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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에 관한 시 모음> 정호승의 '햇살에게' 외

도토리 조회 3,12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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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에 관한 시 모음> 정호승의 '햇살에게' 외

+ 햇살에게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종일
찬란하게 비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호승·시인, 1950-)


+ 먼지
  
방안에 가득 찬 먼지가
한 줄기 햇빛에 드러난다
이렇게 먼지가 많은데도
아무렇지 않게 숨을 들이 마셨나
저 먼지처럼
보이지 않기에 저지른 잘못들이
얼마나 내 양심 속에 부유하고 있으랴.
(김영월·시인, 1948-)


+ 마음에 낀 먼지

옥에 묻은 먼지는
닦을 수도 있지만

마음에 낀 먼지는
찍어내랴 불태우랴

닦지도 털 수도 없는
안타까운 이 내벽.
(변학규·시인, 1914-?)


+ 먼지

3년 걸려 모은
500만원으로 집수리를 했다.

방을 비우기 위해
세간살이를 밖으로 나르자
온통 먼지, 먼지 투성이었다.

평소 빛나 보이던 가구도
실상은 먼지뿐이었다.

먼지를 재보(財寶)로 착각하다가,
끝내 한 줌 먼지로 사라지는 인생(人生)
먼지는 삶의 시작이자, 삶의 끝이다.
(김시종·시인)


+ 먼지를 보며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던
보석함을 열었다
반지를 들어보니
놓였던 자리만 깨끗하다
서랍 안, 상자 속인데도 먼지가 앉은 것이다
들어갈 틈이 따로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먼지도 스며든다, 그러기 위해
정말 가벼워야 한다
열고 닫는 흐름에 몸을 실을 정도로
미세해야 한다
틈, 보석함이 숨을 쉴 때
들어갈 수 있도록
늘 그리워하고 있어야 한다
먼지가 스며든다는 것-
귀한 것에게로 가는 길은 다 그러할 것이다
나를 가장 작고 가볍게 하여
너를 갖기다
(이성이·시인)


+ 먼지

바람 타고
당신의 어깨 위에
소리 없이 앉아 있다가
당신의 걸음걸이에
마음을 졸입니다.

하찮은
나이지만
당신의 마음이 미치지 못한다 하여도
전 당신의 어깨 위에도
신발 위에도
그 어디에 있어도 좋습니다.
(이향숙·시인)


+ 먼지

처음엔 더럽다고
털어내며 불었었네

곰곰이 생각하니
천 년 전 임의 향기

함부로
털어버릴 것
아니구나 내 인생

뭔지도 몰랐지만
알겠네 세월 가니

가볍게 날리는 몸
꽃 아니면 어떠하리

이 마음
청산을 나니
나비인들 부러우랴
(정문규·시인, 전남 화순 출생)


+ 먼지

새떼들이었구나
서걱이는 하늘 속으로 날아가는,

닦아내지도
털어내지도 못했던

시간의 틈새 끼인 먼지들은.....

휘저어 다오
두들겨 다오

얼음처럼 투명해질 때까지

높이 솟구쳐
가장 낮은 곳으로
날개 접을 때까지
(이진숙·시인, 1972-)


+ 먼지처럼 쌓이는 그리움

먼지를 털어내듯 가슴을 열어
잊고 싶었던 기억을 쫓아보지만
켜켜이 쌓이는 먼지처럼
그리움은 가슴 구석에 쌓여 있다.

문신처럼 새겨진 그리움의 흔적
석양이 붉게 물드는 사이로
그리움은 또 다른 그리움으로
가슴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다.
(주인자·시인, 인천 출생)


+ 먼지 날리는
  
먼지 날리는 창가에서
나는
가뭄 만난 지구
목타는 나무.
내가 그 애를 이토록
보고 싶어하는데
그 애는 어찌
이토록 아니 온담?
그 애가 오면
손을 쥐어주리라,
아프다고 말할 때까지
그 애의 손에서
예쁜 꽃물이라도
스밀 때까지.
(나태주·시인, 1945-)


+ 먼지
  
한국 냄새 그리워서
공항에 나간다

쏴아 하니
밀려오는 낯익은 방언

투박한 질그릇에
곰삭은 눈들

열여섯 하숙 시절
남관주역 대합실서
내 고향 보성 냄새 맡았었는데

서른 여섯 그 여자는
아직도 고향에 가지 못하고
점보기 은날개 파득이는
잔 케네디 공항에서

누군가 떨구고 간
한국 먼지 하나 주워 들고
혼자 서 있다.

이 먼지에 기대어
석달 열흘은 또 살아 내리라.
(문정희·시인, 1947-)


+ 먼지처럼

푸른 일요일이 왔다
열 시간을 자고 다시 일곱 시간 잤는데
햇빛을 피해 자리를 옮겨가며
먼지처럼
행복하게 잠을 잤는데
그냥 잠잔 것은 아니다 내가
푸른 일요일을
한 끼도 안 먹고 잠을 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맑은 세상 맑은 기운으로
잘 돌아가라고
세상에다 두고 하루라도
내 죄 짓지 않을까 하여
해 다 기운 걸 보고야
늦게 뒤척이며
좋은 마음에 시 한 편 썼는데
생각해 보니
세상에 큰 죄 다시 지었다
(박윤규·시인, 경남 산청 출생)


+ 먼지에 대하여  

될 수 있으면
틈을 보지 마라
머리카락이나 보푸라기들이
무더기로 모여 있기 쉬운 곳
집주인의 비밀이 묻어 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살비듬에는
다닥다닥 이야기가 붙어 있다
닦아낸 그 자리에 다시 앉는
먼지 닦아내면 또 앉을 먼지
제 몫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안고 있는 먼지

억지로 떼어내면 금방이라도
빨간 피가 묻어날 것처럼
치열하게 달라붙는다

틈이 많은 삶
그런 곳의 먼지에 대하여
쓸쓸해지는 날
이해하라 용납하라 때론
딱지 아래 핏물까지도
(서연정·시인, 1959-)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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