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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0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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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관한 시 모음> 이준관 시인의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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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관한 시 모음> 이준관 시인의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마당이 내 집이었지.

내가 송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 다녔을 때
푸른 들판이 내 집이었지.

내가 잠자리처럼 은빛 날개를 가졌을 때
파란 하늘이 내 집이었지

내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집은 많았지.
나를 키워 준 집은 차암 많았지.
(이준관·시인, 1949-)


+  내 가난한 여행

추억이라는 열차에 동전을 넣는다
좌석표에는 몇 가지 이름이 있다
아픔, 미련, 향수, 고독, 가난, 열정, 웃음
추억이라는 이 열차에는 그래서
일등석이 없다
모든 좌석들이 희미하게 열려진
풍경들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흔들거리며 추억의 깊이까지 저려온다
어두운 터널을 두 개를 지나서야
승무원이 추억을 검표하러 걸어오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멈추어야 할 정류장을 지나
너무 멀리까지 추억을 보고 오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의 추억은 가난했다
매일 하루하루가 그렇게 세상에 빚을 졌다
그런 나의 여윈 추억이 검표원에게 건네진다
그는 나에게 미련이라는 좌석으로
옮겨 앉으라고 말한다
왜 추억은 향기가, 웃음이, 침묵이
더욱 간절했던 것일까?
깊은 잠이 온다
추억을 사랑했던 지친 피곤들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이제 막 오늘이 어제라는 추억의 입구를 지나며,
아주 긴 눈물이 흐르고 있다
멈추어야 할 정류장을 벌써 두 정거장이나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한용섭·시인)


+ 푸른 곰팡이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이문재·시인, 1959-)


+ 옛날 아이들

옛날 아이들은
장난감이 귀해서
겨울이 가면
풀밭에서 놀았는데
풀물이 들고
꽃물이 들어서
깁고 기운 옷인데도
봄 냄새가 났다나요.

옛날 아이들은
먹을 것도 귀해서
여름이 가면
감나무 밑에서 놀았는데
감물이 들고
흙물이 들어서
땀이 밴 옷인데도
풋과일 냄새가 났다나요.
(이문구·소설가, 1941-2003)


+ 처자

주방 옆 화장실에서
아내가 아들을 목욕시킨다
엄마는 젖이 작아 하는 소리가
가만히 들린다
엄마는 젖이 작아
백열등 켜진 욕실에서 아내는
발가벗었을 것이다
물소리가 쏴아 하다 그치고
아내가 이런다 얘, 너 엄마 젖 만져봐
만져도 돼? 그러엄. 그러고 조용하다
아들이 아내의 젖을 만지는 모양이다
곧장 웃음소리가 터진다
아파 이놈아!
그렇게 아프게 만지면 어떡해!
욕실에 들어가고 싶다
셋이 놀고 싶다
우리가 떠난 먼 훗날에도
아이는 사랑을 기억하겠지
(고형렬·시인, 1954-)


+ 옛 애인을 추억하며

가만히 나를 더럽히고 싶다고
허리를 안으며 말했었지
그래서 그대를 떠나왔건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대가 남긴 말 중에서
어찌 그 말만이 유독,
그리운 것일까
늦은 밤 골목길 돌아
집으로 오는 날이면
아직도 늘 그 말이 그리운 것은
사소한 바람에도 몸을 흔드는
저 은사시나무 때문일까
사랑의 깊이란 왜,
그대 입술 흔적만큼만 남았는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옛 애인을 생각해 보네
(이도연·시인)


+ 흔적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어머니가 벗어놓은 그림자만 남아 있다
저승으로 거처를 옮기신 지 2년인데
서울특별시 강서구청장이 보낸
체납주민세 납부청구서가 날아들었다
화곡동 어디 자식들 몰래 살아 계신가 싶어
가슴이 마구 뛰었다
(정희성·시인, 1945-)


+ 한 농부의 추억

그는 살아서 세상에 알려진 적도 없다
대의원도 군수도, 한 골을 쩌렁쩌렁 울리는 지주도 아니었고
후세에 경종을 울릴만한 계율도 학설도 남기지 못하였다

