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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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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에 관한 시 모음> 김종구의 '밥숟가락에 우주가 얹혀있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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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에 관한 시 모음> 김종구의 '밥숟가락에 우주가 얹혀있다' 외


+ 밥숟가락에 우주가 얹혀있다

그렇다

해의 살점이다
바람의 뼈다
물의 핏덩이다
흙의 기름이다

우주가
꼴깍 넘어가자
밤하늘에 쌀별
반짝반짝 눈뜨고 있다
(김종구·농부 시인, 1957-)


+ 쌀 한 톨

쌀 한 톨 앞에 무릎을 꿇다
고마움을 통해 인생이 부유해진다는
아버님의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쌀 한 톨 안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해질녘
어깨에 삽을 걸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정호승·시인, 1950-)


+ 심연

밥알이 나의 손을 바라본다.
밥알과 내가 서로의 혀 속에 안겨 깊이깊이 심연으로 내려간다.

멈춰라, 밥알
(강은교·시인, 1945-)


+ 흰 밥

해는 높고
하늘이 푸르른 날
소와 쟁기와 사람이 논을 고르고
사람들이 맨발로 논에 들어가
하루종일 모를 낸다
왼손에 쥐어진
파란 못잎을 보았느냐
캄캄한 흙 속에 들어갔다 나온
아름다운 오른손을 보았느냐
그 모들이
바람을 타고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파랗게
몸을 굽히며 오래오래 자라더니
흰 쌀이 되어 우리 발 아래 쏟아져
길을 비추고
흰 밥이 되어
우리 어둔 눈이 열린다

흰 밥이 어둔 입으로 들어갈 때 생각하라
사람이 이 땅에 할 짓이 무엇이더냐
(김용택·시인, 1948-)


+ 꽃밥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
마른나무에 목단, 작약이 핍니다
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엄재국·시인, 경북 문경 출생)


+ 꽁보리밥

보리밥보다
더 어두운 밥

'꽁'
그 말 하나가 보태는

먹어도 고픈
듣기만 해도
먼저 허기지는
남루한 음식

그래도 입 속에서
머물대다 넘어가는 것이

과욕을 누르고
과식을 용서해 줄
이름만으로도
참으로 낮아지는
꽁보리밥.
(정두리·아동문학가, 1947-)


+ 남긴 밥

강아지가 먹고 남긴
밥은

참새가 와서
먹고,

참새가 먹고 남긴
밥은

쥐가 와서
먹고,

쥐가 먹고 남긴
밥은

개미가 와서 물고 간다.
쏠쏠쏠 물고 간다.
(이상교·아동문학가, 1949-)


+ 밥 생각

차가운 바람 퇴근길 더디 오는 버스 어둡고 긴 거리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텅 비어 쭈글쭈글해진 위장을 탱탱하게 펴줄 밥
꾸룩꾸룩 소리나는 배를 부드럽게 만져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밥
잡생각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려주고
깨끗해진 머릿속에 단정하게 들어오는
하얀 사기 그릇 하얀 김 하얀 밥
머리 가득 밥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밥 생각으로 점점 배불러지는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환해지고 동그래지는 얼굴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난폭하게 밀려들어올 오만가지 잡생각
머릿속이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지면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버릴 밥 생각
(김기택·시인, 1957-)


+ 밥

귀 떨어진 개다리소반 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 그릇의 더운밥을 먹기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
몇 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
밥 한 그릇의 사슬에 매달려 있는 목숨
나는 굽히고 싶지 않은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놓고
잡고 싶지 않은 손을 잡고
정작 해야 할 말을 숨겼으며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했으며
잡고 싶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왜 밥을 먹는가, 오늘
다시 생각하며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양심의 말들을
파기하고 또는 목구멍 속에 가두고
그 대가로 받았던 몇 번의 끼니에 대하여
부끄러워한다.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아아
나는 가롯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한다. 밥 한 그릇에
나를 팔지 않기 위하여.
(장석주·시인, 1954-)


