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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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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반성하는 시 모음> 기자영 시인의 '내가 미워하는 것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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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반성하는 시 모음>   기자영 시인의 '내가 미워하는 것은' 외


+ 내가 미워하는 것은

나는 거짓말쟁이를 미워하나요?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를 미워하나요?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게으름뱅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수다쟁이를 미워하나요?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수다쟁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만한 이를 미워하나요?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교만한 자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무지한 자를 미워하나요?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바로 무지한 자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벼락부자를 미워하나요?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바로 벼락부자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모든 것은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분별의 사슬에 묶여 꼼짝 못하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용서의 열쇠로 이 사슬을 풀어주세요.
자유로운 내가
거짓말쟁이를 도울 수 있도록
자유로운 내가
게으름뱅이를 도울 수 있도록
자유로운 내가
수다쟁이를 도울 수 있도록
자유로운 내가
교만한 이를 도울 수 있도록
자유로운 내가
무지한 이를 도울 수 있도록
자유로운 내가
벼락부자를 도울 수 있도록
자유로운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를 도울 수 있도록
다름 아닌 나를 도울 수 있도록
사랑으로 하나될 수 있도록.
(기자영·시인, 1965-2009)

+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 걸어온 길 되돌아보며
나로 하여 슬퍼진 사람에게 사죄합니다
내 밟고 온 길
발에 밟힌 풀벌레에게 사죄합니다

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받은 이
내 길 건너며 무표정했던
이웃들에 사죄합니다

내 작은 앎 크게 전하지 못한 교실에
내 짧은 지식 신념 없는 말로 강요한
학생들에 사죄합니다

또 내일을 맞기 위해선
초원의 소와 순한 닭을 먹어야 하고
들판의 배추와 상추를 먹어야 합니다
내 한 포기 꽃나무도 심지 않고
풀꽃의 향기로움만 탐한 일
사죄합니다

저 많은 햇빛 공으로 쏘이면서도
그 햇빛에 고마워하지 않은 일
사죄합니다
살면서 사죄하면서 사랑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기철·시인, 1943-)

+ 중심

사람의 깊이를 모르겠다
어제의 얼굴이 다르고
오늘 얼굴이 다르다

저렇게 넓은 집에서 어떻게 시가 나올까
저렇게 윤기나는 밥상에서 어떻게 소말리아가 보일까
저렇게 멋진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어떻게 실직자들이 보일까

노을의 실체를 알고부터였다
오랫동안 헤어져 지낸 친구를 만나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도
마음이 열리지가 않는다, 저 삶이 정말 정당한 것인지

오죽했으면 사람의 깊이를
패랭이꽃에게 물었으랴
오죽했으면 사람의 깊이를
날아가는 새에게 물었으랴

오늘도 나는 잔가지만 잔뜩 보고 돌아와
꽃병 가득 꽂혀 있는 장미를 들어낸 뒤
꽃병 안만 들여다본다

눈물로 꽃을 키우다니…… !
(박영희·시인, 1962-)

+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들어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 주는 바람뿐
(황지우·시인, 1952-)

+ 사랑의 눈병

여름의 끝에 사랑의 눈병을 얻었다
의사의 진단은 너무 쉽게 세상을 외면한 병
나는 너무 쉽게 사람을 외면하며 등 돌렸다
(안과 의원을 찾아가면서도
지하도의 맹인 악사를 외면했다!)
눈은 세상과 사람을 찾아 비추는 거울
외면하는 눈은 거울이 아니라 어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까지 멀어지고
눈을 잃는 것은 마음까지 잃는 것이려니
이제 아픈 눈을 굵은 소금으로 씻어
가을 햇살에 잘 말리고 싶다
그런 사랑을 위해 오는 눈병이라면
망막 가득 9월의 따뜻한 햇살을 담아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사람을 보는
사랑의 눈병 그대들에게 전염시키고 싶어
흐르는 바람 빛나는 별을 향해 서서
핏발 선 두 눈을 씻는다.
(정일근·시인, 1958-)

