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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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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생각하는 시 모음> 이기철 시인의 '네 켤레의 신발'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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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생각하는 시 모음>   이기철 시인의 '네 켤레의 신발' 외

 

+ 네 켤레의 신발

 

오늘 저 나직한 지붕 아래서
코와 눈매가 닮은 식구들이 모여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은
얼마나 따뜻한가

 

늘 만져서 반짝이는 찻잔, 잘 닦은 마룻바닥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소리 내는 창문 안에서
이제 스무 해를 함께 산 부부가 식탁에 앉아
안나 카레리나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가 긴 휘파람으로 불어왔는지, 커튼 안까지 달려온 별빛으로
이마까지 덮은 아들의 머리카락 수를 헬 수 있는
밤은 얼마나 아늑한가

 

시금치와 배추 반 단의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의 전화번호를
마음으로 외는 시간이란 얼마나 넉넉한가
흙이 묻어도 정겨운, 함께 놓이면 그것이 곧 가족이고 식구인
네 켤레의 신발
(이기철·시인)


+ 식구

 

매일 함께 하는 식구들 얼굴에서
삼시 세끼 대하는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때마다 비슷한 변변치 않은 반찬에서
새로이 찾아내는 맛이 있다.

 

간장에 절인 깻잎 젓가락으로 잡는데
두 장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다시금 놓자니 눈치가 보이고
한번에 먹자니 입 속이 먼저 짜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나머지 한 장을 떼어내어 주려고
젓가락 몇 쌍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이런 게 식구이겠거니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내 식구들의 얼굴이겠거니
(유병록·시인)


+ 오늘 하루

 

모처럼 저녁놀을 바라보며 퇴근했다
저녁밥은 산나물에 고추장 된장 넣고 비벼먹었다
뉴스 보며 흥분하고 연속극 보면서 또 웃었다
무사히 하루가 지났건만 보람될 만한 일이 없다

 

그저 별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라고 자책하면서도
남들처럼 세상을 탓해보지만
늘 그 자리에서 맴돌다 만다

 

세상살이 역시 별것 아니라고
남들도 다 만만하게 보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살라고 하시던 어머니 말씀 생각났다

 

사실 별것도 아닌 것이 별것도 아닌 곳에서
별것처럼 살려고 바둥거리니 너무 초라해진다
한심한 생각에 눈감고 잠 청하려니
별의별 생각들 다 왔다 갔다 한다
그래도 오늘 하루 우리 가족
건강하게 잘 먹고 무탈한 모습들 보니
그저 고맙고 다행스러워
행복의 미소 눈언저리까지 퍼진다.
(공영구·시인)


+ 아버지의 마음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김현승·시인, 1913-1975)


+ 가정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박목월·시인)


+ 가족
 
하늘 아래
행복한 곳은
나의 사랑 나의 아이들이 있는 곳입니다.

 

한 가슴에 안고
온 천지를 돌며 춤추어도 좋을
나의 아이들.

 

이토록 살아보아도
살기 어려운 세상을
평생을 이루어야 할 꿈이라도 깨어
사랑을 주겠습니다.

 

어설픈 애비의 모습이 싫어
커다란 목소리로 말하지만
애정의 목소리를 더 잘 듣는 것을

 

가족을 위하여
목숨을 뿌리더라도
고통을 웃음으로 답하며
꿋꿋이 서 있는 아버지의
건강한 모습을 보이겠습니다.
(용혜원·목사이며 시인)
 

+ 형제

 

초등학교 1,2학년 애들이려나
광주시 연제동 연꽃마을 목욕탕
키가 큰 여덟 살쯤의 형이란 녀석이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여섯 살쯤 아우를
때밀이용 베드 위에 벌러덩 눕혀놓고서
엉덩이, 어깨, 발바닥, 배, 사타구니 구석까지
손을 넣어 마치 그의 어미처럼 닦아주고 있었다
불알 두 쪽도 예쁘게 반짝반짝 닦아주는 것이었다

 

그게 보기에도 영 좋아 오래도록 바라보던 나는
"형제여! 늙어 죽는 날까지 서로 그렇게 살아라!"
중얼거려주다가 갑자기 눈물방울을 떨구고 말았다
(김준태·시인)
     

+ 가족  

 

싸우지 말아라
남편은 우리에게 타이르고 나가지만
나가서 그는 싸우고 있다

 

한번도 말한 적이 없지만
그가 현관문을 들어설 때
우리들은 안다

 

그의 옷을 털면
열두 번도 더 넘어졌을 바람이
뚝 뚝 눈물처럼 떨어진다

 

싸우지 말아라
아침이면 남편은 안스럽게
우리를 떠나지만
그는 모른다
아이들의 가볍고 보드라운 입김이
따라가는 것을

 

그가 싸울 때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떨고 있는 것을
(김유선·시인, 1950-)


+ 가족

 

우리집 가족이라곤
1989년 나와 아내와
장모님과 조카딸 목영진 뿐입니다.

 

나는 나대로 원고료(原稿料)를 벌고
아내는 찻집 '귀천(歸天)'을 경영하고
조카딸 영진이는 한복제작으로
돈을 벌고

 

장모님은 나이 팔십인데도
정정하시고...