+ 식탁은 불후의 명작 한 편이다

식탁 가에는 숨소리 익은 식구들이 있다
식탁에는 식구라는 가장 따뜻한 이름들이 마주앉는다

아삭아삭 상추잎을 명편 수필처럼 싸 입에 넣으면
하루가 이슬처럼 맑아지는 식탁 가의 시간

살짝 데친 우엉잎은 한 행의 시구다
누가 처음 두근거리며 불렀을
아버지 누나 오빠 아우라는 말들이 밥상 가에 둘러앉는다
식지 않은 된장찌개의 열의는 곁에서 끓는다

누구든 식구에게는 손으로 편지를 쓴다
손으로 쓴 편지는 식구를 울게 한다
기뻐서 우는 마음이 식구의 마음이다

나무의 나이테같이 동그랗게 둘러앉은 얼굴 송이들
수저도 정갈히 놓아두는 식탁 가에서
간장종지도 고추장 접시도 악기가 되는 시간이
떨기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아직도 춥다면 마음이여
놋숟갈로 아욱국을 떠먹으렴
이 평범한 한 끼 식탁이 식구의 하루를 밝힐 때

밥상은 불후의 명편
식탁은 불멸의 명작 한 편이다
(이기철·시인, 1943-)


+ 밥

어머니 누워 계신 봉분(封墳)
고봉밥 같다

꽁보리밥
풋나물죽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데
늘 남아도는 밥이 있었다

더 먹어라
많이 먹어라
나는 배 안 고프다
남아돌던
어머니의 밥

저승에 가셔도 배곯으셨나
옆구리가 약간 기울었다
(이무원·시인)


+ 객지밥

빈 그릇에 소복이 고봉으로 담아놓으니
꼭 무슨 등불 같네

한밤을 건너기 위해
혼자서 그 흰 별무리들을
어두운 몸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넣는 밤,

누가 또 엎어버렸나

흰 쌀밥의 그늘에 가려 무엇 하나 밝혀내지 못한
억울한 시간의 밥상 같은
창 밖, 저 깜깜하게 흉년든 하늘
개다리소반 위에

듬성듬성 흩어져 반짝이는 밥풀들을
허기진 눈빛으로 정신없이 주워 먹다
목 메이는 어둠 속

덩그러니, 불 꺼진 밥그릇 하나
(이덕규·시인, 1961-)


+ 밥에 대한 예의

폭설 내리고 한 달
나무들은 제 그늘 속에
아직도 녹지 않은 눈을 내달고 있다
나중에 먹으려고 남겨둔
식은 밥처럼

인근 취로사업장에서 이곳 공원으로 찾아든 아낙들이
도시락을 먹는다
그 동안 흰 눈밥이 너무 싱거웠던가
물씬 피어나는 파김치와 깻잎 장아찌 냄새에
조용하던 나뭇가지가 한순간 일렁인다

어서 흰 밥덩이를 모두 해치우고
또 보도블록을 교체하러 가야 하는 저이들
밀어넣는 밥숟갈이 너무 크다
크고 헐렁한 위장은 또 얼마나 위대한가*

그러나
나무들은 천천히 눈밥을 녹여가며 먹는다
저번 눈밥보다 맛이 어떤가 음미하면서,
서서히 뿌리가 가지로 맛을 전하면서,
제 몸의 기관들 일제히 물오르는 소릴 들으면서
나무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예우를 다 갖추어
눈밥을 떠먹는다
(문성해·시인, 경북 문경 출생)
*장석주 시인의 시 제목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에서 인용


+ 마당밥

일찍 나온 초저녁별이
지붕 끝에서 울기에

평상에 내려와서
밥 먹고 울어라, 했더니

그날 식구들 밥그릇 속에는
별도 참 많이 뜨더라

찬 없이 보리밥 물 말아먹는 저녁
옆에, 아버지 계시지 않더라
(안도현·시인, 1961-)


+ 밥 먹는 일  

  큰 수술 받은 아내하고 둘이서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는다 모름지기 밥 먹는 일이 범상하지 않음이여, 지금 우리는 한차례 제사를 드리고 있다 생기 잃은 몸에 정성껏 공양을 드린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온 맘을 다해 청포 갖춰 입은 방아깨비처럼 절을 올린다 서로의 몸에 절을 올린다
(장옥관·시인, 1955-)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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