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벚꽃을 노래하는 시 모음> 정연복의 '꽃비' 외
도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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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벚꽃을 노래하는 시 모음> 정연복의 '꽃비' 외
+ 꽃비
며칠 만발했던
벚나무에서
오늘은 사르르
꽃비 내린다
하얀 눈송이같이
춤추며 떨어지는 잎들.
단 며칠 살아서도
그리도 밝고 눈부시더니
지면서 떠나면서
더욱더 아름답구나
허공을 가벼이 나는
꽃이여.
+ 꽃비 내리는 날에
꽃비 내리는데
아름다운 꽃비 내리는데
그 꽃비 맞으며
순해지는 가슴들이 있는데
세상이 악하다는
생각은 잠시 접기로 하자.
꽃비 내리는데
아롱아롱 꽃비 내리는데
그 꽃비 맞으며
연인들이 다정히 걸어가는데
세상에 사랑이 식었다는
생각은 떨쳐버리기로 하자.
+ 지는 벚꽃의 노래
꼬박 일년을
꽃 피기 기다렸건만
단 며칠만 살다 가야 해도
슬퍼하지 않으리.
하룻밤 새 피었다가
하룻밤 새 지는 내 모습
남들의 눈에는
덧없어 보일지 몰라도
한 점 하얀 불꽃 되어
세상을 환히 밝혀 주었던
나의 화끈한 생에
후회나 아쉬움은 없어
내년을 기약하며
기쁘게 총총 떠나가리.
+ 떠나는 벚꽃에게
그제는 활짝 피어
눈부신 불꽃이더니
어제는 벌써
시들해진 기색이더니
오늘은 바람에 날려
비에 젖은 땅에 몸을 누이네.
허기진 세상의
풍요한 밥이 되어 주었던
어질고 고귀한 생
깨끗이 마무리하면서
티없이 맑은 웃음
다시 한번 선물하고 떠나는
작아도 예쁜 꽃이여
빛의 천사여.
+ 벚꽃, 지다
꽃샘추위 심술
슬그머니 뿌리치고
나 보란 듯이
수많은 알갱이
하얀 불씨로 피어나
한밤중에도
환히 불 밝히며
엊그제까지만 해도
가지가 출렁일 듯
빛이 번성하더니
밤새 내린 가랑비
한줄기 봄바람도 못 이겨
아롱아롱 슬픔의
눈(雪)으로 내려
갓난아기
앙증맞은 손톱 같은
작디작은 이파리들
소복소복 꽃길 되어
뭇 사람들의 억센
발길 아래 스러지더니
아,
어느새 벚꽃 가지마다
연초록 눈부신
잎새들 무성하여라.
+ 벚꽃의 열반
꽤나 오래 심술궂던
꽃샘추위의 눈물인가
미안한 듯 서러운 듯
살금살금 내리는 봄비 속에
이제야 피었나 싶더니
어느새 총총 떠나는
아기 손톱 같은
벚꽃들
한 잎 두 잎
보도(步道)에 몸을 뉘여
오가는 이들의
황홀한 꽃길이나 되어 주며
말없이 점점이
열반(涅槃)에 들어
세상 한 모퉁이
환히 밝히고 있다.
행여 그 꽃잎 밟을까봐
조심조심 걸었네
부러워라
부러워라
뭇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서도 가만히 웃는
저 작고 여린 것들의
순결한 마침표
* 정연복(鄭然福): 1957년 서울 출생. pkom545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