그는 다만 오십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살았고
유월의 햇살과 고추밭과 물감자꽃을 사랑했고
토담과 수양버들 그늘과 아주까리 잎새를 미끄러지는
작은 바람을 좋아했다
유동꽃 이우는 저녁에는 서쪽 산기슭에 우는
비둘기 울음을 좋아했고
타는 들녘끝 가뭄 속에서는 소나기를 날로 맞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는 쇠똥과 아침 이슬과 돌자갈을 은화처럼 매만졌고
쟁기와 가래와 쇠스랑을 자식처럼 사랑했다
더러는 제삿날 제상에 어리는 불빛을 좋아했고
농주 한 잔에도 생애의 시름을 잊곤했다
수많은 영웅과 재사와 명언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이 농부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가 쓰던 낫과 그가 키우던 키 큰 밤나무와
밤꽃이 필 때 그가 완강한 삶의 일손을 놓고
소슬한 뒤란으로 돌아간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이기철·시인, 1943-)


+ 초등학교의 황혼

그 키 큰 느티나무가 왜 이렇게 작아졌을까
발돋음하여도 발돋음하여도 손 닫지 않던 수양버드나무 가지에 하루해가 걸려
놀로 지는 지붕이 아름답던 그때
숨차게 달려도 먼 산처럼 닿을 수 없었던 운동장
그 끝에 서 있던 백양나무는 둥치만 남고
우리가 깔매놀이를 하던 플라타너스 밑에 우뚝 서 있던
그 바위는 삭아 흙이 된 지금
우리가 차던 재기, 우리가 받고 놀던 공깃돌도 먼지가 된 지금
황혼녘의 지붕은 담요처럼 포근하고
잔광에 반짝이는 기왓장들만 숨쉬는 목숨이 되어
이 적막과 저 적막을 불러와 산 뒤에 앉힌다
누구의 소년이든 한번은 이 황혼에 발 묻었을 것이다
누구든 한번은 이 황혼이 제 추억의 이불이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수천의 잎새 뒤로 저녁별이 돋을 때
제 가슴의 슬픔을 세수시키고 누구든 그 반짝이는 기쁨 속으로
달려간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랬을 때 누구든 소낙비 같은 풍금소릴 들었을 것이고
창문에 부딪치는 바람소릴 들었을 것이다
그때의 친구들, 지금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봄이면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움이 땅위로 솟던
그날의 글라디올러스와 그날의 난초잎과
그날의 조회단을 기억할 것이고
그날의 돌계단과 그날의 칠판을 기억할 것이다
아니, 더러는 일곱 살 난 제 아이에게 가방을 메어주며
운동장에 버린 그날의 검정 운동화를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삶은 슬픈 것만도 아니고 외로운 것만도 아니라고
소줏잔을 어루만지며
노랫말도 곡조도 반쯤은 잊어버린 유행가를 부를 것이고
햇살처럼 쨍쨍한 추억이 있고 그 추억에 불을 켤 마음의 심지가 있다면
삶은 남루도 아니고 넝마도 아니라고
헌 책갈피에 시인의 흉내를 내며 한 줄 글말을 써넣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찬란한 오늘도 어제 속에 묻힌다
어제라는 추억의 고삐를 당기면
누구의 추억이든 기운 자리가 오히려 아름다운
다림질한 모본단 저고리가 된다
슬프기 위해 쓰는 시는 없어도
슬프기 위해 부르는 노래는 있듯이
아름답기 위해 깨어지는 유리창은 없어도
아름답기 위해 찢어지는 색종이는 있다
그 느티나무 그늘에서 익힌 말과 글로 선생을 하고
그 버드나무 그늘에서 익힌 생각의 수틀로 시를 쓰는 지금
한번도 남을 미워해 본 적 없는 산 아래 누워
들판이 꾸던 꿈을 대신 꾸며
햇살이 닿을 때 떨리는 잎의 마음으로
오늘은 잘 떠오르지 않는 들꽃의 이름을 불러보고
옛날 만지던 따뜻한 돌멩이를 만진다
황혼이 아름다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이기철·시인, 1943-)


+ 추억(追憶)

알록달록
기쁨과 슬픔의
집을 지으며 살아왔네

산새알 물새알 같은
아롱다롱 추억들이 쌓여

세월의 강을 건너는
돛단배 되네

눈물짓던 시절도
세월이 흘러 뒤돌아보면
그리움으로 남는 것

사랑하던 사람은
가고 없어도

가슴속 깊은 곳
연분홍 사랑의 추억은 남아

고단한 한세월
그럭저럭 견딜 만하지

오!
추억의 힘이여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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