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에 관한 시 모음> 나태주의 '완성'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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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에 관한 시 모음> 나태주의 '완성' 외
+ 완성
집에 밥이 있어도 나는
아내 없으면 밥 안 먹는 사람
내가 데려다 주지 않으면 아내는
서울 딸네 집에도 못 가는 사람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면서
반편이 인간으로 완성되고 말았다.
(나태주·시인, 1945-)
+ 부부의 날
푸른 창공만큼이나 오월의 꿈과 소망
그리고
감사가 넘치는 계절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그리고
21일은
둘이 한 몸을 이루어 산다는
부부의 날
남남이 서로 만나
티격태격
싸움 없이 산 날이 있으련만
스무 해가 지나고 스무 한 해
모진 풍파 다 겪으며
인동초처럼 살아 온 세월
뼈마다 부서지고 다리 어깨 통증 오고
그 고옵던 얼굴 주름진 성상
제비꽃 같은 그 마음씨도
세상 풍파 서리 맞고
거칠디 거친 장미꽃 넝쿨 같아라
눈빛으로 사랑하고
마음의 거울로 비쳐보는
너가 아닌 나
나가 아닌 너가 하나 되어
노래하리 사랑을
하나되리 너와 나
부부의 날
부부의 노래
그대에게 바치리
(윤용기·시인, 1959-)
+ 이사
이 남자다 싶어서
나 이 남자 안에 깃들어 살
방 한 칸만 있으면 됐지 싶어서
당신 안에 아내 되어 살았는데
이십 년 전 나는
당신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나 당신 밖에 있네
옛 맹세는 헌 런닝구처럼 바래어져 가고
사랑도 맹세도 뱀허물처럼 쏙 빠져나간 자리
25평도 아니야
32평도 아니야
사네
못 사네
내 마음의 공허가
하루에도 수십 번 이삿짐을 쌌다 풀었다 하네
(김나영·시인, 경북 영천 출생)
+ 접목接木
늘그막의 두 내외가
손을 잡고 걷는다
손이 맞닿은 자리, 실은
어느 한쪽은 뿌리를 잘라낸
다른 한쪽은 뿌리 윗부분을 잘라낸
두 상처가 맞닿은 곳일지도 몰라
혹은 예리한 칼날이 내고 간 자상에
또 어느 칼날에도 도리워진 살점이 옮겨와
서로의 눈이 되었을지도 몰라
더듬더듬 그 불구의 생을 부축하다보니 예까지 왔을 게다
이제는 이녁의 가지 끝에 꽃이 피면
제 뿌리 환해지는,
제 발가락이 아플 뿐인데
이녁이 몸살을 앓는,
어디까지가 고욤나무고
어디까지가 수수감나무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저 접목
대신 살아주는 생이어서
비로소 온전히 일생이 되는
(복효근·시인, 1962-)
+ 부부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 꽃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 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 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부란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문정희·시인, 1947-)
+ 아내와 나 사이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이생진·시인, 1929-)
+ 접기로 한다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 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
햇살에 배겨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박영희·시인)
+ 중년부부
속 다 비우고
솔솔 파도의 알갱이를 뿌린
고등어 한 손
등푸른 바다의 지문이 새겨진
지느러미부터
아가미를 지나
눈까지
누우렇게 한 간으로 배이면
세상 바라보는 비릿한 시선도
하나로 포개진다
(고미숙·시인)
+ 부부
또 당한 것이다
아침밥을 먹다가 벌컥 화를 내며
남편이 나갔다
전화도 없다
그런데도 편하다 이제 나도 오십
천천히 베란다로 나간다
화분 앞에 쪼그려 앉는다
아무 생각 없이 이파리를 보고 만지고 물을 준다
아무 생각 없이 천천히 백화점 돈다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 들러
물 좋고 싱싱한 낚지 두 코다리 사서
(이것은 우리 아들도 아주 좋아한다)
저녁 준비를 하는데
일찍 퇴근한 남편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코를 킁킁거리며 부엌으로 오더니
슈크림빵 한 봉지
내 앞에 들이민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종일 혼자 있으면
화도 웃음이 된다
아이구 저 화상, 하면서도
(이성이·시인)
+ 아내의 비밀
내 배꼽에
탄가루가 끼인 것은
아내만 안다.
