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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시 모음> 오태환의 '묘비명'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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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시 모음> 오태환의 '묘비명' 외  

+ 묘비명

내가 눈으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희미한 노을 몇 잎뿐이었고
내가 귀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궂은 빗소리 몇 마디뿐이었고
내가 입으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쓴 소주 몇 잔뿐이었고
내가 손으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부질없는 시詩 몇 줄뿐이었고
세상이 한번 나를 탕진하니 이렇듯 되고 말았다
(오태환·시인, 1960-)


+ 길가의 비석에 새겨진 글

아! 오직 한번뿐인
이슬같이 짧은 삶 속에 피는 꽃.
아무리 하찮고, 적으며 보잘것없는 꽃이라도
나의 꽃을 피우고 싶다.
(사카무라 신민·坂村眞民, 일본 시인)


+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그리스 소설가, 1883-1957)


+ 묘비명

내가 죽거든, 내 친구들이여
무덤 위에 버들 한 그루 심어주오.
나는 그 늘어진 잎새를 좋아하며
그 푸른 빛깔은 부드럽고 다정해,
내가 잠자는 땅 위에
산뜻한 그림자를 드리울 거요.
(알프레드 드 뮈세·프랑스 시인, 1810-1857)


+ 비명(碑銘)

그대가 거기 오래 머무를수록
그대는 여기 더 오래 함께 있나니.

그대가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대는 더 가까이 내 곁에 있다.

그대는 매일의 빵보다 내게 더 소중하나니.

그대가 눈을 오래 감을수록
그대는 더 살아 움직이리라.
(뵈리스 폰 뮌히하우젠·독일 시인, 1874-1945)


+ 경계에서 - 묘비명

나는 이제 내 밥이던 것들의 밥으로 돌아간다
나는 이제 내 몸이던 것들의 몸으로 돌아간다
내 사랑이던 것들의 사랑으로
내 노래이던 것들의 노래로
나는 이제 천지 가득 돌아간다

또 다른 나에게로
(백우선·시인, 전남 광양 출생)


+ 묘비명

나 열렬하게 사랑했고,
열렬하게 상처받았고,
열렬하게 좌절했고,
열렬하게 슬퍼했으나
모든 것을 열렬한 삶으로 받아들였다.
(공지영·소설가, 1963-)


+ 내 묘비명

파란 하늘
하얀 구름
푸른 바람
한 잔 술에 취하던 날
사랑을 알았노라고

빨간 꽃이 메마른 가지에
피어나던 날
사랑을 시작했노라고

까맣던 머리에
하얀 목련꽃이 쏟아지던 날
사랑의 아픔도 알았노라고

찬바람 일렁일 때
세상이 얼어버렸을 때
얼음 꽃도 피우려고
너만을 죽도록 사랑했노라고

희로애락 속에
사랑하다 떠났다고
그리 그려 주오
(신정숙·시인)


+ 묘비명

삶의 희로애락
모두 끝났다

사랑의 기쁨과 괴로움도
깨끗이 지워졌다.

나 이제부터 영원까지
고요한 잠에 들리라

평안하고도 평안한
잠에서 영영 깨지 않으리라.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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