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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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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에 관한 시 모음> 손택수 시인의 '외할머니의 숟가락'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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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에 관한 시 모음>  손택수 시인의 '외할머니의 숟가락' 외

+ 외할머니의 숟가락

외갓집은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
숟가락부터 우선 쥐여주고 본다
집에 사람이 있을 때도 그렇지만
사람이 없을 때도, 집을 찾아온 이는 누구나
밥부터 먼저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게
고집 센 외할머니의 신조다
외할머니는 그래서 대문을 잠글 때 아직도 숟가락을 쓰는가
자물쇠 대신 숟가락을 꽂고 마실을 가는가
들은 바는 없지만, 그 지엄하신 신조대로라면
변변찮은 살림살이에도 집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그릇의 따순 공기밥이어야 한다
그것도 꾹꾹 눌러 퍼담은 고봉밥이어야 한다
빈털터리가 되어 십년 만에 찾은 외갓집
상보처럼 덮여 있는 양철대문 앞에 서니
시장기부터 먼저 몰려온다 나도
먼길 오시느라 얼마나 출출하겠는가
마실간 주인 대신 집이
쥐여주는 숟가락을 들고 문을 딴다
(손택수·시인, 1970-)


+ 숟가락

숟가락을 드는데
어제는
누가 사용했을까?
누구의 입에 들어갔던 것일까?
사용한 자국도 없이
잘 씻기고
반짝반짝 닦여서
얇은 종이에 싸여 있지만,
입과 입을 연결시키며
우리들 모두
한솥밥 나눠 먹는
형제들로 만들고 싶어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따라
밥을 뜨는 내 숟가락에는
훈훈한 사랑이 구수하게 솟아나며
내 입맛을 돋우는 것이었다.
(박일·시인, 1969-)


+ 목이 부러진 숟가락

어머니는 목이 부러진
내 알루미늄 숟가락을 버리지 않으셨다
부뚜막 작은 간장종지 아래에다 놔두셨는데
따뜻해서 갖고 놀기도 좋았다 눈두덩이에도 대보고
배꼽 뚜껑을 만들기도 했다
둥근 조각칼처럼 생겼던 손잡이는
아끼기까지 하셨다 고구마나 감자를 삶을 때
외길로 뚫고 간 벌레의 길을 파내시는 데
제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를 찾아뵐 때마다, 내 몸은
탄저병에 걸린 사과나 굼벵이 먹은 감자가 되어
한 켜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다
숫제, 내가 한 마리 벌레여서
밤고구마나 당근의 단단한 속살을 파먹고 있고
내 숟가락은 아직 생기지도 않았고
어머니는 외할머니 댁 추녀 밑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그런 벌레 알 같은 생각을 꼼지락거리기도 한다
숟가락 손잡이로 둥글고 깊게
나를 파고 나를 떼내다가
지금은 없는 간장종지 아래에
지금은 없는 내 목 부러진 숟가락을
모셔두고 온다
(이정록·시인, 1964-)


+ 딱 한 가지

숟가락 하는 일은
딱 한 가지

하루 종일
놀다가
아침 저녁 잠깐씩
밥과 국을 떠
입에 넣는 일밖에 없다.

그런데
그 일 한 가지가
사람을 살리네
목숨을 살리네

고마운 숟가락
밥숟가락!
(엄기원·아동문학가, 1937-)


+ 숟가락

너는 참 좋은 일만 한다
내 몸에 좋은 것을 넣어 주려고
매일 매일 내 입 가까이
와서는 한 발 들여놓았다가
다시 나가지

아예 쑥 들어왔다가
놀다 가는 것도 아니고
먹을 것만 쏘옥 넣어 주고
슬쩍 사라졌다가는
다시 와서 한 입 주고 가지  

입맛 없을 때는 먹기 싫은데  
꼭 한 입 넣어 주고야 마는 너는
참 대단한 녀석이야
식사가 끝나면 시치미 뚝 떼고
네 자리에
얌전하게 들어가  
다음을 기다릴 줄도 아는 넌
역시 멋진 녀석이야
(한선자·아동문학가)


+ 떡잎  

씨앗의 숟가락이다

뜨겁지 않니?
햇살 한 숟갈

차갑지 않니?
봄비 한 숟갈

씨앗의 첫 숟가락이다

봄이 아끼는
연둣빛 숟가락
(조영수·아동문학가)


+ 수저  

아이가 두 시간째 주방에서 달그락거리고 있다
몸져누워 먼 세상일인 듯 듣는 아득히 낯선 소리
서툴게 부딪는 숟가락 소리,
살아있다는 건 누워서 듣는
달그락거리는 수저소리쯤 될까
죽은 후에도 저 하나쯤 가져가고 싶은 소리

숨이 끊어진 뒤에 마지막까지 남는 건 청각이라는데
문득, 아버진 무슨 소릴 가져갔을까 궁금하다

호흡기 떼기도 전에,
글쎄, 시트 밑에서 통장이 여섯 개나 나왔는데
우리도 모르는 통장이,
관리는 누가 하냐 첫째는 멀리 있어 안 되고
둘째는 좀 불안하고, 너는 생전에 아버지 애 먹여서 안 되고,
아버지의 일생을 가볍게 들었다 놨다,

마지막까지 통장통장 하던 소리, 육남매 덜걱대는 소리,
태어나서 시작되고
죽을 때 거두어가는 게 수저소리일 텐데
그 소리 대신,
결국 아버지는 자신의 통장을 다 가져가신 셈이다
(이규리·시인, 1955-)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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