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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관한 시 모음> 이영광의 '의자'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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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관한 시 모음> 이영광의 '의자' 외

+ 의자
                                              
앉아 있는 사람의 몸 아래에
어느새 먼저 와서
앉아 있는 사람

의자는 먼 곳에서 쉼 없는 네 발로
삐걱삐걱 걸어 여기 왔다

의자의 이데아는,
마르고 다정하고 아픈 몸을 한
늙은 신일 것이다
(이영광·시인, 1965-)


+ 의자

너는 나를 뒤에서 끌어안지 않으면
둥기둥기 무등을 태우며 즐거워하고,
눈길 한번 마주친 적 없는데도
언제나 너는 샅샅이 내 몸을 안다.

서지도 눕지도 않고 밤낮을 앉아서
삐걱삐걱 요람을 흔드는 따뜻한 손길,
아가의 언어를 알아듣는 어미처럼
언제나 너는 깊숙이 내 맘을 안다.
(유용선·시인, 1967-)


+ 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이정록·교사 시인, 1964-)


+ 빈 의자

조금 힘들면
쉬었다 갈 수 있는
빈 의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무 말 없이
당신의 휴식을 도와 줄
그런,
편안함이었으면 싶습니다

내 마음이
여유로운 공간으로 남아

그대
잠시라도 머물러
새로운 희망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이고 싶습니다

당신을 위한
빈 의자
(최원정·시인, 1958-)


+ 흔들의자에 앉아          

어머니의
흔들의자에 앉아
저만치 세상을
내려다본다

더 이상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병든 손과 굽어진
허리가 되어

만지고픈 아이들
웃음소리와 종일
휘청이는 그네를
바라보거나

더 이상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주름진 이마와
어눌한 발음이 되어

한 번쯤은
노래하고 싶었던
그리운 이름도
읊조려 본다

어머니의
흔들의자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느니

인생이란 한나절
빠르게 피었다 지는
한 송이 꽃과도 같아

뼈가 불거진 손바닥
위엔 너를 위해 밝혔던
작은 촛불 뿐,

어머니의
흔들의자에 앉으면
아무것도 내게
남을 것 없다
(홍수희·시인)


+ 나무 의자

나무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 생각에 빠진다

어느 숲 속의
나무였을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몇 번이나 지냈을까

어느 새가 날아와 앉아
울고 갔을까
어떤 짐승이 보금자리를
틀고 싶어했을까

나무는 자라가면서
무엇들을 바라보았을까
나무는 여름날 그늘을
잘 만들어 주었을 텐데

목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만들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의자에 피곤을 기대고 앉아
잠이 들어버렸다

꿈길에서 큰 나무를 만났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한 그루 의자

태어나서 한번도 두 발로 걸어보지 못했다
다리가 넷이라는 것이 불행의 이유가 될 수도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는 앉아 있다
그가 누구를 앉힐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을 누구보다 잘하기 때문,
그는 앉은 채 눕고 앉은 채 걷는다
혹은 앉은 채 훨훨 날고 있을 때도 있다
그를 오래 보고 있으면
조금씩 피가 식고 눈은 밝아져
그가 입을 열 때까지 하냥 기다릴 수도 있다
스물 여섯 도막의 통나무가 한 그루 의자가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못에 찔려야 했는지,
그 굳어가는 팔다리 속에 잉잉거리는 게 무엇인지.
그러나 말해주지 않아도 나는 알 것만 같다
며칠 전부터 상처를 들락거리며
날벌레가 슬어놓고 간 알들을 깨우려고
햇빛은 자꾸만 그의 등뒤로 와서 내리쬐는 것이었다
한 그루 나무에게 그렇게 하듯이
(나희덕·시인, 1966-)


+ 사진관 의자

참 이상한 곳에 놓인 의자군,
아무도 이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기지 않고
아무도 이 의자에 앉아 졸지 않고
아무도 이 의자에 앉아 창 밖
지나가는 차 바라보지 않네
참 적막한 곳에 놓인 의자
외톨박이 의자군, 오늘도
혼자뿐인 의자 단 한번도
엉덩이가 따뜻해져본 적이 없는 의자
누구랑 마주 앉아서
얘기를 하나, 얘기를 듣나
오늘도 검은 커튼 뒤에 앉아
혼잣말만 하는 의자
독백의 의자 그래도 조용하고
단정한 의자군, 진짜보다 더
예쁜 가짜 꽃바구니 두어 개
제 곁에 갖다놓고 누구는
이 의자 한가운데 앉아
돌사진, 독사진을 찍고
누구는 졸업사진, 영정사진을 찍고
나는 또 새 이력서에 붙일
굳은 표정의 증명사진 몇 장을 찍네
시선이 없는 내 청춘의
무표정 몇 장을 남기네
(유홍준·시인, 1962-)