+ 관객을 위하여

나는 늘 주인공이었다
아니, 주인공이고 싶었다
주인공이 아닐 때도 구경꾼이기를 거부하고
주인공이려고 노력했다
관객은 언제나 넘쳐났다
결혼을 한 뒤에는 우선 아내가 관객이었고
아이들이 관객이었다
한 번도 주인공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관객의 외로움이나 고달픔 같은 건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건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 자라고 결혼도 하고
43년이나 타고 온 기나긴 교직열차에서도 하차하려고 하나
내가 결코 끝까지 주인공일 수는 없는 일이구나
그 동안 나 하나만의 일인극을 줄기차게 바라보아 준 사람들
그 누구보다도 아내의 고달픔이-외로움이
얼마나 컸을까, 짐작되어진다
관객의 외로움, 그것이 이제는 내 몫으로 떨어지다니...
이 염치없음이여! 어이없음이여!
두려움이여!
(나태주·시인, 1945-)

+ 문턱

문턱이란 말일세
기하학적으로 보자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로놓인 직선이지
성벽처럼 완고한 직선 말일세

가로놓인 직선을 구십도 돌려
세로로 놓는 거야
섬과 섬, 말과 말을 이어주는
통로가 되지
생각만 바꾸면 문턱도
소통이 되는 거라구

자, 보라구
허물어 허물어져 세상이 환해지지 않는가

정작 허물 수 없는 것 하나 있다면
내가 나의 문턱이라는 것
(금별뫼·시인)

+ 오타

컴퓨터 자판기로
별을 치다 벌을 치고
사슴을 치다 가슴을 친다.

오타 투성이 글
내 수족에 딸린 손이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마음은 수십 번 그러지 말자 다짐하지만
남의 마음같이 느닷없이 끼어드는 오타

어찌하랴,
어찌하랴,
입으로 치는 오타는
여지없이 상대의 맘에
상처를 남기고 돌아오는 것을
한번 친 오타 바로잡는 일 이틀, 사흘
그 가슴에 흔적 지우기 위해
얼마나 긴 세월 닦아야 할지

숱한 사람들 맘에 쳐날린 오타들
더러는 지우고 더러는 여전히 비뚤어진 채
못처럼 박혀 있을 헛디딘 것들

어쩌면 생은 그 자체로 오타가 아닌가
그때 그 순간의 선택이 옳았는가
곧은 길 버리고 몇 굽이 힘겹게 돌아치진 않았는가
돌아보면
내 삶의 팔할은 오타인 것을
(전태련·시인, 경북 칠곡 출생)

+ 내가 나의 감옥이다

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가시 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
몸이 갈망하면 바늘편견이 시큰둥해져
겹겹으로 가두어져 여기까지 왔어라.
(유안진·시인, 1941-)

+ 아, 그걸 점심 값이라고  

어떤 순결한 영혼은 먹지처럼 묻어난다.
가령 오늘 점심에는 사천 원 짜리 추어탕을 먹고 천 원짜리 거슬러 오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까박까박 조는 남루의 할머니에게
'이것 가지고 점심 사 드세요' 억지로 받게 했더니,
횡단보도 다 건너가는데 '미안시루와서 이거 안받을랩니다' 기어코 돌려 주셨다.
아, 그걸 점심값이라고 내놓은 내가 그제서야 부끄러운 줄 알았지만,
할머니는 섭섭하다거나 언짢은 기색은 아니었다.
어릴 때 먹지를 가지고 놀 때처럼, 내 손이 참 더러워 보였다.
(이성복·시인, 1952-)

+ 오늘 하루

어두운 하늘을 보며 저녁 버스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이것저것 짧은 지식들은 많이 접하였지만
그것으로 생각은 깊어지지 않았고
책 한 권 며칠씩 손에서 놓지 않고 깊이 묻혀
읽지 못한 나날이 너무도 오래 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지만
만나서 오래 기쁜 사람들보다는 실망한 사람이 많았다
...... 나는 또 내가 만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을 것인가
미워하는 마음은 많았으나 사랑하는 마음은 갈수록 작아지고
분노하는 말들은 많았지만 이해하는 말들은 줄어들었다
소중히 여겨야 할 가까운 사람들을 오히려 미워하며
모르게 거칠어지는 내 언어만큼 거칠어져 있는 마음이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덜컹거렸다
단 하루를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서
오늘도 혁명의 미래를 꿈꾸었다.
(김남주·시인, 1946-199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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