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에 관한 시 모음> 정호승의 '햇살에게' 외
도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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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에 관한 시 모음> 정호승의 '햇살에게' 외 + 햇살에게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종일 찬란하게 비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호승·시인, 1950-) + 먼지 방안에 가득 찬 먼지가 한 줄기 햇빛에 드러난다 이렇게 먼지가 많은데도 아무렇지 않게 숨을 들이 마셨나 저 먼지처럼 보이지 않기에 저지른 잘못들이 얼마나 내 양심 속에 부유하고 있으랴. (김영월·시인, 1948-) + 마음에 낀 먼지 옥에 묻은 먼지는 닦을 수도 있지만 마음에 낀 먼지는 찍어내랴 불태우랴 닦지도 털 수도 없는 안타까운 이 내벽. (변학규·시인, 1914-?) + 먼지 3년 걸려 모은 500만원으로 집수리를 했다. 방을 비우기 위해 세간살이를 밖으로 나르자 온통 먼지, 먼지 투성이었다. 평소 빛나 보이던 가구도 실상은 먼지뿐이었다. 먼지를 재보(財寶)로 착각하다가, 끝내 한 줌 먼지로 사라지는 인생(人生) 먼지는 삶의 시작이자, 삶의 끝이다. (김시종·시인) + 먼지를 보며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던 보석함을 열었다 반지를 들어보니 놓였던 자리만 깨끗하다 서랍 안, 상자 속인데도 먼지가 앉은 것이다 들어갈 틈이 따로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먼지도 스며든다, 그러기 위해 정말 가벼워야 한다 열고 닫는 흐름에 몸을 실을 정도로 미세해야 한다 틈, 보석함이 숨을 쉴 때 들어갈 수 있도록 늘 그리워하고 있어야 한다 먼지가 스며든다는 것- 귀한 것에게로 가는 길은 다 그러할 것이다 나를 가장 작고 가볍게 하여 너를 갖기다 (이성이·시인) + 먼지 바람 타고 당신의 어깨 위에 소리 없이 앉아 있다가 당신의 걸음걸이에 마음을 졸입니다. 하찮은 나이지만 당신의 마음이 미치지 못한다 하여도 전 당신의 어깨 위에도 신발 위에도 그 어디에 있어도 좋습니다. (이향숙·시인) + 먼지 처음엔 더럽다고 털어내며 불었었네 곰곰이 생각하니 천 년 전 임의 향기 함부로 털어버릴 것 아니구나 내 인생 뭔지도 몰랐지만 알겠네 세월 가니 가볍게 날리는 몸 꽃 아니면 어떠하리 이 마음 청산을 나니 나비인들 부러우랴 (정문규·시인, 전남 화순 출생) + 먼지 새떼들이었구나 서걱이는 하늘 속으로 날아가는, 닦아내지도 털어내지도 못했던 시간의 틈새 끼인 먼지들은..... 휘저어 다오 두들겨 다오 얼음처럼 투명해질 때까지 높이 솟구쳐 가장 낮은 곳으로 날개 접을 때까지 (이진숙·시인, 1972-) + 먼지처럼 쌓이는 그리움 먼지를 털어내듯 가슴을 열어 잊고 싶었던 기억을 쫓아보지만 켜켜이 쌓이는 먼지처럼 그리움은 가슴 구석에 쌓여 있다. 문신처럼 새겨진 그리움의 흔적 석양이 붉게 물드는 사이로 그리움은 또 다른 그리움으로 가슴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다. (주인자·시인, 인천 출생) + 먼지 날리는 먼지 날리는 창가에서 나는 가뭄 만난 지구 목타는 나무. 내가 그 애를 이토록 보고 싶어하는데 그 애는 어찌 이토록 아니 온담? 그 애가 오면 손을 쥐어주리라, 아프다고 말할 때까지 그 애의 손에서 예쁜 꽃물이라도 스밀 때까지. (나태주·시인, 1945-) + 먼지 한국 냄새 그리워서 공항에 나간다 쏴아 하니 밀려오는 낯익은 방언 투박한 질그릇에 곰삭은 눈들 열여섯 하숙 시절 남관주역 대합실서 내 고향 보성 냄새 맡았었는데 서른 여섯 그 여자는 아직도 고향에 가지 못하고 점보기 은날개 파득이는 잔 케네디 공항에서 누군가 떨구고 간 한국 먼지 하나 주워 들고 혼자 서 있다. 이 먼지에 기대어 석달 열흘은 또 살아 내리라. (문정희·시인, 1947-) + 먼지처럼 푸른 일요일이 왔다 열 시간을 자고 다시 일곱 시간 잤는데 햇빛을 피해 자리를 옮겨가며 먼지처럼 행복하게 잠을 잤는데 그냥 잠잔 것은 아니다 내가 푸른 일요일을 한 끼도 안 먹고 잠을 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맑은 세상 맑은 기운으로 잘 돌아가라고 세상에다 두고 하루라도 내 죄 짓지 않을까 하여 해 다 기운 걸 보고야 늦게 뒤척이며 좋은 마음에 시 한 편 썼는데 생각해 보니 세상에 큰 죄 다시 지었다 (박윤규·시인, 경남 산청 출생) + 먼지에 대하여 될 수 있으면 틈을 보지 마라 머리카락이나 보푸라기들이 무더기로 모여 있기 쉬운 곳 집주인의 비밀이 묻어 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살비듬에는 다닥다닥 이야기가 붙어 있다 닦아낸 그 자리에 다시 앉는 먼지 닦아내면 또 앉을 먼지 제 몫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안고 있는 먼지 억지로 떼어내면 금방이라도 빨간 피가 묻어날 것처럼 치열하게 달라붙는다 틈이 많은 삶 그런 곳의 먼지에 대하여 쓸쓸해지는 날 이해하라 용납하라 때론 딱지 아래 핏물까지도 (서연정·시인, 1959-)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