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노래하는 시 모음> 정연복의 '길 위에 서다' 외
도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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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노래하는 시 모음> 정연복의 '길 위에 서다' 외
+ 길 위에 서다
세상의 모든 길은
어디론가 통하는 모양이다
사랑은 미움으로
기쁨은 슬픔으로
생명은 죽음으로
그 죽음은 다시 한 줌의 흙이 되어
새 생명의 분신(分身)으로
아무리 좋은 길이라도
가만히 머무르지 말라고
길 위에 멈추어 서는 생은
이미 생이 아니라고
작은 몸뚱이로
혼신의 날갯짓을 하여
허공을 가르며 나는
저 가벼운 새들
+ 물의 길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간다
낮은 데서
더 낮은 데로 흘러간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곳에서는
한동안
숨 고르며 머무른다.
내가 찰 만큼 찼다 싶으면
허리띠 얼른 동여매고
다시 또 낮은 데를 찾아
기쁘게 흘러간다.
낮아지니까
끊임없이 낮아지니까
마침내 평화의 바다에
다다른다.
겸손하고도 굳센
물의 길
끝없이 깊이를 찾아가는
아름다운 길.
+ 꽃길
예쁜 꽃들이 줄지어 선
길이 아니어도 좋다
들꽃 몇 송이뿐인
황량한 길이어도 좋다
한 발 한 발 내딛기 힘든
가시밭길이어도 좋다
앞을 예측하기 힘든
어둠 짙은 길이어도 좋다.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길이라면
이 모든 길을
'꽃길'이라 부르리.
당신이라는 존재는
나의 영원한 '꽃'이어서
당신과 함께 걷는 어디든
내게는 꽃길이니까.
+ 봄 길
누렇게 빛 바랜 낙엽들
카펫처럼 깔려 있는
아파트 베란다 앞뜰을
오랜만에 산책했다.
아직은 한겨울
바람이 몹시 차가운데
수북히 쌓인 낙엽들 사이로
듬성듬성 초록 풀들.
아가의 새끼손가락
손톱보다도 작은
앙증맞은 잎들이 힘차게
봄을 밀어올리고 있다
온몸으로
봄 길을 내고 있다.
+ 구름에게 길을 묻다
잔잔한 바다 같은
파란 하늘에 평안히 떠가는
구름에게 길을 물었더니
살짝 귀뜸 해주네.
'높은 하늘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면
인간 세상은 너무 분주하고
복잡하게 돌아가네
사람들도 쓸데없는
생각이나 고민이 너무 많은 것 같아.
딱히 무슨 길이 있겠어
그냥 제 길 가면 되는 거지
지나친 욕심과 허영심
미움과 질투와 경쟁심에서 벗어나
하늘같이 평화롭고
깊은 바다같이 고요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순간순간
가고 싶은 길로 가면 되는 거지.'
+ 내리막길
오르막 산행을 할 때는
힘들고 숨이 찹니다
산길을 내려올 때는
그냥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지금껏 내가 걸어온
인생의 길을 뒤돌아봅니다
오르막을 지나
내리막으로 들어선 지 오래입니다
언제 내가 이렇게
긴긴 길을 걸어왔는지
세월의 빠름 앞에
가만히 옷깃을 여밉니다.
앞으로 얼마쯤의 길을
더 걸어가야 할지 알 수 없지만
남은 내리막길은 힘 빼고
가벼운 발걸음을 해야겠습니다.
+ 길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은
누구라도 아름답다
논밭을 갈며 한 뼘 한 뼘
땀흘려 나아가는 농부의 길
새벽녘 거리의 쓰레기를 줍는
이름 없는 청소부의 총총대는 발길
심장이 터질 듯한 백 리 먼 길
끝내 완주하는 고독한 마라토너의 길
예쁜 발이 기형이 되고 만
어느 발레리나의 뜨거운 예술혼의 길.
어디 사람뿐이랴.
동에서 서로 묵묵히 걸어
아침과 낮과 밤을 만드는 태양의 길
유유히 흐르는 강물의 길
밀물과 썰물 사이 파도의 길
철 따라 피고 지는 꽃의 길
녹음(綠陰)과 단풍과 낙엽의 잎새 길
이렇게 세상에는
우직하게 제 길 가는 것들 많고도 많지.
지상에서 한번뿐인 생
나는 나의 길을 걸어야지
평탄하지는 않아도 보람있는
자유와 사랑의 길
굳센 믿음과 용기를 갖고
늘 기쁜 마음으로 걸어가야지.
* 정연복(鄭然福): 1957년 서울 출생. pkom545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