+ 오래된 의자

생각이 삐그덕 움직이자
쇠못 하나가 겨드랑이에서
쑥 빠져 나옵니다
망치로
빠져 나온 쇠못을 박아 넣자
등받이가 왼쪽으로
기울어 버립니다

어렸을 때 동생과 그 위에서
마구 뛰고 싸우고 던지고
온갖 까탈을 부려도
묵묵히 다 받아준 의자
언제고 필요하면
아무생각 없이 털썩 앉곤 했는데

기울어진 의자를 바라보니
어깨가 시큰거리며
풍 맞아 기우뚱해진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오래 됐다고
망치로 이리저리 내리치다
안되면 버리려고 하다니

이번엔 아무리 돈이 들어도
의자를 제대로
고쳐야겠습니다
(신미균·시인, 1955-)


+ 낡은 의자
  
그는 길바닥에 엎어져 비까지 맞고 있었다.
세월의 때를 입히며 십 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던
그가 분해되지 않은 채 버려진 주검이 되었다,
딱딱해진 정물 속에 군데군데 상처난 흔적이 깊다
  
그의 모습에 나를 얹어 본다.
온기 다 빠져나간 집안에 찍혀있는 고단했던 삶의 발자국들.
이젠 쉬어야겠다고 거칠어진 손 거두려 하니,
퇴물이 되어 버려질 시간들이 거기에 있다.
(목필균·시인)


+ 낡은 의자

묵묵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은 저녁, 의자는 내게 늙은 잔등을 내민다.
나는 곤한 다리와 무거운 엉덩이를
털썩, 그 위에 주저앉힌다.
의자의 관절마다 나직한 비명이
삐걱거리며 새어나온다.
가는 다리에 근육과 심줄이 돋고
의자는 간신히 평온해진다.
여러 번 넘어졌지만
한 번도 누워본 적이 없는 의자여,
어쩌다 넘어지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는 의자여,
걸을 줄도 모르면서 너는
고집스럽게 네 발로 서고 싶어하는구나.
달릴 줄도 모르면서 너는
주인을 태우고 싶어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네 위에 앉는 것이 불안하다.
내 엉덩이 밑에서 떨고 있는 너의 등뼈가
몹시 힘겹게 느껴진다.
(김기택·시인, 1957-)


+ 삐걱대는 의자야, 너도

변두리 포장마차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빗방울 소리

마음의 안쪽으로
파고드는
그 소리의 끝을 따라갈 수 없어
우동 먹으러 왔다가 죄 없는 술잔만 비우는데요

마흔 살의 허기,
공복의 찬 속을 확, 확, 불지르는
소주 맛 같은
그런 여자 하나 만났으면 싶은데요

세상도 좀 알고
남자도 좀 아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도 뗄 줄 아는
여자의
휘어질 땐 휘어지고 감을 땐 착착 감는
뽕짝 노래 속으로 들어가,
슬쩍, 손만 대도 젖어드는 몸 속으로 들어가, 들어가
한 사나흘
젓갈처럼 푹 삭았으면 싶은데요, 그런데요

-니에미, 삐걱대는 의자여, 너도 한 잔 해라
(전동균·시인, 1962-)


+ 빈 의자

신경통 앓고
관절염으로 삐그덕거리는 의자가
길 모롱이에서 동면에 빠져있다

든든한 다리가 있어
산도 오르고 강도 건너던 안락의자

젊음으로 버티던 생의 안식도
서서히 황혼처럼 기울어지고
좀 먹은 가구처럼 속이 얇아진 채
동구 밖을 지키는 의자가 되어
땅과 하늘만 쳐다본다

터벅터벅 오실 분도 없는데
누구를 기다리나
한때는 남의 앉을 자리가 되어
푹신한 안락을 주었었는데

세월이 삐그덕하는 사이에
움직이는 종합병원 신세가 되어
긴 한숨만 몰아쉬고 있는 빈 의자

시간의 낭떠러지에서
세월을 붙잡고 한탄한들 무엇하랴
(반기룡·시인)


+ 나는 작은 의자이고 싶습니다

나는 잎이 무성한 느티나무 그 아래
작은 의자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치고 곤하여 의기소침해 있는 날
내가 당신에게 편한 휴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아무런 부담 없이 왔다가
당신이 자그마한 여유라도 안고 갈 수 있도록
더 없는 편안함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분노의 감정을 안고 와서
누군가를 실컷 원망하고 있다면
내가 당신의 그 원망을 다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분노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간혹 당신이 기쁨에 들떠 환한 웃음으로 찾아와서
그토록 세상을 다 가져 버린 듯 이야기한다면
내가 당신의 그 즐거움을 다 담아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내내
미소와 웃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가 비가 억수로 쏟아져
당신이 나를 찾아 주지 못할 땐
내가 먼발치서 당신을 그리워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무슨 이유로 당신이 한동안 나를 찾아오지 못할 땐
내가 애타게 당신을 걱정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한참 뒤에나 내게 나타나게 되거든
한결 가벼운 몸짓으로 내게 이르렀으면 좋겠습니다

또 언젠가 당신의 기억 속에 내가 희미해져
당신이 영영 나를 찾아 주지 않는다 해도

정녕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한 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당신이 내 안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준호·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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