 위해
(서경원·교사 시인, 부산 출생)


+ 우체국

현명한 바도 아니고
섬 하나를 시멘트로 뒤집어씌우는 사업
오늘은 바람 때문에 일손을 놓은 인부들이
어디서 낮술을 들고 있을까
어젠 우체국 문도 아예 닫아 버렸더니
오늘은 문만 열어 놓고 무엇들을 할까
배가 들어오지 않으니 들어올 행낭이 없고
배가 뜨지 않으니
나갈 행낭이 없어
이런 때 우체국 직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생진·시인, 1929-)


+ 우체국에서
    
우표를 산다.
11월 해풍에 엽서를 쓴다
아슬한 고향의 열차를 타듯

저 창구에는 숱한 사람들이 뿌리고 간
세세한 통사정
내가 또 두고 갈 쓸쓸한 고백

우주의 귀퉁이
협소한 주소에
당신은 내가 아는 땅 위의 한 사람

벌거벗은 목숨 곤곤한 물살을
순수의 바가지로 길어 올려서
떠나 보내야지,
속죄하듯
풀어서 전해야지

오늘도 흐린 날씨
자욱한 먼지 속에
창천에 파묻힐라
매운 눈물
한 방울
(이향아·시인, 1938-)


+ 우체국

손바닥 둘만한 행복
하나로 접어 규격봉투에 넣어
네게 부치마.
하늘로 넘나드는
마음 묶어
되도록 작게 여미어 싸 무게를 달면
그토록 엄청나던 무게
가장 작게 오그려
수취인 분명한 소포로
네게 부치마.
계절의 사태진 숲에서
아직도 집이 없어
눈물 어린 감정, 그러고 있거든
허공세계 돌아온 바람등에 실어
너만이 알아볼 듯
물들인 낙엽으로 그렇게
네게 띄우마.
(탁영완·교사 시인, 1948-)


+ 우체국의 라일락
  
우체국을 들어서는데
어디서인가
사과씨 내음이 풍겨왔지요
나오면서 보니
연보랏빛 라일락이 부풀어 있었어요
거리엔 연한 순 돋은
가로수가 사열하는 동안  
달려가는 자전거 양철통 안의 솜사탕처럼
달콤하달 수만은 없는
당신의 막무가내인 프로포즈 마냥
라일락은 즐거운 편지로
하늘에 씌어져 있었답니다
(강은령·시인, 1930-1993)


+ 우체국 계단

우체국 앞의 계단에
나는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온
엽서처럼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곁에 서 있었고
또 그 곁에는 늙은
자전거가 한 대 웅크려 있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단물이 다 빠져나간 바람이
싱겁게 귓불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편지 혹은 엽서를 안 쓰고 지낸 지
몇 해가 지났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길 건너편의 가구점 앞에서
낡은 가구를 부수고 있는 가구점 직원들,
그리움도 세월이 흐르면 저 가구처럼 낡아져
일순간 부숴 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낡은 가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
우체국의 셔터가 내려가고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여름의 끝이었고
나는 아직 무성한 그리움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김충규·시인, 1965-)


+ 그리운 우체국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밝혀 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류근·시인, 1966-)


+ 바닷가 우체국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 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서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 속 주머니에 넣어 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 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 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안도현·시인, 196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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