내 작업복
실밥 간 곳마다
절어 붙은 탄가루도
아내만 안다.
이불 아래
무언의 호소
메아리 없는 빈 천장
둥지(冬至) 어느 밤이었더이다.
새벽 칸데라를 들고
주섬주섬 갱으로 나가는 길
어쩐지 우람한 어깨가 밉다고 했다.
살을 섞고 사는
부부 사이도 가슴속에
또 하나의 얼굴
그것이 몹시 미웠다 한다......
(진인탁·시인, 1923-1993)
+ 백수
요즘 아내의 방문 여닫는 소리 자꾸만 크게 들린다.
도대체 뭘 해요 쿵, 뭐 좀 어떻게 해봐요 쿵,
부글부글 속 끓다가도 끽, 뭐라 목젖을 잡아당기다가도 끼익,
한숨 한 번 내쉴 양이면 그마저 문소리에 끼여 끽,
문소리가 격해질수록 나는 벙어리가 되어간다.
쿵, 하는 문소리 사그라지는 틈으로 아내의 목소리
아이더러, 아빠 식사하세요 해, 하는 말 엿듣고 눈물난다.
(안상학·시인, 경북 안동 출생)
+ 연리지(連理枝)
손 한번 맞닿은 죄로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하여
송두리째 나의 전부를 당신에게 걸었습니다
이제 떼어놓으려 해도 떼어놓을 수 없는 당신과 나는
한 뿌리 한 줄기 한 잎사귀로 숨을 쉬는
연리지(連理枝)입니다
단지 입술 한번 맞닿은 죄로
나의 가슴 전부를 당신으로 채워버려
당신 아닌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는
몸도 마음도 당신과 하나가 되어버려
당신에게만 나의 마음을 주는
연리지(連理枝)입니다
이 몸 당신에게 주어버린 죄로
이제 한 몸뚱어리가 되어
당신에게서 피를 받고
나 또한 당신에게 피를 나누어주는
어느 한 몸 죽더라도
그 고통 함께 느끼는 연리지(連理枝)입니다
이 세상 따로 태어나
그 인연 어디에서 왔기에
두 몸이 함께 만나 한 몸이 되었을까요
이 몸 살아가는 이유가 당신이라 하렵니다
당신의 체온으로 이 몸 살아간다 하렵니다
당신과 한 몸으로 살아가는 이 행복
진정 아름답다 하렵니다.
(황봉학·시인, 경북 문경 출생)
*연리지(連理枝) : 두 나뭇가지가 맞닿아서 같이 살아감,
서로 맘이 통하는 것으로 부부 또는 연인을 비유하는 말.
+ 기왓장 내외
비오는 날 저녁에 기왓장 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 웁니다.
대궐 지붕 위에서 기왓장 내외
아름답던 옛날이 그리워선지
주름 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
(윤동주·시인, 1917-1945)
+ 어른이 되면
"여보, 여기 앉아 보세요.
발톱 깎아 드릴 테니."
"아니, 만날 어깨 아프다면서
무슨 일을 그렇게 많이 해요."
하루 일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 아버지는
밤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서로 발톱을 깎아 주고
서로 어깨를 주물러 줍니다.
그 모습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도 빨리 장가들고 싶습니다.
어른이 되면
어머니 같은 여자 만나서
아버지처럼 살고 싶습니다.
(서정홍·아동문학가, 1958-)
+ 사랑
밀린 월급 때문에
우리 아버지
술 한 잔 한 날.
어머니는
"뭔 돈으로 마셨노?"
핀잔을 줍니다.
큰 대자로 누운 아버지
양말 벗기고
바지 벗기고
"원수다 원수" 하면서
꿀물 타 주고
눈곱 떼 주고
아버지 발 주무르다
앉아서 조는
우리 어머니
원수를 사랑하십니다.
(장세정·아동문학가)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