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새글

05월 17일 (금)

안녕하세요

좋은글

목록

<이사에 관한 시 모음> 나희덕 시인의 '저 물결 하나' 외

도토리 조회 2,479 댓글 0
이전글
다음글


<이사에 관한 시 모음>  나희덕 시인의 '저 물결 하나' 외


+ 저 물결 하나

한강 철교를 건너는 동안
잔물결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얼마 안 되는 보증금을 빼서 서울을 떠난 후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한강.
어제의 내가 그 강물에 뒤척이고 있었다
한 뼘쯤 솟았다 내려앉는 물결들.
서울에 사는 동안 내게 지분이 있었다면
저 물결 한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결 하나 일으켜
열 번이 넘게 이삿짐을 쌌고
물결 하나 일으켜
물새 같은 아이 둘을 업어 길렀다
사랑도 물결 하나처럼 
사소하게 일었다 스러지곤 했다
더는 걸을 수 없는 무릎을 일으켜 세운 것도
저 낮은 물결 위에서였다
숱한 목숨들이 일렁이며 흘러가는 이 도시에서
뒤척이며, 뒤척이며, 그러나
한 번도 같은 자리로 내려앉지 않는
물결 위에 쌓았다 허문 날들이 있었다
거대한 점묘화 같은 서울.
물결 하나가 반짝이며 내게 말을 건넸다
저 물결을 일으켜 또 어디로 갈 것인가
(나희덕·시인, 1966-)

+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고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뵌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
(이문재·시인, 1959-)

+ 벽지를 바르며

일요일 아침
우리 가족 벽지를 바른다.
돌돌 감긴 벽지를 펼치니
화들짝 피어나는 꽃무늬

새해에는 넓은 집으로
이사할 거라던 어머니
이사 대신
누렇게 바래 버린 벽지 위에
새하얀 꽃무늬 벽지를 바른다.
우리 가족 서투른 도배는
꽃무늬가 자꾸 어긋나고
쭈글쭈글 오그라들어도 신이 났다.

한나절 도배를 하고 돌아보니
벽마다 활짝 핀 꽃송이
우리 가족 웃음 송이
하늘도 새로 도배를 했는지
구름무늬 푸른 벽지를 두르고
창문 가득히 푸르게 비쳐 온다.
(고광근·아동문학가, 1963-)

+ 이사

개미들이 줄지어 이사를 간다
저마다 뽀얀 알 하나씩 입에 물고
뽈뽈뽈뽈 새집으로 이사를 간다
한참이나 지켜봐도 이삿짐은 그뿐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 컴퓨터, 장롱…… 같은 건  
하나도 없다
(권오삼·아동문학가, 1943-)

+ 이사 간 자리

옥상의
동그라미

화분들이 살다가
이사 간 자리

큰 화분은 큰 동그라미
작은 화분은 작은 동그라미

몸에 꼭 맞게
집 지어 살다
이사 간 자리

새 집에서도
꼭 맞게
집 짓고
꽃 피우며 살겠지.
(안영선·아동문학가)

+ 집게

소라 껍질이
나에게는 훌륭한
집이지요.

이사를 할 때
나는 집을
등에 지고 가지요.

이층에 함께 사는
말미잘도
그냥 옮겨줘요.
(김진광·아동문학가)

+ 처음처럼

이사를 가려고 아버지가
벽에 걸린 액자를 떼어냈다
바로 그 자리에
빛이 바래지 않은 벽지가
새것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집에 이사 와서
벽지를 처음 바를 때
그 마음
그 첫 마음,
떠나더라도 잊지 말라고
액자 크기만큼 하얗게
남아 있다
(안도현·시인, 1961-)

+ 이사 가는 날

이사 가는 날
헤진 동화책과
낡은 장난감이
서로 눈치를 본다.

'나는 데려갈 거야'

헌 책상과 의자도
마음이 초조하다.

'나는 영이와 함께
공부했으니까
데리고 갈 거야'

이사 가는 날
모두 모두
눈치를 보며
차에 타기를 기다린다.
(하청호·아동문학가)

+ 봉숭아 이사

우리 이사는
맑은 날 하고
봉숭아 이사는
비 오는 날 한다.

우리 이사는
이삿짐 차로
봉숭아 이사는
삽으로 한다.

봉숭아 이사 쉽지?
아냐, 뿌리내린 땅과
숨쉬던 하늘까지도
퍼 와야 하거든.

어렵겠다고?
아냐, 둥글고 넓고 깊게 파
한 삽 푸-욱 떠오면
하늘과 땅도 딸려 오거든.
(박방희·아동문학가, 1946-)

+ 이삿짐 차

이 골짜기
여문 열매들
톡톡

산새들이 먹고,

저 골짜기로
훨훨 날아가
씨를 끙-

응가를 흙이 껴안아 주고,

이 골짜기의 나무
저 골짜기에서 싹 틔우고
저 골짜기의 풀
이 골짜기에서 꽃 피우고

산새들은 이삿짐 차다
(조영수·아동문학가)

+ 꽃의 재발견

새봄, 누군가 또 이사를 간다
재개발지구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야 코딱지 후비며 고층아파트로 우뚝 서겠지만
개발될 수 없는 가난을 짊어진 양지전파상 金만복 씨도 떠나고

흠흠 낡은 가죽소파 하나 버려져 있다
좀 더 평수 넓은 집을 궁리하던 궁둥이들이 깨진 화분처럼 올려져 있다
자본주의 경제의 작은 밑거름도 될 수 없는 똥 덩어리들

꽃을 먹여 살리는 건 밥이 아니라 똥이어서
공중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로 머리띠 동여매고 뭉개진 발자국들이
궁둥이 두들겨 꽃을 뱉어낸 거지

언제부터일까 버리는 것보다 버림받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
푹신푹신했던 소파가죽 찢어발기고
툭, 튀어나온 스프링

누군가 버림받은 곳에서만
꽃은 핀다
(김륭·시인, 196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게시글을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뒤로 목록 로그인 PC버전 위로

© https://feel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