 

하느님이시여!

 

우리가족에게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천상병·시인, 1930-1993)


+ 가족

 

새로 담근 김치를 들고 아버지가 오셨다.
눈에 익은 양복을 입고 오셨다.
내 옷이다, 한번 입은 건데 아범은 잘 안 입는다며
아내가 드린 모양이다.

 

아들아이가 학원에 간다며 인사를 한다.
눈에 익은 셔츠를 걸쳤다.
내 옷이다, 한번 입고 어제 벗어놓은 건데
빨랫줄에서 걷어 입은 모양이다.
(윤제림·시인, 1959-)


+ 콩나물 가족

 

아빠는 회사에서 물먹었고요
엄마는 홈쇼핑에서 물먹었데요
누나는 시험에서 물먹었다나요

 

하나같이 기분이 엉망이라면서요
말시키지 말고 숙제나 하래요

 

근데요 저는요
맨날맨날 물먹어도요
씩씩하고 용감하게 쑥쑥 잘 커요
(박성우·시인)


+ 죽겠다 가족

 

마을 정자를 찾은 팔순 노모
지팡이에 끌려온 엉덩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히며 죽겠다 죽겠다
오십 후반 아들
애인 기다리듯 문짝에 두 눈 박아 놓고  
가게세도 못 건진다며 죽겠다 죽겠다
삼십 초반 손자
벼룩시장 이 잡듯 뒤적이다
오라는 곳 없어 죽겠다 죽겠다
열살 먹은 증손자
책상에 영어몰입교육 책 펴놓고 
뻣뻣한 혓바닥에 휘말려
죽겠다 죽겠다

 

데엥 데엥
소불알시계 열 두 시를 알리면
앞 다투어  
배고파 죽겠다 죽겠다

 

점심 후 짬 내어
아들은 팔순 노모 팔다리 주무르고
손자는 아버지 등 두드려 준다
증손자 손자 어깨에 올라가
목청 큰 기마병 된다

 

이구동성 쏟아내는 말
좋아 죽겠다 죽겠다  
(전정아·시인, 1973-)


+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시인, 1960-1989)


+ 아버지가 오실 때

 

아버지가
집에 오실 때는
시커먼 석탄 가루로
화장을 하고 오신다.
그러면 우리는 장난말로
아버지 얼굴 예쁘네요.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이
그럼 예쁘다 말다.
우리는 그런 말을 듣고
한바탕 웃는다.
(하대원·아동문학가)


+ 둥근 우리 집

 

내 생일날
피자 한 판 시켰다.

 

열어보고
또 열어봐도

 

일하러 간
우리 아버지
아직 안 오신다.

 

형의 배가 꼬로록
나는 침이 꼴깍
그래도 보기만 하고 참는다.

 

다섯 조각
모두 모여야
피자 한 판

 

아버지 오셔야
다섯 식구
피자같이 둥글게 되지.
(안영선·아동문학가)


+ 가족사진

 

아들이 군대에 가고
대학생이 된 딸아이마저
서울로 가게 되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자고 했다

 

아는 사진관을 찾아가서
두 아이는 앉히고 아내도
그 옆자리에 앉히고 나는 뒤에 서서
가족사진이란 걸 찍었다

 

미장원에 다녀오고 무스도 발라보고
웃는 표정을 짓는다고 지어보았지만
그만 찡그린 얼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떫은 땡감을 씹은 듯
껄쩍지근한 아내의 얼굴
가면을 뒤집어쓴 듯한 나의 얼굴
그것은 결혼 25년만에
우리가 만든 첫 번째 세상이었다.
(나태주·시인)


+ 가족사진

 

벽에 걸린 사진을 바라보는
달랑 둘이 남은 부부
시집간 딸과 군대간 아들
사랑이란 글자만 남아있는
썰렁한 체온들
자식들이 떠난 식탁에 차려진
찬밥에도 아무 불평이 없다

 

기어다니는 아기를 바라보며
입이 귀에 걸린 부부
사진만으로도 가득 찬 행복
아기가 흩어놓은
살림살이에 따뜻한 온기들
젖병, 이유식, 우유들이
즐비한 식탁에 차려진
찬밥에도 아무 불평이 없다
(목필균·시인)


+ 가족사진 

 

빗소리가 가늘게
문 밖에서 웅성거리는 날,
날개 달린 생각들이
밤 늦도록 들락거리고

 

나와 함께, 방안에서
축축하게 눅지는 것들
그 중에서도 유독,
벽에 걸린 식구들 사진 몇 장이
두런두런 깨어나
소복이 모여, 나를 쳐다본다

 

내가 그들을 깨웠을까
쳐다보는 그들이,
나를 잠 못 들게하나
(신석종·시인)


+ 성인(聖人)의 길

 

밖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족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은 드물다.
밖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아내로부터
인정을 받는 남편은 드물다.

 

서로 모르는 타인끼리 만나
아이를 낳고,
한 점의 거짓도 없이 서로서로의 약속을
신성하게 받아들이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살다가,

 

감사하는 생활 속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가족이라면,
그들은 이미 가족이 아니라
하나의 성인(聖人)인 것이다.
(최인호·소설가)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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