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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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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관한 시 모음> 김해자 시인의 '바람의 경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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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관한 시 모음>  김해자 시인의 '바람의 경전' 외

+ 바람의 경전

산모퉁이 하나 돌 때마다
앞에서 확 덮치거나 뒤에서 사정없이 밀쳐내는 것
살랑살랑 어루만지다 온몸 미친 듯 흔들어대다
벼랑 끝으로 확 밀어버리는 것
저 안을 수 없는 것
저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것
어디서 언제 기다려야 할 지 기약할 수조차 없는 것
애비에미도 없이 집도 절도 없이 광대무변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허공에 무덤을 파는,
영원히 펄럭거릴 것만 같은 무심한 도포자락
영겁을 탕진하고도 한 자도 쓰지 않은 길고긴 두루마리
몽땅 휩쓸고 지나가고도 흔적 없는
저 헛것 나는 늘 그의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김해자·시인, 1961-)


+ 바람의 내력

천 년 전 불던 바람과
지금의 바람은
다른 것 같지만
늘 같은 가락으로 불어
변한 데라곤 없네
언뜻 느끼기에는
가난한 우리집에
서글피 불던 바람과
저 큰 부잣집에
너그럽게 머물던 바람이
다른 듯 하지만
결국은 똑같네
잘 살펴보게나
안 그렇던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어차피 이 테두리와 같다네
(박재삼·시인, 1933-1997)


+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길은 사통팔달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천상병·시인, 1930-1993)


+ 멈추지 말라고

멈추지 말라고
흐르는 바람이 내게 말했습니다
삶에 지쳐 세상 끝에 닿았다 생각되더라도
멈추지 말라고 멈추지는 말라고
흐르는 바람이 내게 말했습니다

길은 어디까지 펼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길은 그 어디까지 우리를 부르는지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내일이 있기에 여기 서서
다시 오는 내일을 기다려 봅니다

누가 밀어내는 바람일까
흐느끼듯 이 순간을 돌아가지만
다시 텅 빈 오늘의 시간이 우리 앞에 남겨 집니다
내일은 오늘이 남긴 슬픔이 아닙니다
내일은 다시 꽃 피우라는 말씀입니다
내일은 모든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먼 길입니다
(정공량·시인, 1955-)


+ 바람의 사생활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 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 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 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 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 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병률·시인, 1967-)


+ 풍경 소리

추녀 끝에
물고기 한 마리

죽었을까?
살았을까?

바람이 살짝 건드려 봅니다

땡그랑 땡그랑

물고기는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맑고 고운 소리를 냈습니다

땡그랑 땡그랑

죽은 물고기를
바람이 살려 놓고 갔습니다.
(최새연·아동문학가)


+ 바람은

바람은
아침 솔숲에
가지런히 머리를 빚고

종일
들판으로 가서
보리밭을 누빈 다음

해질녘
언덕에 올라
억새꽃을 쓰다듬는다.

바람은
저녁 대숲
댓잎들과 수런대다

외딴집
뒤꼍을 넘어가
문풍지도 울려보다가

한밤중
고른 숨소리로
잠이 든다, 고요가 된다.
(조동화·시인, 1939-)


+ 친구 바람에게

나뭇잎을 스치며
이상한 피리 소리를 내는
친구 바람이여

잔잔한 바다를 일으켜
파도 속에 숨어 버리는
바람이여
나의 땀을 식혀 주고
나의 졸음 깨우려고
때로는 바쁘게 달려오는
친구 바람이여

얼굴이 없어도
항상 살아 있고
내가 잊고 있어도
내 곁에 먼저 와 있는 너를
나는 오늘 다시 알았단다

잊을 수 없는 친구처럼
나를 흔드는 그리움이
바로 너였음을
다시 알았단다.
(이해인·수녀, 1945-)


+ 바람

산기슭을 돌아서 언 강을 건너서 기름집을 들러
떡볶이집을 들러 처녀애들 맨살의 종아리에 감겼다가
만화방도 기웃대고 비디오방도 들여다보고

큰길을 지나서 장골목에 들어서니
봄나물 두어 무더기 좌판 차린 할머니
스웨터를 들추고 젖가슴을 간질이고
흙먼지를 날리고 종잇조각을 날리고

가로수에 매달려 광고판에 달라붙어
쓸쓸한 소리로 촉촉한 소리로
울면서 얼어붙은 거리를 녹이고
팍팍하게 메마른 말들을 적시고
(신경림·시인, 1936-)


+ 바람이 하는 말

바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았니

오월의 푸른 잎새들의
갈피마다 살랑대는 바람이

나지막이 속삭이는
말없는 말

흘러라
막힌 데 없이 흘러라

그러면 잎새들은 잠 깨어
깃털처럼 흔들리나니

모양도 빛도 없는
나의 생명의 유일한 힘은

그저 흐름의 힘일 뿐
그것 말고 나는 무(無)일 뿐
(정연복, 1958-)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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